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40화 (40/301)

40화

* * *

“게올의 빌헬름! 기사 삼십과 중장보병 일백, 보병 사백 명을 이끌고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비델의 조셉! 기사 삼십과 중장보병 오십, 경기병 오십, 보병 삼백 명을 이끌고 흑색공 각하를 뵙습니다!”

“빌더버그의 케네스! 오러 나이트 하나! 기사 삼십에 중장보병 일백…….”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에서, 북부 각지의 영주들이 저마다 거느린 기사와 사병들의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옥좌에 앉은 그들의 대영주…… 흑색공 앞에 충성을 맹세하며.

북부 제일의 대제후이자 3대 공작의 일좌, 작센 공작을 위해 결집한 북부 귀족들.

“아울러 저희 게올 가의 장남 베스가, 이 전투에서 꼭 공작 각하를 위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듯, 저희 게올 부자는 공작 각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로 보이는 귀족이 입을 열었고,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젊은 청년 하나가 무릎을 꿇고 검을 내리꽂았다.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자기 아들을 잘 좀 봐달라.’는 모종의 호소였다.

“저희 케넷 가의 차남 요네스 역시, 기특하게도 자신이 직접 꾸린 용병대 일백과 함께…….”

그리고 그 같은 잇속을 챙기려는 것은 게올 백작 하나가 아니리라. 그렇기에 작센 공작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충성에 늘 감사하오.”

전투는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 다가올 전투에 앞서 영주들이 성에 집결하고, 병사들이 막사에 머물며 편제(編制)를 정비하는 사이…… 대영주로서 아랫사람을 규합하고, 파벌의 덕망을 얻는 과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사이 벌어지는 귀족들 사이의 친목과 사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의례다. 어느 파벌에 줄을 대고, 어느 귀족에게 잘 보여야 할지. 그 점에 있어 북부 귀족과 아들들이 줄을 대야 할 당사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삼가 검은 공자님을 뵙습니다!”

“데일 공자님! 흑백 회전의 무용담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 게올 가의 장남 베스! 꼭 공자님과 함께 전투에서 그 무용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치란 게 그렇지, 뭐.’

사람들이 앞다투어 데일의 명성을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데일이 적당하게 미소 지었다.

“모두들 참으로 믿음직하네요.”

열한 살 어린아이의 그것에 걸맞은 미소를.

“어머나, 데일 공자님!”

“사람들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멋지고 늠름하셔요!”

“이렇게나 어엿하고 멋진 사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어린 나이에도 참으로 늠름하고 남자다우셔요!”

거기에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필사적으로 아양을 떠는 귀족 가의 어린 영애들까지. 높게 봐야 열넷, 열다섯 살 정도일까.

“곧 전투가 벌어지는 마당에, 레이디께서 직접 행차하신 겁니까?”

데일이 물었고, 영애들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전투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남자들의 곁을 보필하는 것이 영애들의 의무니까요.”

지혜롭고 똑 부러지는 대답. 귀족 가의 여식들 역시 필사적으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려는 거겠지.

“그렇군요.”

데일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내심 씁쓸하게 미소 짓는다. 참으로 지치는 일이 따로 없다.

“데일 공자님.”

바로 그때였다.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기 여념이 없는 이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무게를 가진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나이에, 장성한 기사들의 그것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무위를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살짝 녹이 내려앉아 있는 흑색 갑주를 차려입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사내. 이제 스물을 겨우 넘겼을까. 아직 희미하게 애티가 남아 있어, 척 보기에도 귀족 가의 자제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요, 요네스! 네 이놈!”

동시에 남자 하나가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내의 아버지로 보이는 것 같은 귀족이다.

“고, 공자님에게 그게 무슨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냐!”

그러나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저었다. 데일의 손짓 하나에 사내의 아버지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케넷 남작 가의 차남, 요네스 경이라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데일의 물음에, 요네스 경이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의를 차린다. 장내의 소란이 잦아들고, 주위의 시선이 쏟아진다.

“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제국 제일의 천재…….”

요네스 경이 입을 열었다.

“작센 가의 어린 공자님께서는, 검과 마법에 있어 그 누구도 비할 바 없는 압도적 재능을 지니셨다 들었습니다.”

검과 마법.

“그 나이에 흑백 회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성 막달레나 기사들의 피로 혈해를 이루었다지요.”

“작센 가의 검들이 활약해준 결과이지요.”

“까마귀 떼가 일주일 밤낮을 쪼아도, 적들의 시체가 줄지 않을 풍경이라고 들었습니다.”

“달리 제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데일의 물음에 요네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공자님의 그 검으로, 제게 몇 수의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웅성웅성.

그 말에 사방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사실상 작센 가의 장남을 상대로 대결을 청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 어떤 의미에서는, 데일을 두고 떠들어대는 무용담의 실체를 까발리겠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대영주의 자제를 상대로 감히 일개 소영주의 자제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네 이놈!”

“감히 공자님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다!”

“공작 각하, 저 어린놈이 주제를 모르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군요!”

“당장 놈을 성 밖으로 끌어냅시다!”

사방에서 요네스 경을 향해 삿대질이 내리꽂혔고, 그 와중에도 요네스 경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오.’

데일이 짐짓 흥미롭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소요가 멎었다.

“케넷 가의 차남, 요네스 경. 듣자하니 일백의 용병대를 이끌고 있다고 했지요.”

“방랑 기사(Knight-errant)로 수행 길에 올라,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꾸린 용병대입니다.”

‘용병대라.’

남작 가의 차남. 장자 상속의 법칙에 따라 영지를 상속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도박에 가까운 수를 쓰며 자신을 증명하려는 거겠지.

뒷배조차 없이 방랑 기사로 일백 규모의 용병대를 꾸릴 정도니, 제법 솜씨가 나쁘지 않다.

‘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무엇보다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결정을 내린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결투 제의를 받아들이지요.”

* * *

아버지 작센 공작의 입회 아래, 즉석에서 데일과 요네스 경의 결투가 성립되었다.

바로 이곳,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에서.

작센 공작은 감정 없는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있는 영주들과 그의 자제들은 ‘자신과 아들의 지휘 아래’ 전투에 참전할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 앞에서 데일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은, 흑색공도 달리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확실하게 서열을 정리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

어디까지나 데일이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아버지로서의 확신이 있기에 가능했으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일의 나이가 지나치게 어린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북부 영주의 앞에서 확실하게 그 실체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검은 공자’의 잔혹함과 악명이 절대 허명이 아니란 사실을.

스릉.

데일의 상대, 요네스 경이 자신의 기사 검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제 검이 ‘보통의 검’과 다르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요.”

미풍조차 불지 않는 그곳에서, 자신의 흑색 서코트를 펄럭이며.

“공자님이 가진 ‘그림자의 검’에 대해서는 저 역시 들어보았습니다.”

그 형태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손을 대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는 어둠의 칼날. 엄밀히 말해 기사로서 사도(邪道)에 가까운 검이었으나, 애초에 마법사를 지향하는 데일이다.

“오러를 사용하십시오.”

“……!”

데일의 말에 요네스 경의 표정에 일순 동요가 어렸다. 결투에서 오러를 사용하는 일의 무게를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이것은 명령입니다.”

데일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결정을 내린 이상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다. 마치 그렇게 말하듯이.

“알겠습니다.”

요네스 경의 체내를 따라 오러의 기운이 주천(周天)하기 시작했다. 아직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경지의 기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갈무리가 무척이나 깔끔하다.’

냉정하게 그의 상태를 파악하며,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전력을 다해서 임하세요.”

동시에 발밑의 그림자가 실체를 갖고 솟아나며, 칼날 형태로 데일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저것이 검은 공자의 검…….’

그림자의 칼날.

그 기이하고 불길한 검들을 보며, 요네스 경이 숨을 삼켰다. 삼키고 나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케넷의 요네스.

열여섯 나이에 방랑 기사로 대륙을 돌며 그 무명을 떨쳤고, 밑바닥부터 시작해 일백의 용병대를 이끄는 대장이 되었다. 스물이 되었을 즈음에는, 정식으로 심법을 교육받지 못했는데도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결의를 마치고 요네스 경이 땅을 박찼다.

‘태어날 때부터 전부를 가진 애송이 따위에게 질 수는 없다.’

하급 귀족 가의 차남으로 태어나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검 하나에 의지하며 여기까지 올라섰다.

그에 비해 북부 제일의 대제후, 작센 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감히 ‘재능’을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그 사실이 너무나도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갖지 못한 자’도 ‘가진 자’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공평함 앞에서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카앙!

요네스 경의 검이 휘둘러졌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다. 그리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칠흑의 칼날을 튕겨낼 때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요네스 경의 가슴을 메우기 시작했다.

‘검은 공자’는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발밑의 그림자에서 생성되는 어둠의 칼날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검이 부딪치고, 물러나고, 쇄도하고, 다시 부딪치고, 비껴가고. 끝없이 검이 부딪쳤고, 그렇게 수십 합을 부딪치고 나서야 어렴풋이 이해했다.

“아, 아아…….”

처음부터 ‘검은 공자’에게 요네스 경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노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결투를 지켜보는 북부 영주와 그의 자제들이었다. 그들 모두의 앞에서 그의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 그 희생양으로 요네스 경을 지목한 것에 불과했다.

서열 정리의 희생양.

흡사 어린아이를 가지고 놀듯이 압도하며, 그 무위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 앞에서, 고작 11살 애송이가 여유를 부리고 있다고? 그야말로 공개 처형이나 다름없는 굴욕이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초조함 속에서 요네스 경의 검이 더더욱 필사적으로 휘둘러졌다. 전력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살검(殺劍)을.

카앙!

다시금 칼날이 부딪쳤다.

카앙! 카앙!

그것은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듯한 맥없는 소리였다. 너무나 크고 거대해서,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벽. 통곡의 벽이 그의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어느덧 싸움의 양상은 요네스의 일방적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검은 공자’가 가진 제국 제일의 재능이란, 그저 힘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거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알량한 이유 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저것은 부조리의 화신(化身)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불공평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은 압도적 재능.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이상 검을 맞대는 것은 무의미하다. 뼈가 시릴 정도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압도적이다 못해 절망에 가까운 격차를.

“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졌다.

“패배입니다.”

동시에 데일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그림자의 칼날이, 그대로 정지했다.

“제 승리네요.”

데일이 입을 열었다.

“겨우 이 정도입니까?”

데일의 물음 앞에서 요네스 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척이나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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