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 *
처음부터 협상을 할 의도 따위는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백작 가의 장남, 필립을 노린 함정이었다.
백작 가와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내부 사정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지휘 체계를 교란하기 위한 노림수.
“부탁드립니다, 필립 공자님! 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돌아가주십시오!”
“개가 주인에게 목줄을 채우고 있는 꼴이네요.”
부관 기사 밀바스 경의 애걸에 가까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작센의 데일이 차가운 조소를 내뱉었다.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베일 경.”
“말씀하십시오, 데일 공자님!”
조소를 내뱉고 나서, 데일이 자신의 곁을 지키는 부관 기사에게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세요.”
보란 듯이 자신의 지위와 신뢰를 과시하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데일이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부관 기사 베일 경이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완벽한 상명하복(上命下服).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사람들을 저 뒤로 물리고 나서, 데일이 물었다.
“어디까지나 이 전투를 책임져야 할 ‘최고 지휘관끼리’ 말이죠.”
그것이 달리 누구라고 지칭하는 일 없이,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좋다!”
“피, 필립 공자님!”
그 말에 필립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며 소리를 높였다. 마치 데일이 말하는 최고 지휘관 두 명 중 하나가 자신이란 것처럼.
──성검사가 비공식적으로 부관 기사 밀바스 경에게 이 전투를 일임했다고 해도, 그 진실을 아는 것은 성 막달레나 기사단 내에서도 극히 일부의 고위 간부들에 한정되어있다.
대외적으로 자신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성검사의 아들, 호색한 필립이다. 설령 그가 이 전투의 들러리이자 얼굴마담이며,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정도로 필립의 ‘프라이드’는 낮지 않았다.
“당장 물러나라, 밀바스 경!”
“하, 하오나 필립 공자님……!”
“최고 지휘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필립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작센 가의 꼬맹이를 상대하는 것은 내 몫이다!”
어쨌거나 백작 가의 망나니 필립은 ‘공식적으로’ 이 전투의 최고 지휘관이다. 그리고 그 최고 지휘관이 모두의 앞에서 억지를 부리는 이상, 밀바스 경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로서는 이 이상 고집을 부려도 역효과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속이 타는 것 같은 초조함을 뒤로하고, 밀바스 경이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마지못해서.
“말했듯이, 저는 어디까지나 협상을 위해 이 자리를 요청한 겁니다.”
이윽고 협상 테이블에 남겨진 두 사람 중의 하나, 작센의 데일이 입을 열었다.
“흥, 달리 이 몸을 설득할 조건이라도 있느냐?”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이 물었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그렇습니다.”
“어디 말해봐라.”
“성 막달레나 기사단이 이 전투에서 손을 떼고 부대를 물릴 경우.”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백작령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일체의 군량을, 저희 공작 가에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뭐……?”
까놓고 말해서 밥이나 먹고 떨어지란 소리다. 그 어처구니없는 내용에 필립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깟 조건을 감히 ‘협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데일은 무척이나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까의 조롱이 공자님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점은 사과드립니다.”
방금까지의 잔혹한 악의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러나 부디 부대를 물리고 돌아가 주십시오.”
부대를 물리고 돌아가라. 그것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승복하고 돌아가란 소리나 다름없는 말이다.
“적어도 부대 전체가 대파되고, 백작 가가 자랑하는 수백 명의 기사가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혀서.”
그럼에도 이어지는 데일의 경고는 결코 조롱이나 허세가 아니었다.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덤덤히 전달하는 것 같은 목소리.
“필립 공자님이 가진 ‘꼭두각시로서의 가치’마저 사라지게 될, 최악의 결말보다는.”
그렇기에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저의 협상에 응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깨끗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패배일 겁니다.”
열 살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보내는 동정 어린 눈빛이. 자신을 일방적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태도가.
“……하, 밀바스 경의 말이 옳았구나!”
백작 가의 장남 필립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수치였다.
“처음부터 네놈의 머릿속에는 이 몸을 조롱하고 욕보일 생각밖에 없었군!”
벌떡 자리를 박차며 필립이 몸을 일으켰다.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이.
“유감스럽네요.”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차갑게 웃었다. 바로 직전까지의 진심 어린 충고를 뒤로하고.
“이게 당신을 위한 마지막 기회였는데.”
“뭐라고……?”
마지막 기회.
“두렵지 않습니까?”
데일이 말을 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쓰는 것은 ‘지휘관 밀바스 경’이 아니라…….”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로.
“무능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백작 가의 장남이 될 텐데요.”
‘열 살 핏덩어리보다도 못한 버러지 같은 놈.’
데일의 말에 필립은 일순, 자신을 향하는 아버지의 싸늘한 냉소를 떠올렸다. 흡사 구제 불능의 폐기물을 보는 것 같은 그 차가운 눈빛을.
그에 비해,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을 두고서 내린 아버지의 평가를 떠올렸다.
‘네놈 따위의 둔재(鈍才)가 백 년이 지나도 발끝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이다.’
“……웃기지 마라.”
생각 끝에 필립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패배의 중압감을 애써 뒤로하고.
“네놈 같은 애송이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대체 자신과 이 빌어먹을 꼬맹이의 무엇이 그리도 다르다는 걸까.
“이 내가,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증명해 보일 것이다!”
브란덴부르크의 필립이 작센 가의 어린 장남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 전투를 지휘하고 데일을 꺾는 것은 어디까지나 밀바스 경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이 될 테니까.
제국 제일의 천재, 공작 가의 신동을 쓰러뜨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군공(軍功)을 세워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나아가 제국 모두에게 증명할 것이다.
“그것참, 기대되는 말이네요.”
그리고 결의를 다지는 필립을 향해, 데일이 생긋 미소 지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 *
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그로부터 얼마 후.
그린벨트 남작령.
“성 막달레나 기사단과 퍼커 남작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내의 일실, 커다란 목각 테이블 위로 참모 하나가 몇 개의 체스 기물을 움직였다.
“오백 명의 기사와 전마 삼천 필을 먹이고 있으니, 슬슬 보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겠지요.”
그리고 그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감행하는 장거리 원정에서, 풍족한 보급을 기대하기란 어불성설이다.
“상대가 초조함을 느끼고 움직임을 취할 때까지 수비 태세를 굳힐까요?”
참모의 물음에 최고 지휘관…… 데일이 고개를 젓는다.
“적이 전력을 다해 움직이는 이상.”
젓고 나서, 데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역시,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요.”
* * *
상대 영지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이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작센 공작 가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필립이 퍼커 남작의 창부들과 함께 술독에 빠져 있는 사이, 퍼커 남작성의 일실.
“우리 측의 보급 상황을 이용해서 장기전을 유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린벨트 남작령은 수성(守城)에 적합한 영지가 아닙니다. 작센 가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요.”
“흠…….”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뒤로하고 ‘밀바스 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날, 협상 테이블에서 차갑게 미소 짓는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을 떠올리며.
고작 열 살 어린아이라고 얕볼 상대가 아니다.
‘절대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을 상대로 방심하지 마라.’
성검사의 경고처럼, 작센의 데일은 필립 같은 머저리가 백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이 훗날 장성했을 때 제국에 가져올 위협을 떠올렸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직후이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머저리 같은 필립의 프라이드를 찢어발기며, 제 입맛대로 요리하는 그 모습. 악의의 심연(深淵)과도 같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조소를.
아이의 잔혹한 순수함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 영역조차 아니다. 그 아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괴물이자 ‘악의 씨앗’이다.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어둠의 일족, 흑색공의 핏줄이 아니던가.
“……여기까지 와서 승부를 거절할 수도 없겠지.”
아니, 오히려 이것은 기회다.
작센 가와 작센 가의 장남은, 장차 그의 주군과 제국 전체를 위협할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고 악의 씨앗이 그 재능을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훗날 제국의 적이 될 거악(巨惡)이, 아직 ‘열 살의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내가 그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설령 그 행위가 가져올 정치적 후폭풍을 고려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주군과 조국을 위해 내린 밀바스 경의 결정이었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데일을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부대의 편제가 끝나는 대로, 전군의 출정을 준비할 것이다.”
결의를 다진 고위 기사(High Knight) 밀바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필립과 창부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 * *
흑색공, 성검사, 핏빛공…… 그리고 이계의 용사.
아무리 이 세계가 검과 마법의 세계라 할지라도, 정말로 순수한 의미에서 ‘개인의 힘’으로 전황을 뒤집을 정도의 강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이 세계의 전략 병기라 일컬어지는 마법사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마법사가 참여할 정도의 대규모 전투에서는 서로의 광역 마법을 요격하기 위한 ‘고고도 마법 방어체계(MDS)’가 작동하며, 마법사의 가치란 결국 제병협동 전술의 일부로 기능할 때 그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하물며 마법사가 참여하지 않는 ‘정정당당한 전투’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렇기에 설령 데일이 위와 같은 경지의 압도적 무력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제국과 맞서기 위해서는 결국 군세를 움직이는 일이 필수 불가결하다.
“데일 공자님, 적의 주력 부대가 북진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을 마친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적의 동향을 살피고 있던 척후 부대가 돌아와 보고를 올린다.
“잘 해주었습니다.”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 가를 상징하는 밤까마귀 문장이 새겨진 커다란 배너(Banner) 아래에서, 물샐 틈 없이 말 갑주를 둘러쓴 전투마에 올라타, 맞춤 제작한 갑주와 흑색의 서코트를 걸치고.
“작센 가의 검들이여, 때가 되었습니다.”
전장의 파괴자라 일컬어지는 검은 기병대…… 오백 명의 밤까마귀 기사들을 거느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