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 *
사람들이 작센 공작 가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공포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흑색공 체제의 흑색 마탑이 예전 같지 않은 유화책을 펼치고 있다 해도, 그들 일족이 쌓아 올린 구시대의 어둠이란 하루아침에 사라질 정도로 얕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검은 산양의 서』는 바로 그들 일족의 어둠을 상징하는 사악의 결정체였다.
‘지옥의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은 오직 공자님 하나여야 합니다.’
사도궁의 지하 통로. 니콜라이 추기경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데일이 걸음을 옮겼다. 짙은 어둠이 깔린 층계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아울러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교회는 일절 책임지지 않을 것이며…….’
갖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의 마도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데일과 작센 공작 가는 ‘교회의 치부’에 대해서 영속의 침묵을 맹세한다.
상기의 내용이 바로 백색 마탑이 자랑하는 계약 마법…… 「기아스(Geas)」를 통해 맺어진 거래였다.
신명의 맹세. 계약의 두 당사자, 데일과 니콜라이의 심장을 담보로 맺어진 맹약의 구속.
기아스가 작용하는 이상, 기밀의 유지와 신뢰는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계약을 깨는 행위를 당사자가 자각하는 즉시, 기아스의 저주가 발동해 심장을 터뜨릴 테니까.
‘어차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봐야 별 가치도 없는 정보였고.’
이제 와서 용사밖에 알지 못하는 진실을 퍼뜨리고, 고위 추기경 몇 명을 파멸시켜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기아스를 통해 그들과 운명 공동체로 맺어지는 이상, 교회는 작센 가의 우군(友軍)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교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곧 여신의 마음을 얻는 것과 같다.
데일이 시스티나 교황령에서 손에 넣은 것은, 그야말로 일석이조란 말도 부족한 수확이었다.
어디까지나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으나.
주홍빛 램프의 어스름이 일렁이는 지하 통로의 끝자락. 지옥의 입구. 불길한 글귀가 새겨진 석조 관문이 데일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그 글귀를 읽은 순간.
「키이이이익!」
일말의 미풍조차 불지 않는 그곳에서, 흑색의 서코트로 의태하고 있는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가 날뛰기 시작했다. 발밑의 음영을 따라 광희하고 있는 그림자들을 억누르며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의 공명이다.
고개를 들고 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지옥의 문 너머로.
* * *
아무 이유 없이 그곳을 일컬어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의 이름을 빌린 하나의 거대한 던전.
그리고 그곳에 유폐된 금서들은, 결코 사상이 불순하다는 등의 시시껄렁한 이유로 지정된 책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을 오로지 악의의 형태로 발휘하고 있는 ‘금서지정 마도서’들. 소유자의 정신을 파멸시키고, 재앙을 불러오는 통제 불능의 보구.
그러나 이름 높은 기사에게 명검이 함께하듯, 마법사에게 있어 마도서는 기사의 검과 같은 존재다.
훌륭한 검을 손에 넣고자 하는 기사의 욕망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무수한 이들의 피로 점철된 악귀의 혈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마법사 역시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도서를 향하는 그들의 열망은 감히 기사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법사의 검…….’
가령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이 보유하고 있는 『심장의 저울』이라거나, 핏빛공이 자랑하는 『피의 책』 같은 것들.
질식할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데일이 팔을 뻗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검’이 되어줄 하나의 마도서를 찾아.
“……!”
바로 그때였다. 데일의 발밑을 따라 칠흑의 칼날이 솟아, 주위를 빙글빙글 공전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척을 감지하고.
“그어어어…….”
그 정체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옥의 도서관을 수호하는 존재. 죽어서도 자기 의지로 교회를 지키는 검이 되기를 맹세한 꼭두각시.
미라 기사(Mummy Knight)다.
백마법사들의 신성으로 벼린 백색 갑주와 검으로 무장하고, 포르말린에 절이듯 철저한 사후 방부 작업을 통해 시체 특유의 추악함은 찾아볼 수 없다.
백마법사, 사제들의 신성과 축복으로 되살린 백색 망자.
그러나 죽어서도 죽지 못해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란 점에서, 도대체 저 존재가 흑색 마탑이 자랑하는 ‘데스나이트’와 무엇이 그리도 다를까.
‘그야말로…….’
고대에 생과 사의 이치를 탐구하는 ‘흑백 마탑’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과 사를 대하는 두 개의 시각이, 두 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커다란 전투가 치러졌다.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흑백 대전(Great Battle of Black-and-White)이라 이름 붙여진 전투.
그리고 패배한 흑색파(The Blacks)는 그들의 수장 ‘불사공 프레데릭’과 함께, 북부의 벽지로 유배되었다.
패배의 대가로 그가 가진 『검은 산양의 서』를 교회와 백색 마탑에 압수당하고, 북부의 마왕령에 맞서 후손 대대로 제국과 대륙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를 맹세함으로써.
그를 초대 흑색 마탑주, 작센의 프레데릭이라 일컬었다.
그것이 바로 작센 가와 흑색 마탑의 시초였고, 나아가 데일의 대까지 전해지는 뿌리 깊은 어둠의 실체다.
지혜의 빛을 추구하는 백색 마탑에서 벗어나, 어둠 속의 진리를 추구하는 흑색 마탑──.
‘무엇 하나 다르지 않다.’
그 말대로였다.
미라 기사와의 대치는 길지 않았다.
타앗!
미라 기사가 땅을 박찼다. 손에 들린 신성의 검이 휘둘러졌다.
흑색 마탑이 가진 어둠의 마력이 아니라, 백마법사들이 자랑하는 빛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백색 망자.
데일이 가진 수(水)와 암(暗)의 마력을 감지하고, 배제해야 할 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교회는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졸지에 비명횡사를 해도, 그것은 오직 데일의 잘못이란 소리다.
백색 마탑의 「기아스」란 것은 21세기 보험 계약서와도 같아서, 그 조항에는 늘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그들 뜻대로 돌아가게 놔둘 수는 없지.’
카앙!
어느덧 데일의 발밑에서 칠흑의 칼날이 솟았다. 휘둘러지는 미라 기사의 검을 막고, 그대로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다. 몇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 보통 사람이 당혹과 공포를 감추지 못하는 그곳에서, 데일은 결코 겁내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방감에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일개 3서클 마법사일 필요도 없고, 제국 제일의 천재나 공작 가의 신동 따위로 자신을 포장할 필요도 없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는 것.
미친 듯이 펄럭이는 ‘그림자 망토’를 뒤로하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섀도우 불릿(Shadow Bullet).”
일찍이 보여준 냉기의 결정이 아니다.
그림자 망토,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의 악의로 이루어져 있는 총알.
그것도 결코 일발(一發)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부끼는 망토 자락을 따라 그림자 칼날을 총알의 형태로 정교하게 세공하고,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흡사 중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그림자로 이루어진 총알 세례가 내리꽂혔다.
사제의 신성 마법으로 벼린 갑주가 엉망으로 짓이겨지고, 벌집이 되어 부서졌다. 포르말린으로 말린 것 같은 창백한 육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흑색의 총알이 미라 기사의 체내로 파고들어, 벌레처럼 육체 내부를 좀먹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어둠의 총알’이 되어서.
지금까지의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찬 마법이다.
힘없이 쓰러진 미라 기사를 뒤로하고, 데일이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야말로 미궁을 방불케 하는 이 지옥에서,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 * *
소위 ‘위험한 사상’을 가진 책이라고 해서, 그것이 직접 사람을 해하거나 잡아먹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도서(Grimoire)’는 다르다.
마법이란 사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고, 책에 저자의 사상이 깃들듯이 마도서란 결국 마법사의 사상이 깃들어 있는 책이니까.
‘금서지정 마도서’란, 그 마도서 중에서도 ‘극히 악의적이고 위험한 사상’으로 가득 찬 책들을 일컫는다.
이곳을 지옥의 도서관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강력한 악의와 부정한 사상들로 뒤틀린 이계(異界).
‘이런 곳에서 제대로 길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냉기의 마력을 응집시켜 얼음의 칼날을 결정화하고, 그대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긋는다.
뚝.
상처를 따라 핏방울이 떨어졌다.
“나, 작센의 데일.”
작센 가의 어둠을 계승하고 있는 혈족의 피가.
“불사공의 피를 계승하는 일족의 정당한 후예가 이곳에서 고하노니.”
뚝, 뚝.
“……천 마리 새끼를 거느린 숲의 검은 산양이여.”
뚝, 뚝, 뚝.
“그대와 어둠의 일족이 맺은 계약을 이행하고, 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을 명하노라.”
그리고 데일의 발밑을 따라 피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할 무렵.
「피, 피다!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피야!」
「싱싱한 마법사의 피!」
「우리와 계약을 바라고 있어!」
「아이야, 이리 오렴! 내가 힘을 줄게!」
사방에서, 흡사 환청과 같은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현실과 사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이곳에서, 마도서들의 사념이 데일의 유혹에 이끌린 것이다. 흡사 물속에서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 떼처럼.
바로 그때였다.
「비켜! 저 아이는 내 계약자야!」
책들의 속삭임이 멈추고, 비로소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강력한 악의가 엄습했다.
「느낄 수 있어, 저 증오와 살의를! 살육의 냄새야!」
그리고 주위의 풍경이 일전했다.
마도서에 깃들어 있는 ‘사상의 세계’가 데일의 앞에 펼쳐진 것이다.
책 속의 세계.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 잘린 팔과 다리, 흩뿌려진 내장.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학살의 풍경. 그리고 시체들의 더미 속에서, 마도서의 아바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 내가 너의 적들을 모조리 도륙해주마.
핏빛의 참수용 도끼를 들고 있는 처형집행자다.
─ 너를 가로막는 자들의 시체와 피바다로 축제를 벌일 것이다.
이 풍경으로 미루어 유추할 수 있는 마도서는 오직 하나였다.
‘『대학살의 책(The Book of Massacre)』.’
악명 높은 혈법사 뒤샹, 그의 심상 세계와 위험한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피의 마도서. 대량살상의 정수가 담겨 있는 극악무도한 혈마법의 비의. 그 위력이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가져갈 수 있는 마도서는 오직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리고 마도서 『대학살의 책』을 향해 대답했다.
“물러나라.”
─ 감히 나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데일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고, 대학살의 책…… 마도서의 아바타가 핏빛 도끼를 위협적으로 과시했다. 데일의 거절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으므로.
─ 그러고도 네놈이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처형집행자의 핏빛 도끼가 시린 서슬을 내뿜는다.
“못 나갈 것도 없지.”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끝없이 펼쳐진 학살의 풍경을 뒤로하고, 시린 냉기와 정제된 어둠의 마력을 융합했다.
마도서 『대학살의 책』이 품고 있는 핏빛의 세계. 그러나 데일에게는 일말의 감흥조차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참으로 시시한 세계였다.
그날,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기억 앞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