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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47화 (47/301)

47화

* * *

황도의 귀족 영애, 엘리자베스는 무척이나 운이 좋은 여성이었다.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핏빛공…… 유리스 후작이 남몰래 자신을 초청하다니!

이계의 용사와 성검사를 비롯한 제국의 다섯 영웅 중 하나이자, 제국에서 가장 수려한 외모로 이름 높은 미남자. 그러한 남자의 구애를 거절할 여자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유리스 후작은 황도의 뭇 레이디들이 바라마지 않는 이상의 왕자님 그 자체였으니까.

왕자님이 백마를 타고 자신을 마중한 듯한 황홀감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망설임 없이 유리스 후작과의 밀회를 받아들였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깊은 새벽에, 누구도 없이 홀로.

* * *

바람이 불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삭풍 속에서,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작센의 흑검을 쥐고서, 데일의 등 뒤에서 침묵을 지키는 죽음의 기사들을 뒤로하고.

어디까지나 둘 사이에서 치러지는 일대일의 결투. 사실상 이 전투의 종지부를 찍는 대결과 다름없었다.

“그아아아아!”

오크 워보스가 포효와 함께 땅을 박찼다.

촤아악!

그의 손에 들린 양날 도끼가 휘둘러졌고, 도끼에 묻어 있는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중량과 속도를 겸비하고 있다.’

터무니없이 강력하며, 터무니없이 빠르다. 마법이나 오러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투사의 육체 하나로 쌓아 올린 강함.

데일은 어렵지 않게 냉기의 기류를 움직여 얼음의 방패를 형성했다.

쨍그랑!

도끼가 자신의 빙벽을 부수기 무섭게, 세열을 가해 폭발을 일으켰다.

샤드 매그넘. 그러나 칼날이 되어 휘몰아치는 얼음 조각 앞에서, 오크 워보스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

빙결 마법이 일말의 저지력도 갖지 못하고 그대로 거리가 좁혀졌다.

데일조차 예상하지 못한 터무니없을 정도의 무모함.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교차하듯 엇갈리며 오크 워보스를 향해 질주했다. 역으로 도끼의 사정거리 속에 파고들어 공격을 비껴내고 틈을 파고들어 일격을 내리꽂기 위해.

서슬 퍼런 도끼날과 데일의 육체가 아슬아슬하게 엇갈린다. 뺨을 따라 핏줄 하나가 그어졌다.

데일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그림자 칼날이 일제히 오크 워보스를 향해 쇄도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십수 자루의 검들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크 워보스의 품속에서 어둠의 검이 휘둘러졌다. 휘둘러지고 나서, 그림자 칼날이 유리처럼 깨지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어느덧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그림자의 총알’이 되어서. 흩뿌려진 총알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검과 마법, 내지는 검과 총(銃)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두 가지의 공격이 물 흐르듯 섞이며 이어졌고, 살아 있는 어둠의 악의가 오크 워보스를 향해 내리꽂혔다.

촤아악!

어둠의 검이 그의 육체를 갈가리 찢었고, 상처 속을 헤집고 그림자의 총알이 박혀 들었다.

‘먹혀들었다.’

줄줄이 흐르고 있는 출혈을 뒤로하고, 오크 워보스가 재차 포효를 내질렀다.

보통의 포효가 아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무릎 꿇지 않는 투지, 그리고 전사의 긍지가 깃들어 있는 외침이었다.

「키에에에엑!」

천지를 찢는 듯한 포효에, 오크 워보스의 체내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들이 겁을 집어먹는다.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듯 데일의 ‘그림자 망토’를 향해 되돌아왔다.

발밑의 음영 속으로 움츠린 그림자 무리를 뒤로하고, 데일이 혀를 찼다.

오크 워보스에게 더 이상 이성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광폭화(狂暴化).

‘올 게 왔다.’

생명을 불사르며 오크 워보스가 쇄도했다. 휘둘러지는 도끼날 하나하나에, 불타듯 스러지고 있는 생명의 소멸이 느껴졌다.

‘빠르다.’

휘둘러지고, 휘둘러지고, 또 휘둘러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며, 데일이 의식을 집중했다.

오크 워보스의 투기 앞에서 겁에 질린 채, 조용히 움츠린 발밑의 그림자 무리를 뒤로하고.

세 개의 서클이 끝없이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300rpm, 1,000rpm, 2,000rpm…… 마치 모터바이크의 회전수가 급격히 상승하듯이.

아울러 데일이 가진 ‘마력의 원천’이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심장과 서클 사이에 끼어들어 깊이 뿌리내린 촉수. 데일이 가진 또 하나의 어둠의 원천.

『검은 산양의 서』.

두 개의 ‘흑색 원천’에서 가공하고 정제한 어둠의 마력.

데일이 전력을 다해 가공한 터무니없는 고농도의 흑색 마력이, 겁에 질린 그림자 망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일찍이 데일이 쓰러뜨린 고위 마족, 이 아티팩트의 소유자가 보여준 그림자 망토의 능력을 떠올린다. 그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는 지금 같은 일개 피라미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 부족하다.’

발밑을 따라 꿈틀거리는 나약한 그림자 무리를 향해, 데일이 결의를 다졌다. 어둠의 마력을 채찍질하듯 휘몰아치며.

‘더 잔혹하고, 더 사악하고, 더 끔찍해져야 한다.’

그날, 데일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어둠의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를 걸친 진정한 이유를 보여주고자.

바로 그때였다.

─ 내가 도와줄까?

목소리가 들린다. 데일의 심장에서, 그를 향해 속삭이듯이.

소녀의 목소리였다.

‘아직 네가 나설 때가 아니야.’

데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 밑에서 꿈틀거리는 촉수를 떠올리며.

흑색공과 헬무트 경, 그리고 북부의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그녀의 힘을 빌리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

데일의 거부에, 촉수가 자신의 심장을 옥죄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하필 이럴 때. 여차할 때 그녀가 폭주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최악을 상상하며, 데일이 각오를 다졌다.

바로 그때였다.

─ 나는 오빠의 세계가 좋아.

『검은 산양의 서』가 대답했다.

─ 절대로 오빠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아.

걱정하지 말란 듯이.

─ 그러니까, 나를 마음껏 갖고 놀아줘.

천진할 정도로 잔혹한 악의와 함께, 그러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진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후우웅!

「키에에에엑!」

그와 동시에 발밑의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크 워보스의 그것처럼, 투지로 가득 차 있는 전사의 포효가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절규였다.

촤아아악!

동시에 데일의 발밑을 따라, 그림자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개 그림자 따위’가 아니었다.

발밑 일대를 집어삼키는 어둠의 물결이었다.

어둠의 호수가, 홍수처럼 일대를 수몰시키며 데일과 오크 워보스의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고, 공자님……!”

“저것이 대체!”

작센 공작이나 헬무트 경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외의 이들에게 있어, 데일의 모습이 보여주는 경악이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으리라.

그것은 흑색 마탑의 장로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물결을 출렁이고 있는 어둠의 호수 위에서, 오크 워보스가 땅을 박찼다. 그러나 데일은 미동조차 없이 상대의 쇄도를 지켜보았다. 발밑을 따라 느껴지는 ‘어둠의 영역’을 자각하며.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손을 휘둘렀다.

촤아악!

어둠의 호수 밑에서, 침묵 끝에 ‘잠복자’가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림자의 물결을 깨트리며.

무엇이 솟아났다.

검이나 마법, 총알의 형태조차 아니었다. 그저 가시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촉수였다.

《섀도우 러커(Shadow Lurker)》.

그림자 잠복자. 어둠 속에 잠복하며 먹잇감을 노리는 어둠의 피조물.

그리고 데일이 펼친 어둠의 호수는 바로 그 ‘섀도우 러커들의 서식지’였다.

그림자 망토의 능력이자 제3의 형태. 그림자 피조물.

‘섀도우 러커’들이 뿜어내는 무수한 가시 촉수들이, 오크 워보스를 향해 내리꽂혔다. 강철 갑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오크 워보스의 육질(肉質) 위로, 부드러운 스테이크 위로 포크를 꽂아 넣는 것처럼 맥없이.

“그아아아아-!”

오크 워보스에게 도망칠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움직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발악해도, 사방에서 솟아나는 섀도우 러커의 가시 촉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바로 이곳, 어둠의 호수 위에서.

콰직! 콰직!

그림자 촉수들이 끝없이 내리꽂혔다. 발악과 동시에 양날 도끼가 데일을 향해 휘둘러졌다.

바로 코앞까지 휘둘러지는 도끼날 앞에서, 데일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휘둘러지는 양날 도끼를 코앞에 두고, 재차 어둠의 촉수가 솟아 오크 워보스의 두 팔을 고정했다. 팔을 묶고, 다리를 묶고, 몸통과 어깻죽지를 묶고. 묶고 나서 날카롭게 벼려진 가시 촉수를 찔러 넣는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오브제처럼, 무수한 촉수들이 오크 워보스를 찢고 움켜쥐었다.

녹색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림자 잠복자들의 가시 촉수가 파고들어 찢어진 상처 사이로, 창자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데일은 감정 없는 표정으로 오크 워보스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포효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공허한 소리가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오크 워보스가, 힘없이 데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족 대이동.

살아남기 위해 무리를 이끌고 ‘마왕령’에서 벗어나 하얀 산맥을 넘고…… 바로 이곳, 작센 강 상류에서 생존을 위한 그의 투쟁이 비로소 끝을 맺었다. 그의 동족들과 함께.

여정의 종착지.

오크 무리가 패배한 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저 힘이 없는 까닭이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약육강식.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니까.

일찍이 마왕과 신검, 그리고 과거의 자신조차 결국 힘이 없는 까닭에 죽고 스러진 것이다. 오크 워보스 역시 예외일 수 없으리라.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린다.

사방에 널브러진 오크 무리의 시체들 사이에서, 데일을 바라보고 있는 무수한 북부의 전사들이 보였다.

방금 일전을 지켜본 북부의 귀족과 기사들, 그리고 작센 가의 사람들.

침묵이 이어졌다.

데일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 속에서, 누구 하나 함부로 소리를 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까닭에.

스릉!

바로 그때, 직전까지 오크 정예병을 도륙한 데일의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쥐고 있는 흑검을 바닥에 세로로 내리꽂으며.

쿠웅!

그와 동시에 일대의 귀족과 기사들이 잇달아 무릎 꿇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검을 내리꽂으며.

“공자님께서 오크 워보스를 쓰러뜨리셨다!”

“검은 공자님의 승리다!”

“데일 공자님께서 승리하셨다!”

“와아아아아!”

방금까지의 정적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귀를 찢을 듯 커다란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검은 공자(Black Prince)’의 이름이 갖는 악명과 공포에 새로운 경외가 덧씌워졌다.

마족 대이동에 맞서 오크 무리의 수장을 쓰러뜨린 북부의 수호자, 나아가 작센 공작 가의 가장 정당한 계승자로서.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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