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32화 (32/301)

32화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패배해 있었다.

적어도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에게 있어 그 문장은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합류할 즈음에는 이미 우익 기병대가 분쇄됐고, 밀바스 경과 오러 나이트들 전부가 전사했다. 퍼커 남작의 좌익은 진작에 돌파된 지 오래였으며, 양익을 꺾은 적 기병대는 손쉬운 우회 기동 끝에 본대 전체를 포위했다.

사방에서 자신들을 둘러싼 흑색의 기병대가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그에 비해 핵심 전력을 상실하고, 사기마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결말은 볼 필요도 없었다. 창날이 다가올 때마다 병사들이 찔려 죽고, 뒤엉키고, 뒷걸음질 치다 압사하고, 피와 내장이 흩뿌려진다. 어디에도 죽음이 있었다.

“아, 아아…….”

가장 현명한 사람들조차 우둔해지는 곳이 전장이다. 하물며 평소에도 우둔한 자가 전장에서 보여주게 될 모습은 오죽할까.

심장을 옥죄는 듯한 패배의 공포, 사람들의 손가락질, 자신을 향하게 될 아버지의 차가운 시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내려다보던 데일의 그 눈빛과 싸늘한 조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필립 공자님! 부디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초조함 속에서, 필립이 입술을 악물었다.

“……쇄다.”

결정을 내린 필립이 중얼거렸다.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옥쇄(玉碎)다!”

“예……?”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벅거리는 기사를 뒤로하고.

“우리 자랑스러운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검은, 부서질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필립이 절대로 굽힐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전원 옥쇄, 총옥쇄다! 남아 있는 기병들을 끌어모아 전열을 재정비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최후의 돌격을 준비하라!”

“하, 하오나 공자님! 그랬다가는 저희 모두가 전멸을…….”

“감히 최고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려는 것이냐!”

돌격, 돌격, 돌격이다. 필립이 앵무새처럼 외쳤다.

옥쇄.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 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는다. 참으로 듣기에 아름다운 말이었다.

* * *

최후의 전력을 끌어모아 필립 휘하의 성 막달레나 기사단이 돌격을 감행했고, 생각보다 손쉽게 포위망이 돌파되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그러나 목숨을 건 돌파가 성공으로 돌아가고, 죽음을 각오한 결의가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

“차징!”

기다렸다는 듯, 작센 가의 ‘오러 나이트’들이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찌감치 후위로 물러나 체력을 비축하고, 갑주를 교체하고, 지친 말 대신 새 전투마로 갈아타고서.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짓밟아라!”

그린벨트 남작의 오합지졸 기사로 위장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검은 기병대를 상징하는 칠흑의 갑주. 전차처럼 돌격하는 전장의 파괴자. 오러 나이트의 손에 들린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대검’을 위압적으로 과시하며, 흑색의 기병대가 질주했다.

2미터가 조금 못 되는 길이의 양손검 츠바이헨더(Zweihänder). 그리고 그 커다란 검을 칠흑의 오러가 물샐 틈 없이 휘감는다.

“작센 가와 데일 공자님을 위하여!”

후웅!

작센의 흑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그 앞을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목이 잘리고 육체가 뭉개지며, 갑주가 짓이겨지고 박살 났다.

“아, 아아…….”

적의 포위망을 뚫고 활로를 열었다는 희망도 잠시였다. 옥쇄를 각오한 성 막달레나 기사단이, 말 그대로 분쇄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완벽한 일망타진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돌파가 성공한 게 아니다. 일부러 활로를 열어준 것이다. 두더지 게임에서 패배한 두더지의 신세처럼.

한 줌의 희망이 덧없이 사그라졌다.

“피, 필립 공자님. 부디 지금이라도 항복하시는 게…….”

두려움 탓일까, 바로 직전까지 어중간하게 품었던 희망이 배신당한 탓일까.

“지휘관이 죽지 않는 이상 패배한 게 아니다!”

부하의 애걸에 가까운 요청에, 필립이 호통을 쳤다.

“놈들을 막아! 놈들을 막고 나를 지켜라!”

“하오나 공자님……!”

“시끄럽다! 병졸들의 목숨 따위는 알 바 아니야!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휘관을 지켜! 이 몸을 지키란 말이다!”

죽음마저 불사하겠다는 지휘관의 결의에서, 그렇게 한 사람이 제외되었다.

* * *

동녘 하늘에서 새벽 어스름이 떠오를 즈음 시작된 전투는, 서녘 하늘 너머로 저물녘 어스름이 내려앉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지평을 따라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공자님의 계획대로입니다!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역시 데일 공자님이십니다!”

“이 바스커빌의 베일, 데일 공자님의 전략안에 감히 경외를 금치 못할 지경입니다!”

“…….”

아울러 승리의 기쁨과 충성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밤까마귀 기사들 사이에서, 도주 끝에 추하게 생포된 적장이 그곳에 무릎 꿇고 있었다.

등 뒤로 펼쳐진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시산혈해를 뒤로하고, 자신 같은 둔재는 백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조차 없는 괴물의 앞에서.

“어지간히 항복하는 게 싫으신 모양이네요.”

데일이 백작 가의 장남, 필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작센 가의 밤까마귀 문장이 그려진 배너 아래, 칠흑의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을 거느린 채로.

“네놈이 비열한 잔꾀나 비겁한 책략으로 승리를 거둘 수는 있어도…….”

필립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부러질지언정 패배하지 않았다!”

그 말에 데일이 흘끗 등 뒤를 바라보았다. 지평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가 보였다.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았다는, 긍지 높은 옥쇄의 결과물이었다.

“자기 하나 살겠다고 도망친 사람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말을 하네요.”

“나, 나는 이 전투의 지휘관으로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할 의무가 있다!”

“아, 그러십니까.”

데일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그럼 전투가 끝났으니, 이제 살아 있을 필요도 없겠군요.”

스윽.

허리춤의 칼자루 위로 비스듬히 손을 얹으며.

바로 그때였다.

“좋다!”

데일의 동작을 보고, 필립이 일순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기꺼이 그대의 ‘결투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

뜻밖의 말에 데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은, 작센의 데일이 ‘전장의 명운을 걸고 요청한 일대일 결투’를 흔쾌히 수락하마!”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억지와도 같은 주장.

스릉!

필립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대담하게 허리춤의 기사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작센 가의 기사들이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지하려는 찰나.

“좋아요.”

데일이 팔을 뻗어 기사들을 제지하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를 받아들이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필립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소와 함께 그대로 땅을 박차고 질주했다.

데일이 소드 벨트의 칼자루를 미처 뽑기도 전에, 참으로 비열하기 그지없는 쇄도였다.

푸욱!

칼날이 휘둘러졌고, 무척이나 현실감 없는 소리가 났다.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아아아악! 사, 살려줘! 아니,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곧 죽어도 옥(玉)은 못 되시겠네.”

시곗바늘의 초침 몇 개가 채 움직이기도 전의 일이었다.

* * *

“데일 공자님의 행차다!”

“공자님께서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셨어!”

일찌감치 전령이 승전보를 전한 탓에, 게다가 공교롭게도 데일의 열한 살 생일이 가까워진 까닭에.

작센시 일대는 한창 커다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흑색공과 성검사. 일개 남작들의 이름을 빌린 두 대제후 사이의 대리전.

그린벨트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작센 가와 밤까마귀 기사단의 압도적 대승이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승리를 손에 넣은 개선장군(凱旋將軍)이 되어, 데일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작센 가가 자랑하는 밤까마귀 기사단의 끝없는 행렬을 거느리고, 백작 가의 장남 필립을 비롯한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몇 없는 포로들과 함께.

“성 막달레나 기사단을 상대로 궁극의 포위섬멸진을 성공시켰대!”

“까마귀 떼가 일주일 밤낮을 쪼아도 좀처럼 적들의 시체가 줄지 않는다지!”

자신의 활약을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낯뜨거운 찬사를 뒤로하고.

* * *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

맞춤 제작한 흑색 갑주와 서코트를 걸친 데일이, 회당의 대리석 위를 가로질렀다.

“오빠야!”

“리제.”

이제야 겨우 말을 트기 시작한 두 살배기 여동생, 리제가 천진하게 오빠의 이름을 불렀다.

“데일.”

회당의 옥좌에 앉은 두 공작 부부가, 아들의 위풍당당한 개선 앞에서 미소 지었다.

“첫 전투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데일 공자님!”

“고마워요, 헬무트 경.”

헬무트 경, 그리고 샬롯과 엘프 마법사 세피아까지. 익숙한 얼굴을 뒤로하고 회당을 가로질렀다.

“작센의 데일, 이곳에서 공작 각하에게 정식으로 승전의 보고를 올립니다.”

흑색공의 옥좌 앞에서, 데일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작센 공작은 아버지로서의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 지었다.

“아주 훌륭하게 승리를 이끌었더구나.”

“작센 가의 검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습니다.”

“베일 경, 데일을 잘 이끌어주어 고맙소.”

“전적으로 공자님의 활약이었습니다!”

작센 공작의 치하에, 데일의 곁을 보좌한 부관 기사 베일 경이 고개를 숙였다.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느라 피로하겠지.”

뒤이어, 어머니 엘레나가 아들의 걱정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우선 푹 쉬도록 하려무나.”

“고맙습니다, 어머니.”

데일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나서,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작센 공작성. 몇 달에 걸친 전투가 끝이 났고, 비로소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듯한 실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집, 자신의 가족.

무척이나 이상한 감정이었다.

* * *

“미, 밀바스 경과 오러 나이트를 비롯한 성 막달레나 기사단 전원이 전사하고…….”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필립 공자님께서는 소수의 종자와 함께 포로로 사로잡혀, 거, 거액의 몸값을…….”

“그 빌어먹을 작센 가의 애송이가……!”

전령이 갖고 온 절망에 가까운 패전보를 듣기 무섭게, 성검의 칼날을 따라 순백의 오러가 휘감겼다. 당장에라도 이 증오를 폭발시킬 애꿎은 희생양을 갈구하듯이.

천사의 깃털처럼 찬란한 오러 앞에서, 전령의 표정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 * *

“나의 죽음을 기억하나?”

남자가 물었다. 칼날이 등 뒤에서 가슴팍을 찢고 튀어나온 시체였다.

“우리의 죽음을 기억한다.”

흑색 갑주와 서코트를 걸친 열 살의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죽은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까지 남자의 몸에 꽂혀 있던 칼날은, 어느새 데일의 가슴을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 * *

마법사는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고, 마법사의 수행이란 바로 그 세계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 * *

그날 밤.

첫 전투를 무사히 승리로 이끌고, 공작성의 침실에서 눈을 감았을 때, 데일을 찾아온 것은 알기 쉬운 악몽이 아니었다.

사상의 심연(深淵).

“…….”

그날, 3서클을 이루기 위해 억지로 열어젖힌 심상의 가장 어두운 풍경. 도망칠 수 없는 진정한 자신의 세계.

침대 위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그대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시린 냉기와 정제된 어둠의 마력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모방하며 뒤엉켰다.

‘……정작 실전에서 써먹지를 못했네.’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을 뒤로하고, 힘껏 주먹을 쥐었다.

쨍그랑!

흡사 유리잔을 떨어뜨린 것처럼 냉기와 어둠의 파편이 흩날렸다.

자신의 심상 세계를 통제하고 갈고닦는 수행은 마법사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런데 바로 그 ‘세계’에 잠자리를 방해받고, 시도 때도 없이 고독에 옆구리가 시린 꼴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추태다.

‘아직 부족하다.’

자신의 세계를 보다 완전하게 통제할 힘이. 마법사로서 자신의 경지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줄 힘이.

어디서?

당장 떠오르는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름 높은 기사에게 이름 높은 검이 함께하듯이, 뛰어난 마법사의 곁에 함께하는 것.

‘마도서(Grimoire)…….’

생각하고 나서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무심코 세피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느 때처럼 자신을 믿어주는 수정색 눈동자의 엘프가, 그녀의 상냥한 미소가.

떠올리고 나서, 자신에게 되묻는다.

‘……11살 먹고 나서는 나도 좀 더 남자처럼 보이겠지?’

참으로 11살 남자애다운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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