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얼마 후. 동녘 하늘을 따라 새벽녘 땅거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작센 가의 가신 기사들이 수행에 힘쓰는 공작성 내 연무장.
카앙!
쏟아지는 꼭두서니 빛이, 시퍼런 칼날에 부딪혀 흩뿌려진다.
스틸레토와 레이피어 두 자루의 칼끝이 엉키기 무섭게, 다시금 거리가 벌어진다.
그 거리를 좁히고자 공작 가의 신동 ‘데일’이 땅을 박찼고, 신검의 딸 ‘샬롯’은 좁혀지는 데일의 움직임을 노리고 역공을 넣었다.
카앙!
살기 어린 칼날의 그림자가 휘몰아쳤다.
카앙!
다시금 일섬(一閃)이 교차했다.
스릉.
어느덧 레이피어의 시퍼런 칼끝이, 데일의 목덜미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데일의 손에 들린 스틸레토 역시, 역수로 샬롯의 가슴에 닿아 있다.
무승부였다.
“실력이 꽤 늘었는데?”
대결 끝에, 데일이 미소 지었다.
“흥, 꼭 남의 일처럼 말하네.”
그 모습을 보고 샬롯이 짐짓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야말로 벌써 3서클에다가, 탑의 시험에서 20계층을 넘었잖아.”
샬롯이 말을 잇는다.
“어휴, 사람들이 온종일 어찌나 ‘데일 공자님’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몰라!”
게다가 직접 가신 기사들을 거느리고 영지 내의 괴물들을 토벌하는 일까지.
비록 순수하게 검과 검의 대결이 무승부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하나, 데일은 결코 검사가 아니다. 게다가 샬롯과의 대결에서는 대(對) 기사용에 적합한 애장 ‘그림자 망토’의 힘을 쓰지 않고 있다.
너무 위험하니까.
데일이 검을 다루는 방식은 철저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검(殺劍)이다. 거기에 그림자 망토까지 더해 전력을 다할 경우, 설령 모의전이라 해도 상대의 목숨을 배려하기 어렵다.
그 까닭에 지금의 승부에서 데일이 보여준 것은, 전력의 3할도 높게 쳐준 수치일 것이다.
샬롯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리라.
감히 넘볼 수 없는 재능의 격차.
그러나 열 살의 어린 나이를 고려할 때, 샬롯의 성취 역시 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검의 딸, 그야말로 천재란 말이 어울리는 검술의 재능과 성장 속도.
철이 들기도 전부터 검술에 십수 년을 바친 ‘서임 기사’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것이 샬롯의 저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같은 천재조차 초라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저 앞의 소년이다.
작센의 데일, 제국 제일의 천재.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에도 데일이 입을 열었다.
“샬롯도 더 강해질 테니까.”
스틸레토의 칼자루를 빙글 돌려서, 도로 집어넣으며.
“나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뭐, 뭐야! 날 또 애 취급하고…….”
데일의 말에 샬롯이 토라진 듯 뺨을 부풀렸다.
“애 맞잖아.”
“그러는 너도 애잖아!”
“나?”
그 말에 데일이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갸웃거리고 나서, 데일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나는 벌써 다 컸지.”
세상에서 가장 애 같은 말이었다.
* * *
“전투에서 기병 전력이 부대 양익(兩翼)이나 일익에 배치되어 ‘망치’의 역할을 맡을 경우…….”
커다란 목각 테이블 위로 체스 말 모형의 기물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헬무트 경이, 부대의 양측 끝자락에 놓여 있는 기병 모양의 체스 말들을 전진시켰다.
“적 부대의 날개를 돌파하고, 우회 기동을 통해 포위진을 이루는 것이 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병 전력이 집중된 부대의 양측 날개가, 적의 양 날개를 꺾고 포위진을 이루는 형국.
속되게 말해서, 쌈 싸먹기.
“즉, 고기동의 우수한 화력을 가진 기병 전력이 상대의 날개를 돌파해 포위 기동을 성공시키고──.”
“그사이 보병으로 이루어진 저지 부대가 적 기병대(망치)의 돌파를 저지하는 것이 핵심이군요.”
“그렇습니다, 데일 공자님.”
데일의 대답에, 헬무트가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어디까지나 확실한 기병 전력의 우위가 보장되어야 가능한 전술. 그리고 그 점에 있어, 작센 공작 가가 자랑하는 ‘검은 기병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고의 장기 말이었다.
“이 전술을 바탕으로 고대의 명장 바르카는, 족히 두 배 가까운 병력을 가진 롬 제국의 대부대를 완전히 섬멸했지요.”
어느 세계에서나 전쟁의 판세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망치와 모루 전술, 그리고 란체스터 법칙.
그 후 헬무트 경은 체스 말 모형의 기물들을 움직여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지형에 따라, 부대의 수적 차이에 따라, 병사들의 역량에 따라, 그리고 병종(兵種)의 비율에 따라 내려야 하는 결정들에 대해서.
때와 상황에 따라 내려야 할 결정은 항상 달라지는 법이니까.
“……참, 그러고 보니.”
비로소 헬무트 경의 수업이 끝날 즈음, 무심코 흘러가듯 데일이 입을 열었다.
“샬롯의 수행은 어때요?”
오늘 오후 샬롯과의 대결을 떠올리며.
“공자님에 비교할 바는 아니나, 참으로 경이로울 따름이지요.”
헬무트 경이 스승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이미 검식의 틀이 잡혔고, 이르기는 하나 곧 작센 가의 오러 심법과 검술을 정식으로 전수할 예정입니다.”
데일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법을 통해 제대로 오러의 힘을 활용할 경우, 아마 머지않아 지금의 수십 배는 강해지겠지요.”
십수 배조차 아니다. 수십 배.
샬롯의 성장 속도는 그녀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그저 데일의 그림자에 가려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지.
“……허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헬무트 경이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린다.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되물었다.
“샬롯과 우리 검술의 상성이죠?”
헬무트 경이 짐짓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정곡이었다.
데일 역시 그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에, 샬롯의 실력을 점검하고 헬무트 경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마법사가 심장의 서클을 통해 마나를 마력으로 가공하듯, 기사 역시 심법(心法)을 통해 마나를 ‘오러’의 형태로 가공 · 축적할 수 있다.
그리고 마법사가 ‘마탑’의 형태로 사상의 유파를 쌓아가듯이, 기사 역시 ‘기사단’의 형태로 자신들의 검을 계승한다.
하급 귀족을 섬기는 기사들은 제대로 된 심법조차 터득하지 못하고, 그나마 하급 귀족이 대귀족 세력에 복종함으로써 기사들의 수준을 덩달아 끌어올리는 것이 고작이다.
아울러 바로 그 대귀족…… 그중에서도 작센 공작 정도의 대제후는, 칠검 급 강자들을 필두로 저마다의 유파를 계승하며 기사단의 전통을 쌓아올린다.
설령 대귀족 자신이 검과는 관계없는 길을 걷는 자라 할지라도.
북부 작센 가의 밤까마귀 기사단, 브란덴부르크 가의 성 막달레나 기사단, 황실 직속의 철십자 기사단…….
그리고 광검(狂劍) 헬무트 경의 이명에서 알 수 있듯, 북부 기사들의 교리는 철저하게 힘을 기조로 하는 강검이다.
전차처럼 돌격하며 전장을 파쇄하는 ‘검은 기병대’.
수준 자체를 놓고 봤을 때는 대륙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문제는 샬롯이 추구해 왔던 검이, 속도전을 중시하는 쾌검이자 유검(流劍)이란 데 있다.
심법과 검의 기조는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작센 가의 심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북부 기사들의 유파를 계승함을 뜻한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레이피어 대신 무지막지한 대검을 들라는 수준까지 형식을 제약하지는 않는다. 그 까닭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점차 그 미세한 차이는, 샬롯의 실력이 올라갈수록 점점 그녀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샬롯의 재능을 고려할 경우, 어찌어찌 칠검의 말석까지는 도달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결코 ‘제일검’에는 도달할 수 없으리라.
일곱 자루 검의 정점이자, 일찍이 그녀의 아버지가 손에 넣은 자리.
데일이 샬롯을 향해 품는 기대는, 감히 지금의 그녀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매화검(Sword of Blossom)…….”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데일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말에 헬무트 경의 표정이 굳었다.
일찍이 샬롯의 아버지, 신검 바델 경이 구사한 대륙 최강의 검술. 심법을 통해 가공한 오러가, 흡사 매화처럼 흐드러진 보랏빛을 머금기에 붙은 이름.
“……이제는 기사국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소실된 검술이지요.”
헬무트 경이 참으로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데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목각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체스 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으로 쓰러뜨린 바로 그 남자, 샬롯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말을 타고 있는 기사 모양의 조각.
나이트(Knight).
신검 바델 경은 조국이 멸망하고, 자신의 검이 모조리 사라질 것을 정말 예상하지 못했을까?
‘정말로 이 세계에서 그의 검술은 완전히 사라진 걸까.’
한 사람의 검사로서, 자신의 검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 세계에서 가장 고결했던 기사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까?
* * *
배움의 성과를 증명할 시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검을 배우고, 마법을 배우고, 다시 마법을 배우고, 병법을 배우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빡빡한 일과.
그 와중 공작령 내의 괴물 토벌을 병행하며, 데일이 착실하게 자신의 주가를 높이고 있을 즈음의 일이었다.
작센 가 휘하의 소영주 하나가, 공작 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웃의 퍼커 남작령에서, 그대가 가진 구리 광산의 소유를 주장하며 영지전을 신청했다고?”
그러나 그 터무니없는 내용에, 작센 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이 세계에서 국가나 영지 사이의 ‘경계’란 것은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까닭에, 그 애매함을 무기 삼아 억지 주장을 부리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다.
그러나 감히 대귀족의 봉신(封臣)으로 엮여 있는 하급 귀족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그것은 곧 대귀족 자신을 향해 직접 도전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물며 그 상대는 바로 북부 제일의 대제후, 작센 공작 가다.
‘아무리 퍼커 남작이 어부지리로 남작위를 손에 넣은 도적 기사 출신이라고 해도…….’
그 정도 앞가림을 못할 멍청이가 아니다.
“예, 아울러 제가 광산을 순순히 양도하지 않고 영지전에 응할 경우…….”
아니나 다를까.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 소영주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브란덴부르크 대백께서 퍼커 남작 가의 주장에 손을 들고──.”
품속에서 ‘성검사의 친필 서명’이 새겨진 양피지 서신을 내밀며.
“구리 광산의 일정 지분을 대가로 ‘성 막달레나 기사단’을 파견할 것이란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성 막달레나 기사단. 제국의 전쟁영웅이자 성검사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들.
또다시 그 이름이다. 일순,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럼 그렇지.’
데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성검사 역시, 그날 이곳에서 흑색공에게 받은 굴욕을 결코 잊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감히 작센 공작 가를 상대로 영지전을 감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이처럼 치졸한 방법으로 자신의 설욕을 감행하려는 것이겠지.
아울러 전투의 당사자가 될 양측 영지가 있는 곳은 제국 북부와 중부 지대가 맞물린 경계 지역. 북부의 끝자락, 작센 공작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완전하지 않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영지전이란 상대 세력의 완전한 소멸을 바라는 총력전이 아니다.
흑색 마탑의 힘을 함부로 남용할 수 없는 제약 아래, 창과 칼로 정정당당하게 펼쳐지는 전투에서 승기를 확신하는 거겠지.
“아버지.”
상황을 종합하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작센 가의 기사들과 함께, 제가 직접 이 전투를 지휘하게 해주십시오.”
“……데일.”
“헬무트 경 말처럼, 드디어 영지전을 수행할 때가 찾아온 것 같네요.”
위기란 곧 기회란 말까지 갈 필요조차 없다.
그날, 자신의 아버지가 보여준 그 이상의 굴욕을 느끼게 해줄 절호의 기회.
해볼 수 있는 싸움이었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