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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44화 (44/301)

44화

* * *

적색 마탑의 퓨리파이어. 말 위에서 얼추 가늠한 숫자는 십수 명 남짓. 바로 그 십수 명의 ‘정화자’들이, 자신들의 적색 마력을 가공하며 살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어어어어!”

그들을 보조하는 수백 마리의 오크 기수들과 함께, 삼백여 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데일의 기병대를 추격하며.

최악의 상황이다.

적탑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대오를 갖추고 기병 돌격을 감행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압도적 화력 앞에서, 대놓고 이곳을 포격해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기사들의 진정한 힘은 철저한 조직력에서 비롯되는 전술적 파괴력에 있는 법이다. 그리고 적색 마탑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 조직력 자체를 봉쇄하는 데에 있었다. 적마법사들이 아무 까닭 없이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산개해서 흩어질 경우, 자신들을 추격하고 있는 오크 기수들이 발목을 잡는다.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이 자신의 심장을 옥죄고 있는 ‘촉수’에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말에서 내리거라, 데일.”

엘프 마법사, 세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와 같은 평정과 침착함을 되찾고서. 세피아의 말에 데일은 주저하지 않았다. 6서클의 엘프 마법사가 말하는 그 의미를, 데일 역시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데일의 명령에 따라 산개하고 있는 기병들을 뒤로하고, 그대로 말에서 내린다.

그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 샬롯과 함께.

“나머지 기병들은 그대로 내 명령을 이행하라!”

지휘관의 느닷없는 하마(下馬)를 보고 동요하는 기병들을 향해, 데일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 직후. 두 발로 무방비하게 동토를 딛고 있는 ‘검은 공자’를 노리고, 오크 기수와 퓨리파이어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빙정(氷晶)이여.”

빠르게 가까워지는 적들 앞에서, 세피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작센 가의 동토가 가진 축복 속에서, 스노우 엘프이자 수 속성의 6서클 엘프 마법사로서. 그녀의 제자를 지키고 적과 맞서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휘몰아쳐라.”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청아하고 투명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깨끗한 울림이다.

그와 동시에, 세계가 얼어붙었다.

그녀의 발밑을 중심으로 얼음의 결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웅!

두 사람을 노리고 질주하는 수백 마리의 늑대와 오크 기수, 그들 모두가 세피아의 발밑에서 휘몰아치는 냉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대로 얼어붙었다. 흡사 얼음 속에 갇혀버린 빙하기의 화석처럼.

오직 몇 명, 그녀의 냉기에 맞서 ‘불꽃의 갑주’로 자신들을 보호하는 퓨리파이어들을 제외하고서.

“너의 어린 기사를 물리거라, 데일.”

냉기의 폭풍 속에서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데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샬롯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샬롯.”

그러나 데일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군의 명령이야.”

“…….”

찰나의 주저 끝에,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타고, 절대 고삐를 늦추지 마.”

그렇게 말하고 나서, 데일은 샬롯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녀가 이행해야 할 중책과 함께.

“예의 도하 지점으로 퇴각해서, 우리 상황을 아버지에게 알려.”

“……알겠어.”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으므로.

샬롯이 멀어지고, 휘몰아치는 냉기의 폭풍 속에서 ‘불꽃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다리로 서서, 이글거리는 불꽃의 갑주로 자기 몸을 감싸고 있다. 적탑의 정화자 열두 명.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어느덧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데일의 기병대가, 오크 기수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어째서 적색 마탑이 마족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지?”

데일이 물었다.

“…….”

불꽃의 그림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퓨리파이어(정화자).

적색 마탑의 불꽃을 광신(狂信)하며, 자기 몸을 불사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 광기의 집행자.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적색 마탑의 적을 소각하는 일이니까.

퓨리파이어에게 있어 마법의 탐구란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적을 불태울까’ 하는 것이 전부이며,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이외의 마법이란 사치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적색 마탑의 기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마법사로서 하나하나의 역량 자체는 감히 청색 마탑의 장로 세피아에 비할 바가 아니나, 그들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적색 마탑의 기사’라는 이명처럼 ‘군체(群體)로서의 조직력’에 있다.

불꽃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팔을 뻗었다. 그들의 손에서 휘몰아치는 핏빛 마력이 서로를 향해 결합하며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

데일과 세피아를 일격에 날려버릴 지옥의 업화를 내리꽂기 위해서.

“울려 퍼져라.”

그러나 세피아가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청아하고,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쾌함을 가진 화음과 함께.

“……!”

이글거리는 업화가 되어 내리꽂혀야 할 포격이, 덧없는 촛불처럼 사그라졌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것 같은 풍경 속에 파묻히며.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공격보다 방어와 교란을 주력으로 삼는 청색 마탑의 기교.

무력화…… 디스펠 마법이다.

세피아의 손에서 생성되는 무수한 청색 마력의 입자들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다.

형성되는 마력의 결합 속에 끼어들어 구조를 깨트리고, 마법을 원천 봉쇄하는 청마법사(Wizard)의 특기.

《청색 불협화음》.

그 모습을 보고, 데일 역시 주저하지 않았다.

“작센의 기사들이여, 바로 지금이다!”

일정 이상의 복잡성을 요구하는 마법이 ‘세피아의 불협화음’ 앞에서 가로막혀 있는 이상. 고도의 마법을 펼칠 수 없는 마법사가, 돌격하는 기병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그리 많지 않다.

“차징!”

그렇기에 어느덧 대오를 가다듬고, 작센의 검은 기병대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오크들이 여울목 너머로 끝없이 강행 돌파를 시도했고, 그에 맞서 작센 공작이 지휘하는 주력 부대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

육중한 갑주로 무장한 중장기사들의 방벽과 그것을 뚫기 위한 오크들의 처절한 몸부림.

흑색공과 휘하 흑색 마탑의 장로들 역시, 멀찍이 떨어진 경사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등 뒤로 무수한 흑색 마탑의 어린 사령술사들을 거느린 채.

“에리스.”

“예, 탑주님.”

전황을 지켜보며, 흑색공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케넷 남작과 용병대장 요네스 경이 지휘하고 있는 도하 지점으로 아이들을 보내라.”

오크들의 강행 돌파 앞에서, 비교적 수세에 몰린 지점을 지목하며.

“탑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말에 흑색 마탑주의 비서, 에리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등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 흑색 마탑의 어린 흑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전장이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배움의 장이다. 어디에도 죽음이 펼쳐져 있고, 진실이란 늘 죽음 속에 존재하는 법이니까.

아울러 작센 공작의 이름 아래 결집한 영주들이 혈투를 펼치며, 전투의 치열함이 일정 이상으로 가열될 즈음.

“……이제 됐다.”

비로소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칠흑의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제국 제일의 흑마법사들, 흑의위(黑衣委)를 향해. 이 전투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자, 작센 공작 각하!”

데일의 메시지를 갖고, 어린 여기사 샬롯이 도착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 * *

기병들이 횡대로 돌격을 시작했고 그들에 맞서,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을 박차고 쇄도하며,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화염 줄기들.

청색 불협화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신속한 즉발 영창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향해 내달리는 기병들을 일소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는 화력.

“……!”

퓨리파이어를 둘러싸고 있는 화염의 갑주에서, 불줄기가 뿜어져 나와 기병들을 덮쳤다. 데일과 세피아는 어렵지 않게 냉기의 벽을 세워 그들의 일격을 저지했다. 비록 갑작스럽게 솟은 냉기의 벽에 가로막혀 기병들의 돌격 역시 저지되었으나, 어쨌거나 희생자를 낳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두 명의 수 속성 마법사가, 천혜의 대지 위에서 쌓아 올린 얼음의 방패. 퓨리파이어들의 열기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결합 강화, 다시 말해 급속 냉각의 수식(修飾)을 더하고──나아가 데일은 빙벽에 세열과 파편화의 수식을 추가했다.

방어 직후, 공격의 용도로 얼음의 벽을 터뜨리기 위해서.

기병 돌격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에 불과했다.

샤드 매그넘(Shard Magnum).

커다란 얼음의 벽이 폭발하고, 무수한 얼음 조각이 날카롭게 세공되어 산탄처럼 흩뿌려졌다. 퓨리파이어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꽃의 갑주 위로.

그러나 이글거리는 불꽃의 그림자에 도달하지 못하고, 얼음의 투사체가 덧없이 녹아내린다.

‘……!’

불꽃이란 열과 물질, 산소의 3대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벌어지는 결과물이며…… 열이란 결국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 운동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척도다.

차가움이란 것이 분자 운동이 적어지고, 나아가 점점 정지 상태에 가까워지는 개념을 일컫듯이.

그러나 세피아의 수식으로 결합한 얼음마저 녹여버리는 불꽃의 갑주.

‘가능할 리가 없다.’

열사(熱砂)의 대지 위에서 싸움을 펼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센의 동토에서, 청탑의 장로가 생성한 얼음마저 녹여버릴 정도의 불꽃을 지필 수 있다고? 도대체 무엇으로?

해답을 얻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병들을 지키기 위한 얼음의 벽이 사라지고 나서, 열두 명의 퓨리파이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들 대다수는 돌격하고 있는 데일의 기병대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고, 그중 몇 명이 기병들의 포위망을 뚫고 데일과 세피아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바로 그 직후.

“섀도우 불릿.”

불꽃 따위로 녹일 수 없는 ‘그림자의 총알’이 내리꽂혔고, 퓨리파이어 하나가 총알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데일의 바로 코앞에서.

로브가 벗겨지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불꽃에 피부가 불타고 뼈마저 녹아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잿더미에 가까운 존재였다.

“……목적이 뭐냐?”

무릎 꿇고 쓰러진 퓨리파이어를 향해, 데일이 물었다.

“히, 히히히.”

딱히 그럴싸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이 세상의 전부가 불타오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상이 불타고, 잿더미 속에서 그들이 강림할 것이다……!”

비틀린 미소와 함께 광기에 찬 헛소리가 이어질 따름이다.

콰아앙!

그와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자신을 비롯해 일대의 전부를 휘말리게 할 정도의 폭사.

‘자폭 마법!’

그것을 보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제야 이해했다. 불꽃의 갑주 따위를 두르고 있는 게 아니다.

이곳에 있는 적색 마탑의 퓨리파이어들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태우고 있었다. 갑주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데일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폭발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데일의 기병대를 비롯해, 데일과 세피아조차 예외일 수 없는 불꽃의 세례가 휘몰아쳤다.

‘열두 개의 폭발물’ 중에서 고작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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