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마도서, 『대학살의 책』.
지금 데일이 있는 곳은 책 속의 세계였다. 책의 저자, 혈마법사 뒤샹의 부정한 사상과 악의를 투영하고 있는 심상 세계.
─ 나의 계약을 거부하고, 이곳의 고깃덩어리로 전락하겠는가?
마도서의 아바타, 처형집행자가 재차 말했다.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시체의 산과 피바다를 뒤로하고.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책 속의 세계. 다시 말해 이곳은 실제 세계가 아니다. 따라서 무력이나 공격 마법으로 눈앞의 처형집행자, 다시 말해 『대학살의 책』을 제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저, 발밑을 따라 시린 냉기와 정제된 어둠의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처럼 뒤섞여 휘몰아치는 냉기와 어둠의 마력에, 일대의 풍경이 다시금 뒤틀린다.
『대학살의 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혈법사 뒤샹의 심상 세계였고, 데일 역시 그에 맞서며 자신의 세계를 꺼내 들었다.
희끗희끗한 잿빛의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발밑을 따라,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지평이 펼쳐졌다.
“너의 세계는 나의 세계를 침범할 수 없다.”
『대학살의 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심상의 결계이자, 데일 자신마저 벗어날 수 없는 사상의 심연(深淵).
사상과 사상, 세계와 세계의 격돌.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고위 마법사들의 격돌 그 자체였다.
그리고 냉기와 어둠으로 이루어진 공백의 세계가, 일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시체들의 산과 피바다로 이루어져 있는 대학살의 세계를.
“그러나 내 세계는 그렇지 않지.”
세계가, 세계를 잡아먹고 있다.
─ 어떻게……!
마도서란 고도의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가, 일평생에 걸친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대학살의 책은 어떤 의미에서 ‘혈법사 뒤샹’ 그 자체이기도 했다.
6서클의 적마법사이자, 금지된 대량살상마법으로 무수한 희생자를 낳은 극악무도한 전범(戰犯). 그 같은 고위 마법사의 세계가, 고작 열한 살 어린아이의 세계에 잡아먹히고 있는 것이다.
─ 이대로 순순히 먹혀줄 것 같으냐!
마도서의 아바타, 혈법사 뒤샹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처형집행자가 땅을 박찼다. 데일이 두 발을 디디고 있는 공백의 세계를 향해서.
일대의 피바다가 커다란 파도를 이루며 휘몰아쳤다.
핏빛 쓰나미.
그에 맞서 데일이 걸치고 있는 ‘그림자 망토’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해일.
어디까지나 ‘책 속의 세계’이기에 펼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곳은 실제 세계가 아니며, 힘의 척도가 되는 것은 오직 사상의 강력함, 심상이 품고 있는 심연의 깊이니까.
끝없는 공백과 허무, 그리고 그림자의 군세를 거느린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훗날의 자신이 제국이란 나라에 덧씌우게 될 풍경을 등지고.
그것은 일개 6서클 사이코패스 마법사가 범접할 영역이 아니었다.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
쨍그랑!
유리 조각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일대의 풍경이 무너져 내린다.
‘돌아왔나?’
비로소 책 속의 세계에서 벗어나, 데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천지가 어둠으로 휩싸여 있는 그곳에서.
“──오빠야.”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기척조차 없이.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다. 칠흑의 드레스를 휘감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오빠가 나를 불렀구나?”
세상을 알지 못하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하고서,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산양의 뿔…… 두 개의 양각(羊角)이 우뚝 솟은 소녀가.
* * *
그 시각, 사도궁의 일실.
니콜라이 추기경은 속이 타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작센 가의 장남이 제국 제일의 재능을 가진 천재라 할지라도, 고작 11살 어린아이다. 그것도 3서클 익스퍼트의 수준에 불과한 어린 마법사. 제아무리 ‘검은 공자’라 해도 지옥의 도서관에서 살아 돌아올 확률은 0%에 가깝다.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교회는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
그것이 기아스(맹약의 구속)를 통해 맺어진 거래였고, 당초 니콜라이는 데일이 살아 돌아올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울러 계약의 증거가 남아 있는 이상, 작센 가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검은 공자’가, 정말 아무 대책도 없이 지옥의 도서관에 들어갔을까?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라 일컬어지는 흑색 마탑주, 흑색공의 아들이?
혹시라도 작센 가의 장남이 그의 말처럼 『검은 산양의 서』를 손에 넣게 될 경우. 그 행위가 가져올 후폭풍을, 니콜라이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니콜라이의 머릿속을 스치는 무엇이 있었다.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교회는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
맹약의 구속을 통해 두 사람이 맺은 계약의 조항. 다시 말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니콜라이의 책임이 아니란 뜻이다.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둘 필요가 있겠지.”
6서클의 백마법사이자, 지혜의 빛을 추구하는 백색 마탑 장로의 손으로 직접. 결심을 내린 니콜라이 추기경이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 * *
“있지, 오빠야. 여기는 너무 심심해.”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말했다.
“그리고 너무 외로워.”
가녀린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데일에게 매달리듯이.
“여기는 너무 외롭고, 춥고, 쓸쓸한 곳이야.”
“…….”
그러나 데일은 그녀가 보여주는 천진한 모습에 휘둘리지 않았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의 무게를, 그 무엇보다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까닭에.
『검은 산양의 서』.
불사공 프레데릭이 죽음 너머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자신의 어린 딸을 제물로 바쳐 집필한 마도서. 마도서의 아바타가 어린 소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그러나 저 소녀는 결코 불사공의 어린 딸이 아니다.
“나와 계약을 맺자.”
데일이 말했다.
“천 마리 새끼를 거느린 숲의 검은 산양이여.”
검은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를 향해서.
“오빠야도 나랑 같이 놀고 싶구나?”
소녀가 천진하게 미소 짓는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에게 오빠의 세계를 보여줘.”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발밑의 풍경이 빠르게 뒤틀린다. 잿빛의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공백의 지평이 펼쳐진다. 냉기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사상의 심연이.
소녀는 봄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시린 대지 위를 사뿐사뿐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방에서 흩날리는 진눈깨비가 그녀의 어깨를 따라 내려앉았다.
“여기가 오빠의 세계구나.”
한참을 뛰놀고 나서, 소녀가 비로소 등을 돌린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아름다운 세계야.”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치맛자락 밑으로, 무수한 ‘촉수 다발’을 꿈틀거리며.
“나, 오빠가 아주 마음에 들어.”
무척이나 어둡고 차가우며, 비틀린 미소였다.
* * *
“아, 아아아.”
입막음을 위해 백색 마탑의 장로, 6서클의 백마법사 니콜라이가 지옥에 들어섰을 때.
부정한 사념과 사악한 사상으로 뒤틀린 그 지옥에서, 니콜라이 추기경과 그가 거느린 교회 기사들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작센 가의 장남, 검은 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를 자신의 곁에 두고.
어떻게 그 존재를 형용할 수 있을까.
꿈틀거리는 촉수들의 군체, 촉수를 따라 흉측하게 돋아나 있는 이빨, 증식하는 살덩어리. 이계의 흉물.
혐오스러운 것(Abomination)이 그곳에 있었다.
보는 것으로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존재가.
* * *
“있지, 오빠야.”
산양의 뿔을 가진 소녀가 데일의 곁에 있었다.
칠흑의 드레스를 입고, 귀족 가의 금지옥엽처럼 자란 티 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소녀’가.
“저것들은 뭐야?”
치맛자락 밑으로 무수한 촉수 다발을 꿈틀거리며.
“기다려.”
데일이 조용히 손을 뻗어 소녀를 제지했다.
“니콜라이 추기경 예하.”
제지하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흡사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을 보듯 겁에 질려 있는 추기경 일행을 향해.
“어찌하여 이곳까지 걸음을 하셨습니까?”
“나, 나는 그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니콜라이에게 데일이 입을 열었다.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계약의 당사자들은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니콜라이의 속셈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듯이.
기아스(맹약의 구속)를 통해 두 사람 사이에 맺은 거래의 내용. 니콜라이가 노린 것은 바로 그 기아스의 맹점이다. 아무리 데일이라 해도, 지금 수준으로 백색 마탑의 장로와 그가 거느린 기사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는 없을 테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지요.”
가령 보병들 사이의 싸움에서 높은 구릉지를 차지하고 있는 쪽이 유리하듯, 지형이 주는 이점은 마법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은 온갖 부정한 사상과 사악한 사념들이 고일대로 고여 현실마저 침범한 하나의 지옥이다. 빛이 없는 세계. 어둠의 힘을 업으로 삼는 데일에게 그야말로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이자, 빛의 힘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이다.
“장소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데일이 아니었다.
일찍이 작센 가의 시조가 창조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마도서.
어떻게 『검은 산양의 서』를 열한 살의 어린아이가 통제할 수 있는지 따위는, 적어도 저들에게 있어서 지금 당장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리라.
“오, 오해일세! 나는 그저, 어디까지나 자네를 걱정해서…….”
니콜라이 추기경이 당혹 속에서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있지, 오빠야.”
소녀가 입을 열었다. 흑색의 치맛자락 밑으로 무수한 촉수 다발을 꿈틀거리며.
“──먹어도 돼?”
“배탈 나도 책임 못 진다.”
데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이 추기경의 의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응, 좋아.”
소녀가 미소 지었고, 그녀의 발밑이 검게 물들었다. 마법이란 사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며, 마도서란 그 같은 ‘마법사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책을 뜻한다.
작센 가의 시조, 불사공 프레데릭의 세계가 깃들어 있는 금기의 마도서.
“……불쌍히 여기소서(Eleison).”
그와 동시에 백색 마탑의 장로 ‘니콜라이 추기경’이 성호를 내리긋는다.
그것은 결코 체념의 행위가 아니었다.
6서클의 백마법사라는 칭호는 허울밖에 없는 이름이 아니다. 아울러 이 세상에, 마도서를 가진 마법사가 데일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복음의 서』.
니콜라이 추기경과 휘하의 교회 기사들을 중심으로 빛이 퍼져 나갔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Miserere nobis).”
니콜라이의 울림에 따라, 그를 지키는 교회 기사들의 의식이 고취되기 시작했다.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자매신의 자비와 자애가 함께하기를.”
그저 정신의 고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검이, 갑주가, 찬란한 빛과 함께 별개의 존재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어느덧 그곳에 있는 것은 일개 교회 기사들이 아니었다. 여섯 장의 날개와 불타는 검을 가진 ‘전장의 천사’였다.
백색 마탑이 자랑하는 찬가(讚歌)의 마법. 데일의 어둠에 맞서, 빛과 성스러운 울림으로 가득 찬 아리아.
니콜라이 역시 성직자이기 이전에 마도의 길을 갈고닦는 자다. 6서클 백마법사, 니콜라이 추기경이 노래하는 ‘천상의 찬가’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빛(지혜)을 추구하는 백색 마탑의 장로로서 펼치는 전력.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생각했다.
빛과 어둠. 사상과 사상, 세계와 세계의 격돌.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고위 마법사들의 전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