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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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공과 성검사. 일개 남작들의 이름을 빌려 치러진 두 대제후의 대리전.
‘흑백 회전(Battle of Black-and-white)’이라 불린 그날의 전투는, 발 없는 말을 타고 천 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부풀려진 그 이야기는, 데일조차 의도치 못한 훌륭한 프로파간다가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전장의 최전선에서 적의 기사들을 도륙하며, 하늘이 내린 지략으로 포위진을 펼쳐 보란 듯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고……. 승리 끝에,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적들에게는 일말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는다.
까마귀 떼가 일주일 밤낮을 쪼아도 줄어들지 않는 시체들의 산, 홍수처럼 범람하는 피바다.
그것이 바로 제국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검은 공자(Black Prince)’의 위대한 승리와 잔혹함이었다.
진실과 거짓이 입맛대로 뒤섞여 과대 포장된 무용담.
흑색공의 아들, 검은 공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됐군.’
그것은 데일의 아버지가 지금 같은 공포의 대상이 된 이유하고도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과장되는 법이다.
적어도 무능한 지휘관 덕에 부대 전체가 몰살하고 말았다는 시시한 진실보다야, 투항한 적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흑색공의 아들이란 쪽이, 조금 더 그럴싸한 이야기처럼 여겨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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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을 맞아 네게 줄 선물이 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작센 공작의 집무실.
가까워진 데일의 생일을 앞두고 아버지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얼마 후 생일을 축하하는 공식 석상에서, 너를 작센 공작령의 자작(Viscount)으로 임명할 것이다.”
“……!”
참으로 금수저다운 생일 선물이었다.
“이후 너는 ‘작센 공작이 위임한 대리자’로서 내 곁을 보좌하고, 공작령의 대소사를 다스릴 것이며.”
자작은 엄밀히 말해 백작이나 남작 같은 ‘진짜 귀족’이 아니다. 독자적으로 자기 영지를 소유하지 않고, 주군의 임명을 받아 그의 영지에서 대리자의 자격을 행사하는 명예 귀족의 개념에 가까우므로.
“필요에 따라 너는 ‘공작 대리’로서 작센 가의 기사들을 소집할 수 있고, 그들에게 군사적 복무를 포함한 의무의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작도 결국 자작 나름이다.
일개 백작의 대리자가 되는 것과, 작센 공작 같은 대제후의 대리자가 되는 것. 그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에 가까운 차이였으니까.
하물며 데일은 이곳 공작령을 물려받게 될 후계자다. 그렇기에 흑색공이 데일에게 약속한 것은, 어중이떠중이 영지나 작위 몇 개를 합쳐도 비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데일이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작센 가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동등한 한 사람의 가주로서 존중하겠다는 흑색공의 약속.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신 이상…….”
그렇기에 그 약속을 바탕으로 데일이 입을 열었다.
“다소 갑작스럽겠으나, 공작 각하의 대리자로서 수행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 * *
얼마 후.
데일은 11살 생일을 맞이했고, 아버지 흑색공의 이름으로 작센 공작을 보좌하는 자작의 작위에 봉해졌다.
그즈음, 작센 가의 검은 공자가 여신의 땅으로 ‘순례’를 준비하고 있다는 서신이 교회에 전해졌다.
* * *
“시스티나 교황령으로 순례를 떠나겠다고?”
그날, 뜻밖의 말에 흑색공은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렇습니다.”
시스티나 교황령. 과거에는 ‘교국(敎國)’이란 이름으로 신앙의 기둥을 자처한 여신교의 본산이자, 신의 시녀를 자처하는 백색 마탑이 자리 잡은 곳.
“사람들이 말하길, 그날 전투에서 검은 공자는 한 명의 포로도 용납하지 않는 잔혹함을 보였다더군요.”
데일이 말을 이었다.
“여신교의 신앙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제 잔혹함의 희생양이 되었고, 교회가 달갑게 여길 일은 아니지요.”
성검사와 성 막달레나 기사단이, 그 이름처럼 여신교의 기수(旗手)를 자처하는 것은 유명하다.
그리고 그 신앙의 기수들이 시체의 산과 피바다를 이루며 몰살당했고, 그날의 결과가 바로 호사가들이 떠들어대는 검은 공자의 잔학무도한 악명이다.
흑백 회전의 결과는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처참한 대패였다. 데일의 말처럼 교회로서 결코 달갑게 받아들일 사실은 아니리라.
“공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자산이다.”
그럼에도 작센 공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자신의 악명을 부정하고 교회의 비위를 맞출 셈이냐?”
“그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세력이지요.”
데일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 가의 장남이자 ‘공작 대리’가 신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두 발로 순례를 떠나는 이상…….”
끄덕이고 나서 말을 잇는다.
“교회 역시 응당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줄 겁니다.”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
흑색공의 물음에 데일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겸사겸사 그곳에서 손에 넣고자 하는 몇 부의 ‘금서지정 마도서’들과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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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흑백 회전이 펼쳐진 그린벨트 남작령과 퍼커 남작령의 경계.
비로소 제국의 북부라 불리는 지역이 끝나고, 작센 공작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중부 지대가 시작되는 곳.
그날의 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경험한 것은 백작 가의 기사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부지리로 귀족 작위를 손에 넣은 도적 기사, 퍼커 남작 역시 예외일 수 없었으므로.
용병 시절부터 함께한 믿음직한 부하 대다수를 잃고, 남작 자신마저 작센 가에 막대한 몸값을 내고 풀려나야 했다. 성에는 술과 여자의 씨가 말랐고, 초토화된 영지에서는 이 이상 짜낼 고혈조차 남지 않았다.
그 까닭에, 알거지 신세가 된 퍼커 남작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도적질.
소싯적부터 도적 기사로 이름 날린 악당답게, 영지를 오가는 이들을 털어먹는 것은 퍼커 남작령의 유서 깊은 산업이다.
──그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침 일군의 여행자들이 겁도 없이 남작령에 들어섰고, 먹잇감을 발견한 남작의 부하가 소리를 높였다.
“쏴라!”
화살 몇 발이 허공을 가르며 침묵을 깨트린다. 기습에 적합한 구릉지 위에서, 여행자들이 지나고 있는 도로의 앞뒤에서, 사방 도처에서.
히이잉!
갑작스러운 기습에, 여행자들의 말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감히 허락도 없이 퍼커 남작님의 영지를 지나치려는 것이냐!”
퍼커 남작의 도적 떼가 일대를 포위하기 무섭게, 로브를 둘러쓴 여행자 하나가 대표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척이나 어리고 앳된 목소리였다.
“귀족의 영지를 지나기 위해 통행세를 지불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더냐!”
“……알겠습니다.”
그러나 도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쩔그렁.
동전이 묵직하게 차 있는 주머니를 품속에서 꺼내며.
“마침 통행세를 내기 위해 소정의 금액을 준비했습니다.”
“그래, 보아하니 네놈이 뭘 좀 아는 모양이군.”
남작의 부하가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다가섰다. 그대로 여행자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낚아채 내용물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액수가 크다.
“좋다, 네놈들의 성의를 보아 특별히 넘어가 주도록 하마!”
짐짓 커다란 호의를 베푸는 듯 도적 하나가 소리치자, 나머지 도적들 역시 순순히 물러났다.
서로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비릿한 미소와 낄낄거림을 감추지 않고.
몇 시간 뒤.
저물녘 어스름이 서산으로 깔릴 즈음, 여행자들이 고개 하나를 다 넘기도 전의 일이었다.
예의 도적 떼가 재차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부풀어서.
“멈추어라!”
도적들의 우두머리, 퍼커 남작이 직접 그의 몇 없는 기사들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다.
“퍼커 남작님의 행차시다!”
“남작님 앞에서 예의를 차려라!”
“감히 통행세도 내지 않고 이 몸의 영지를 지나려는 것이냐!”
하나같이 빛바래고 녹슬어, 밤까마귀 기사들의 그것에 비해 싸구려란 말도 아까운 무장 상태다. 그러나 일개 여행자 무리를 상대하는 데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는 장비였다.
“통행세라니요.”
예의 여행자가 퍼커 남작에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조금 전 남작님의 아랫사람에게 그 값을 치렀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덤덤하게.
“제국법에 따라, 하나의 영지에서 두 차례 이상의 통행세를 걷는 것은 위법이 아닙니까.”
“값을 치렀다니, 네놈이 백주대낮부터 당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남작의 부하가 킬킬거리며 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이제 막 마주친 사이가 아니더냐!”
“그럼, 우리는 누구보다 제국의 법을 준수하는 자들이니까 말이지!”
불과 몇 시간 전에 마주친 일 따위는 기억에도 없다는 듯. 도적 떼가 다시금 조롱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세계는 사방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고, 법치(法治)란 말은 그리 듬직하게 들리는 울림이 아니다.
법은 멀고 칼은 가깝다. 여기는 그런 세계니까.
“여기 계신 남작님이 누구신지는 아느냐?”
“그 악명 높은 ‘검은 공자’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혈투를 펼친……!”
“암, 그렇다마다! 그 유명한 흑백 회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신 역전의 용사, 퍼커 남작님이시다!”
“목숨이 아깝거든 순순히 가진 것을 내놓거라!”
그러나.
‘……어?’
부하들이 멋대로 떠들어대는 허세를 뒤로하고, 퍼커 남작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숨을 삼켰다.
‘서, 설마.’
검은 공자, 그날의 전장, 낯익은 아이의 목소리. 설마 싶었다.
“역전의 용사라.”
앳된 목소리의 여행자가 말을 이었다. 깊이 눌러쓰고 있는 자신의 후드를 걷어 올리며.
“내가 기억하는 내용이랑은 제법 차이가 있는데.”
그곳에 있는 열한 살 소년의 앳된 얼굴에, 퍼커 남작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린다.
“아, 아아아…….”
어느덧 나머지 여행자들이 말에서 내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공자님.”
밤까마귀 기사를 상징하는 칠흑빛 오러 블레이드를, 저마다의 검신에 휘감으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 전장의 좌익에서 퍼커 남작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바로 그 오러 블레이드다.
자기 몸 하나를 지키는 데 급급한 일개 여행자의 검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작센 가의 흑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