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 * *
그 시각, 퍼커 남작의 영주성.
밤이 깊도록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참모들이 작전을 논의하는 사이.
“부어라, 마셔라!”
“꺄하핫!”
회당에서는 고함과 웃음소리, 지독한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헐벗은 창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양을 떨었고, 그 속에서 ‘호색한 필립’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네놈이 제법 이 몸을 즐겁게 해줄 줄 아는구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필립 공자님!”
퍼커 남작이 필립을 위해 여흥을 준비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술과 여자. 굳이 필립이 행차하지 않더라도 퍼커 남작성에는 여느 때처럼 넘쳐나는 것들이다.
“작센 가의 꼬맹이 따위는 나와 내 기사들이 아주 박살을 내줄 것이다!”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필립이 허세에 찬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이 전투의 얼굴마담이자, 일개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애써 망각하며.
“어머나! 정말 늠름하셔요, 공자님!”
“참으로 믿음직해요!”
“암, 내가 누구더냐!”
창부들이 교성 어린 소리와 함께 필립의 흥을 부추겼고, 취기에 이끌린 필립이 더더욱 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 제국의 전쟁영웅,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대백의 하나밖에 없는 장남이 아니더냐!”
“게다가 상대는 결국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열 살짜리 애송이가 아닙니까!”
“어머나, 아직 엄마 젖이라도 빨고 있을 나이 아니에요?”
“시작하기 전부터 승리한 싸움이나 다름없네요!”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부를 떠는 퍼커 남작의 말이, 창부들의 아양이, 필립에게는 흔들림 없는 확신처럼 느껴졌다.
“암, 그렇고말고.”
──작센 가의 어린 장남은, 네놈 따위의 둔재가 백 년이 지나도 발끝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이다.
‘백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아무리 공작 가의 신동이 어쩌고 호들갑을 떨어도, 결국 열 살 핏덩어리다.’
아버지는 작센 가의 장남을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겁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기회다. 아버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 제국 전체가 그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노래하겠지.
그 빌어먹을 공작 가의 꼬맹이를 두고 떠들어대는 것처럼!
필립이 다시금 술잔을 들이켰다.
작센의 데일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제국 호사가들의 입에서 울려 퍼지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장남 필립에게 있어, 이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증명할 기회’였다.
* * *
기사가 상대 진영에 승리의 깃발을 꽂는 기수이자 전쟁의 꽃이라고 가정할 경우.
마법사는 전황의 판세를 뒤바꾸는 전술 병기의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영지전이란 결코 상대 세력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는 총력전이 아니다.
대륙을 통일한 직후, 황제는 제국 의회에서 새로운 제국 헌법 ‘황금문서(Goldene Bulle)’를 발포했다.
그중에는 ‘하급 영주들 사이의 다툼’에 4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활약할 수 없으며, 나아가 그에 해당하는 대량살상마법(Magics of Mass Destruction)을 영창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전투가 어디까지나 ‘일개 남작들 사이의 다툼’으로 성립하고 있는 이상, 작센 가가 자랑하는 어둠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무수한 규칙과 제약 아래 치러지는 제한전.
4서클 이상의 마법사 전력이 참전할 수 없는, 순수하게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정정당당한 승부.
그것이 성검사의 노림수였고, 동시에 데일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 * *
그날 새벽. 영주성의 일실.
──3서클의 마법사 데일이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3서클.
비록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라고 하나, 아직 ‘전장에서의 한 사람 몫’을 다하기에는 부족한 경지.
그러나 데일의 진짜 무서움이란, 고작 남들이 깔아준 레일 위를 달리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시린 냉기와 정제된 어둠의 마력이, 두 가닥의 사슬 구조로 엉키고 결합했다.
‘됐다.’
수 · 암의 두 가지 속성을 결합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한 데일의 자신 작품.
유전자의 이중나선형 구조.
이 세계에서 마법이란 사상의 투영이고, 바로 그 사상의 뿌리에 따라 다섯 가지의 색과 의미가 존재했다.
시스티나 여신교를 보좌하며 ‘신의 시녀’를 자처하는 빛(지혜)의 백색 마탑.
죽음 너머의 진리를 추구하는 어둠(진리)의 흑색 마탑.
제국의 시대정신의 집행자가 되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불꽃(힘)의 적색 마탑.
적탑의 폭정 속에서 기이할 정도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물(조화)의 청색 마탑.
문명 세계와의 접촉을 거부하고, 대수림(大樹林)에서 야생의 삶과 원시적 전통을 중시하는 자연(생명)의 녹색 마탑.
비록 흑색공과 세피아에 의해 흑색과 청색의 마법을 배우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 데일이 가진 ‘사상의 뿌리’는 위의 다섯 마탑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몇 발자국을 떨어져서 냉정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전생의 세계──이계의 사상과 지식 체계 위에서 쌓아 올린 마법.
유일의 마법사.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레일 위에서, 이 길의 끝자락에 있을 풍경을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을 홀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과 함께.
* * *
동틀 녘 어스름이 미처 떠오르기도 전의 새벽 아침.
“허억, 헉!”
“부탁드립니다! 제발 이 이상은……!”
그린벨트 남작성 앞의 공터에서 다 죽어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벌써 엎어져서 어쩌자는 것인가.”
“일어서라, 나약한 놈!”
“그러고도 감히 북부의 기사란 이름을 자청하는 것이냐!”
여느 때처럼 새벽 일찍부터 수행에 매진하는 작센 가의 기사 오백 명에 더해, 바로 그들의 지도를 받아 죽도록 구르고 있는 그린벨트 남작 가의 오합지졸 기사들까지.
‘시간이 촉박한데 할일들은 태산 같군.’
게다가 해가 뜨고 나서는 영지 내의 징집병들에게 군사 교육을 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데일이 씁쓸하게 혀를 찼다.
비록 ‘성 막달레나 기사단’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강행군을 마친 직후라 해도…… 장거리 원정의 열악한 보급 상황을 고려할 때, 최소한의 여독이 풀리는 즉시 공세를 걸어오겠지.
‘길어야 몇 주다.’
게다가 퍼커 남작의 병력 역시 우습게 볼 상황이 아니었다.
퍼커 남작의 기병 전력은, 그가 도적 기사 시절부터 이끌며 함께한 잔뼈 굵은 전사들이다. 퍼커 남작령 전체가 하나의 도적 무리란 사실을 생각할 때, 적어도 군기 하나는 비할 바가 아니리라.
‘머저리보다는 차라리 악당이 낫지.’
다시금 혀를 차며,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곁을 보좌하는 밤까마귀 기사단의 부관이자 고위 기사를 향해서.
“베일 경.”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그린벨트 남작 가의 기사들에게 따로 지시하고 싶은 훈련이 있습니다.”
그 후 하나부터 열까지 훈련의 상세를 설명하고 나서, 데일이 말을 이었다.
“아울러 퍼커 남작령에 사람을 보내, 협상을 제의하고 싶다는 내용을 전해주세요.”
“협상을……?”
뜻밖의 말에 베일 경이 일순 눈을 끔벅거렸다.
“딱히 굴욕적인 화평을 감수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데일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조금 봐두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요.”
고개를 젓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십수 년 전, 자신이 아직 작센의 데일이란 이름을 갖기도 전에.
학대에 가까운 아버지의 욕심과 집착이 망가뜨린, 어느 불쌍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 * *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을 망가뜨리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으리라.
그 점에 있어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그야말로 최고의 모범이었다.
‘우생(優生)의 욕망에 미친 검사.’
──회상 끝에,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퍼커 남작령에 전령을 보내고 나서, 그로부터 얼마 후. 데일의 요청에 따라 협상의 장이 준비되었다.
두 남작령의 경계, 저마다 중무장을 마친 양측의 기사들이 늘어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퍼커 남작 측의 대표자로 나선 것은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장남’과 그를 보좌하는 고위 기사가 하나.
그것은 그린벨트 남작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투가 어디까지나 흑색공과 성검사, 두 대제후의 대리전이라는 명백한 증거.
‘그럼 그렇지.’
그리고 테이블에 앉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데일의 예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백작 가의 장남은 어디까지나 명분을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전투를 총괄하는 것은 저기 있는 고위 기사겠지.
‘…….’
서코트 위로 차고 있는 황금빛 견장이 바로 그 증거다. 성 막달레나 기사단 고위 간부의 표식.
“브란덴부르크의 필립 공자님.”
이내 시선을 돌린 데일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여기까지 와서 협상이라니!”
시종 신중한 표정으로 데일의 의도를 살피는 곁의 기사와 달리, 백작 가의 장남 필립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감추지 않는다.
“보아하니 ‘진짜 전쟁’을 앞두고 바지에 오줌이라도 지린 모양이지, 꼬마야?”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짤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째서 저의 협상에 응하셨습니까?”
침묵 끝에 데일이 물었다.
“하! 그거야…….”
그리고 그 물음에 필립이 무어라 떠벌리려는 찰나였다.
“당신에게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데일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는 이 전투의 들러리로 내세운 꼭두각시가 아니라, 진짜 ‘지휘관’에게 묻는 겁니다.”
차가운 조소와 함께.
“뭐, 뭐라고……?”
──들러리, 그리고 진짜 지휘관.
데일의 말에 필립의 얼굴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습니까?”
굴욕에 일그러진 필립을 뒤로하고,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성검사께서…….”
필립이 아니라, 그의 곁을 보좌하는 부관을 향해서.
“일말의 재능도 없는 둔재에게, 이처럼 중대한 전투의 중책을 맡길 리 없지요.”
순백의 갑주로 무장하고 핏빛의 서코트를 걸친 고위 기사.
“……!”
그제야 비로소 협상의 의도를 간파한 부관 ‘밀바스 경’이 소리를 높였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경악과 함께.
“필립 공자님! 놈의 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어떻게 북부 벽지의 귀족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내막을 알고 있는 것일까.
성검사에게 있어 아들의 일은 감추고 싶은 치부였고, 그렇기에 그들의 가정사는 철저한 비밀 속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에게, 일말의 신뢰조차 받지 못하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주 잠시나마, 남작령의 불리한 상황을 깨닫고 협상을 제의한 거라 착각한 자신이 바보였다.
“협상은 당장 파기다! 필립 공자님, 어서 돌아가시죠!”
그렇게 밀바스 경이 다급히 자리를 박차며 일어서는 찰나.
“남의 말을 듣고 마는 것조차 ‘아랫사람’의 허락을 얻는 겁니까?”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데일이 조소했다.
“자신이 거느려야 할 아랫사람의 명령에 노예처럼 복종하고 충성하다니.”
웃겨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위대하신 브란덴부르크 백작 가의 장남이란 이름이 울겠네요.”
“필립 공자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놈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시, 시끄럽다!”
재촉하는 밀바스 경의 말에, 필립이 악에 받쳐 소리를 높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마치 ‘자신이 거느려야 할 아랫사람’의 말에는 복종할 수 없다는 듯이.
데일의 조롱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웃었다.
“이래서야 필립 공자님을 ‘누구의 꼭두각시’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헷갈리네요.”
어린아이의 잔혹할 정도로 천진한 악의를 가장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