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모두 죽여버려!”
감히 작센 가의 장남을 두 차례나 벗겨 먹으려 한 그 시점에서, 애초에 살아남을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다행히 양측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벌어져 있다. 게다가 이쪽은 경사진 구릉지 위를 장악했으며,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고 수적으로도 우세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하들이 사방에서 포위진을 펼치고 있지 않나.
어떻게 해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를 찾으며, 퍼커 남작이 소리를 높였다.
‘몇 명, 고작 몇 명이다.’
아무리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상대의 무장 상태는 손에 들린 칼 한 자루가 전부다. 갑주나 방패도 없고, 기병 돌격이 가능한 전투마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 비해 이쪽은 완전 무장을 갖춘 기사와 궁수들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해볼 수 있는 싸움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이길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퍼커 남작이 소리를 높였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긍정의 힘을 발휘하며.
“궁수들, 조준!”
구릉 위에서, 남작의 부하들이 일제히 화살 시위를 당겼다.
“어리석은 것들.”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의 곁을 지키는 기사 하나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바스커빌의 베일 경(Sir Veil of Baskerville).
그날 전투에서 검은 공자를 보좌하며, 최전선에서 퍼커 남작의 좌측 날개를 꺾어버린 고위 기사. 작센의 어린 장남에게 충성을 맹세한 검은 사냥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데일 공자님.”
베일 경의 요청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그들에게 한 차례의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겨누어진 화살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이상의 자비는 의미가 없겠지요.”
일말의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모두 죽이세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데일의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화살 세례가 쏘아졌고, 그곳에 있는 다섯 명의 ‘오러 나이트’들이 주군의 명령을 받들며 고개를 숙였다.
후우웅!
숙이고 나서, 검풍(劍風)이 휘몰아쳤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가로막는 칼날의 방패였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검풍 앞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리고 한 차례의 사격이 끝나는 동시에, 어느덧 밤까마귀 기사들이 땅을 박차고 있었다.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도적 떼를 향해 사방으로 흩어져 쇄도한다.
소드 마스터가 펼치는 일기당천의 무용담은 이 세계에서조차 허황한 ‘기사 문학’에 가깝다. 그러나 실력 있는 기사 하나가 수십 명의 병사를 도륙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풍경이 아니었다.
칠흑의 검이 휘둘러졌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악, 내 팔! 내 팔!”
“제, 제발, 제발 살려 주십…… 아아악!”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잘린 목 위로 피 분수가 솟구친다. 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팔과 다리가 잘리고, 찢어진 복부의 틈새로 내장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고, 공자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퍼커 남작이 소리쳤다.
“이,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가 가진 전부를 내드리겠습니다! 평생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애걸하듯이.
“부디 저에게 자매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매신의 자비. 데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여전히 사방에서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자가 있고, 공포를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자도 있었다.
그들을 등지고 ‘검은 공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 * *
그로부터 며칠 후.
퍼커 남작령을 벗어나, 제국 중부에 해당하는 ‘다음 영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멈추어라, 이놈들!”
여행자로 위장한 데일과 그의 기사들 앞에, 또 하나의 도적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누가 허락도 없이 그란델 남작님의 영지를 통과하려는 것이냐!”
자신의 영지를 거점으로 오가는 이들을 약탈하는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다. 도적질도 결국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 이런 염병할.’
의기양양하게 이쪽을 위협하고 있는 도적들을 보며, 데일이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체를 감추고 있는 이상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정체를 드러내는 이상 살려둘 수도 없다. 그렇기에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데일이 물었다.
“그냥 얌전히 비켜 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하하, 네놈이 제법 웃기는 농담을 할 줄도 아는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장!”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중장갑으로 무장한 강도 귀족, 그란델 남작이 부하들과 웃음을 터뜨린다. 데일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웃었다. 주군의 명령을 기다리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작센 가의 검들을 뒤로하고.
사이좋게 웃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웃겨?”
* * *
대륙 중부를 지나, 다시 북해(北海)로 수렴하는 강의 지류를 더듬어 몇 주.
그사이 몇 명의 강도 귀족과 도적 기사들의 영지를 지나치며, 그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 후 제국 자유도시 앰버를 경유해, 그곳에서 ‘호박의 길’이라 불리는 뱃길을 타고 대륙을 가로질렀다.
여신의 땅, 시스티나 교황령을 향해서.
힘과 지위를 가진 귀족의 자제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겸허하게 두 발로 걷는 것. 그것이 바로 순례를 통해 ‘검은 공자’가 교회에 보여주고자 하는 예의이자, 작센 가의 검들이 여신의 기사들을 도륙한 그날의 속죄였다.
그리고 이쪽에서 성의를 보여주는 이상, 교회 역시 데일의 성의에 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 * *
시스티나 교황령, 성좌도시 퓌셀.
성 막달레나 광장 앞, 사도궁(Palazzo Apostolico)의 일실.
“니콜라이 추기경 예하.”
여신교의 정점에 서 있는 열두 성직자 중 하나, 6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백마법사.
두 발로 여신의 땅을 찾은 ‘검은 공자’의 격에 어울리는 상대. 그것이 바로 백색 마탑의 장로이자 주교급 추기경, 니콜라이 마키아였다.
“그날의 전투에서 참으로 많은 피가 흘렀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공자님.”
작센의 데일. 백색 마탑과 씻을 수 없는 앙금을 가진 흑색 마탑의 탑주, 흑색공의 아들이자 후계자.
제국 제일의 천재로 이름 높은 ‘검은 공자’의 명성에 대해서는, 니콜라이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 이름이 갖는 잔혹함과 악명의 계기에 대해서도.
“성 막달레나의 형제들은 신앙의 모범이었고, 그들의 희생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소식이었지요.”
“저의 지나친 유능함 덕에, 필요 이상의 희생을 초래하고 말았지요.”
‘너무 잘 죽여서 탈이었지.’
“…….”
하나부터 열까지 교회와 최악의 상성을 가진 상대다.
“흑백 회전의 결과는 저 역시 무척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바로 그 상대가, 자신의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신교의 불모지라 일컬어지는 북부 출신에, 그것도 제국에서 손에 꼽는 지위를 가진 대제후의 자제가.
‘정말로 속죄 하나를 위해 이 같은 고행을 감내한 것일까.’
니콜라이가 되물었다.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을 가졌다 해도 결국 11살 애송이다. 죽고 죽이는 전장의 참혹함이, 모종의 죄의식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귀족 가의 어린 자제들이 전투의 트라우마를 감당하지 못하고, 여신의 품을 도피처로 삼는 것처럼.
‘그럼 차라리 잘 됐다.’
죄의식, 다시 말해 신을 향한 부채(負債) 의식은 종교의 강력한 힘이다.
“저 역시 어린 공자님의 잔혹함이 무척 염려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니콜라이 추기경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여신의 자비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답니다, 어린 공자님.”
“…….”
“이 세상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은 없는 법이니까요.”
씻을 수 있다. 용서받을 수 있다. 그렇게 니콜라이 추기경이 달콤한 속삭임을 거듭하려 할 때였다.
“이 세상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은 없다고 했나요?”
“암, 그렇고말고요.”
니콜라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신의 나라를 제국에 팔아넘기셨습니까?”
나라를 팔아넘겼다. 일순, 니콜라이 추기경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제국의 합병 조약을 거부한 전대 교황이 암살당할 당시…….”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 고작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진실을.
“추기경 예하 역시 그 자리에 있었지요.”
제국과 교국, 두 나라 사이의 강제 합병 조약이 맺어지기 직전. 백색 마탑주이자 교국의 왕, 전대 교황은 마지막까지 저항 의사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제국의 사냥개, 이계의 용사에게 제거되었다.
니콜라이를 비롯한 주교급 추기경 열두 명의 배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나라를 팔아먹은 추기경 예하의 죄악을, 여신께서는 용서해주셨습니까?”
“어, 어떻게 그날의 일을…….”
상황을 헤아린 6서클의 백마법사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순백의 마력을 내뿜었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빛의 마력 앞에서 데일의 표정은 무척 덤덤했다.
작센 가의 기사들이 당장 곁에 없다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공작 각하의 일개 대리자를 죽여봐야, 의미 있는 입막음이 될 것 같으십니까?”
거짓말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작센 공작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니콜라이 추기경이 그러한 진실을 알 방법 따위는 없으리라.
그 증거로, 휘몰아치는 빛의 마력이 몇 차례의 공회전 끝에 덧없이 사라진다.
‘저것이 정녕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고?’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검은 공자의 위명이란, 자신의 상상을 아득하게 압도하는 것이었다.
제국 제일의 천재라거나, 공작 가의 신동 같은 수식어조차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딱히 교회의 치부를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니콜라이 추기경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고, 데일이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작센 공작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로서.
“오히려 그날의 진실에 침묵을 맹세하고자 이 자리를 찾았지요.”
자신의 행위를 배후에 있는 흑색공의 의지로 포장하며.
“저희 작센 가가 바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침묵의 대가입니다.”
침묵의 대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사도궁의 지하 밑바닥에, 교회의 금서들을 유폐하고 있는 비밀 서고가 있다지요.”
“……!”
이어지는 데일의 말에, 니콜라이 추기경의 표정이 다시금 경악으로 물들었다.
교회 내에서도 극히 소수밖에 허락되지 않는 금기의 장소.
“서, 설마……!”
“제가 ‘지옥의 도서관’을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지옥의 도서관. 그것은 사도궁의 지하 최하층, 교회가 압수한 ‘금서지정 마도서’를 봉류하고 있는 서고의 별칭이었다.
『검은 산양의 서(The Book of Black Goat)』.
일찍이 작센 가의 선조가 집필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마도서가 잠들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