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 *
흑색공의 지하 공방.
데일의 손을 따라 밤까마귀 기사의 시체가 몸을 일으켰다. 그날의 전장에서, 데일을 위해 전사한 부하 기사의 시체를 향해.
죽어서도 작센 가를 위해 자신의 육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기사 서임을 받은 자.
비록 ‘오러 나이트’라고 칭할 정도의 경지는 아니다. 그러나 데일은 기사의 체내에 있는 오러의 응어리를 잡아내고, 거기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후우웅!
‘흑색의 마력과 오러’가 융합하며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그것이 곧 망자의 오러가 되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불사의 기사가, 자신의 기사 검을 따라 칠흑의 오러 블레이드를 휘감는다.
작센 가의 흑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데스나이트가, 주군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으며.
쿠웅!
그 모습을 보며 흑색공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임을 통제하고 있다.’
살아 있을 적의 몇 배에 해당하는 경지를 가진 오러 나이트이자, 일개 사령술사의 그것과 감히 그 급을 비교할 수 없는 불사의 기사.
어디까지나 데일에게 검의 소양, 기사로서의 경지와 이해도가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한 결과물.
검(劍)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사의 시체를 움직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점에 있어 데일이 거느린 데스나이트는 결코 일개 기사 따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데일이 가진 검의 경지와 이해를 오롯이 투영하고 있는 《검의 대행자》.
그 대행자의 칼끝에서 펼쳐질 검무를 헤아린다. 검과 담을 쌓고 지내는 흑색 마탑의 사령술사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리라. 아마 천하의 흑색공조차도.
“성공했어요, 아버지.”
데일의 말에, 작센 공작이 놀란 듯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비록 데일의 심장에 칠흑의 촉수를 뿌리내리고 있는 『검은 산양의 서』를 깨닫지는 못했으나, 그 힘을 통해 몇 배나 강해진 마력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으므로.
8서클의 마법사, 흑색공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흑색 마력.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농도의 마력이 정제되어 있구나.”
“최고의 스승에게 배우고 있으니까요.”
데일이 짐짓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이자, 흑색 마탑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에게.
“그러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데스 오더’의 기사들처럼…….”
술사의 마력 공급 없이 데스나이트를 지속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직 네가 배우기에는 때가 이르다.”
데일의 물음에 혹색공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가 가르쳐줄 것은 어디까지나 전장에서 사령술을 활용하는 법이다.”
데일이 죽음에서 되살린 ‘불사의 기사’를 바탕으로 흑색 마탑이 추구하는 전투 마법 교리에 대해서.
“다가올 전투를 대비해 수행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작센 공작이 손가락을 튕겼다.
데일이 거느린 데스나이트를 향해, 공방에 있는 몇 마리의 고블린 사체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콰직, 콰직!
흑색공의 마력을 통해 개조되고, 생전의 모습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망자병으로 거듭나 있다. 오로지 적을 도륙하기 위해 존재하는 전투 기계.
바로 그 망자병이, 데일의 데스나이트를 향해 일제히 땅을 박찼다.
사방에서 포위하듯 쇄도하는 고블린 망자병을 향해, 데스나이트가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고쳐 잡고, 검무(劍舞)를 추었다. 기사의 흑검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고, 망자병의 뼈 칼날을 나뭇가지처럼 부러뜨린다.
칼날의 그림자가 흩뿌려졌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그저 과장스러운 형식미가 아니라, 철저한 실용에서 비롯되는 절제의 미학. 철저하게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존재하는 살검.
“……!”
그 터무니없는 검술을 보고, 흑색공이 놀란 듯 그대로 숨을 삼켰다.
데스나이트라고 해서 다 같은 데스나이트가 아니다. 불사의 기사로 되살아났다고 해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 기사의 검술마저 생전의 경지와 비슷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뇌를 조작해서 생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고도의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에야…… 시체를 조종하는 것은 사령술사의 몫이고, 그들에게 검의 조예가 있을 턱이 없다.
그 까닭에 데스나이트의 검이란, 대개 투박하고 조잡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지금 데일이 투영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검술…… 살아있는 밤까마귀 기사의 검술마저 아득히 뛰어넘고 있는 경지다.
‘도대체 어떻게?’
평소 데일이 검의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흑색공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완성된 검식(劍式)을, 기사도 아니고 ‘일개 마법사’가 투영하고 있다고?
‘데일 공자님께서 가진 검의 재능이란, 감히 제가 경험한 그 무엇과도 비할 바가 없는 수준입니다.’
무심코 헬무트 블랙베어 경의 말이 떠올랐다. 데일의 재능. 그렇다. 결국 또다시 재능이다.
‘이 아이의 재능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이것을 정녕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일까?
검에서도, 마법에서도, 지혜와 지략에서도.
제국 제일의 천재, 공작 가의 신동.
그것이 흑색공의 아들이자 ‘검은 공자’였고, 작센의 데일이었다.
“……아버지?”
바로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색에서 벗어나 흑색공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거느린 데스나이트와 함께,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는 데일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의 아들이.
“역시 나의 아들이다.”
그렇기에 흑색공은 그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참으로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버지의 가르침 덕이에요.”
그저 아들의 모습에 조용히 미소 지었고, 데일이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아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의 자식이었으므로.
* * *
하루가 멀다고 일취월장하는 제자의 성장에, 그리고 제국 전체에 울려 퍼지는 제자의 위대한 업적을 듣고.
스승으로서 이 이상 기뻐할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데일을 바라보는 엘프 마법사 세피아의 심경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여느 때처럼 수 속성 마법을 가르치는 오늘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피아 선생님?”
조심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데일의 표정에, 세피아가 나직이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날, 데일이 탑의 시험을 치르고 함께 밤의 거리로 나왔을 때.
‘좋아해요, 선생님.’
자신을 향한 데일의 고백을 떠올린다. 직후 데일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가장했으나, 세피아는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보여준 ‘데일의 세계’가 품고 있는 시린 냉기와 형용할 수 없는 어둠, 그리고 욕망.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하게 애정을 갈구하는 사내의 욕망이었다.
뼈가 시릴 것 같은 고독 속에서, 여성의 애정 어린 손길을 갈구하는 애틋함.
데일의 감정을 깨달은 직후, 세피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동요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흡사 호숫가 위로 떨어진 조약돌처럼.
그저 11살 어린아이에 불과해야 할 자신의 제자가, 걱정스럽고 위태로워서.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가슴속이 뜨거웠다.
“…….”
생각 끝에, 세피아가 자신의 하얗고 가녀린 손을 뻗었다. 열한 살 어린아이의 앳된 뺨을 향해.
“서, 선생님?”
그녀의 손길에 데일이 당혹과 함께 얼굴을 붉혔고.
“……엘프의 삶은 길다.”
세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하고 상냥한 스승의 목소리로.
“훗날 네가 한 사람의 어엿한 사내가 되었을 때조차…….”
그러나 평소의 그녀라고 믿을 수 없는 고혹과 함께.
“나는 아마 지금 이대로의 모습일 테지.”
어째서 이 아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흑백 회전에서 ‘검은 공자’가 대승을 거두고 그의 적들을 모조리 몰살했다는 무용담을 들었을 때.
나아가 제국의 사람들이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이 가진 재능과 악명을 떠들어댈 때.
세피아는 결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사람의 역사는 곧 피와 전쟁의 역사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역사. 그 점에 있어서 데일의 재능은 감히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재능’이라 할 수 있으리라.
대학살의 신(神).
세피아는 그저 그 사실이 두려웠다. 이 아이가 그러한 살육의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훗날의 네가 너의 진정한 감정을 깨달을 때까지.”
엘프의 희고 가녀린 손을 뻗는다.
“나는 네 곁에 있을 것이다.”
데일의 뺨을 쓰다듬고, 나직이 미소 지었다.
“그때에는 스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여자로서.”
“……!”
세피아가 말했다. 그녀답지 않게 두 뺨을 수줍게 물들이고.
“그렇기에 너는 혼자가 아니다.”
마치 속마음을 고백하는 소녀처럼,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말도 아니리라.
세피아의 애정 어린 손길에, 데일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한 성숙한 여성의 모습. 비로소 엘프가 미의 종족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 까닭에.
그 직후 얼이 빠진 듯 침묵을 지키는 데일을 보고…….
“흐, 흠.”
세피아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을 했는지 실감하며, 애써 헛기침을 했다.
“그, 그럼 마저 수업을…….”
바로 그때였다.
“고마워요.”
침묵 끝에 데일이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 그대로 세피아의 품을 향해 파고들었다.
“……!”
그 대담한 행동에 세피아가 일순 숨을 삼켰으나, 이내 미소와 함께 데일을 받아들였다.
“저는 정말로 세피아 님을 좋아해요.”
데일이 말했다. 세피아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그러니까 기다려 주세요.”
“……그래.”
가슴속의 시린 냉기와 고독마저 잊게 할 따스함에 몸을 맡기며.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린 날의 약속이었다.
* * *
그날 밤.
데일의 침실.
세피아의 고백(?)은 데일로서도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날, 네크로폴리스에서 탑의 시험을 치를 당시. 고독의 지평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데일의 동요가…… 세피아에게 ‘데일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 행위가 마법사로서 두 사람의 세계에 공명을 일으켰고, 데일의 감정이 그대로 세피아에게 흘러 들어갔다.
데일의 세계, 시린 냉기와 어둠으로 얼룩져 있는 겨울밤의 풍경.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공유하는 수 속성이 그것을 가능케 했고, 데일의 세계에 휘몰아치는 ‘시린 냉기와 고독’이 세피아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제아무리 6서클의 엘프 마법사라도, 쉽게 평정을 지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있을 수 없는 미숙함이었고, 동시에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받았다는 따스함이 가슴을 메웠다.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며, 데일이 말없이 성의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심장을 중심으로 기동하고 있는 세 개의 서클, 나아가 서클과 심장 사이로 뿌리내리고 있는 칠흑의 촉수.
잃을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고,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망설여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설령 그 힘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라 할지라도.
* * *
그로부터 얼마 후.
마족 대이동에 맞서, 작센 공작에게 충성하는 북부 영주들이 공작령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대영주 작센 공작의 명령 아래 모여들기 시작하는 중소 영주들. 개중에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귀족과 그들의 아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작센 공작과 검은 공자를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야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