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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23화 (23/301)

23화

* * *

며칠 뒤.

세피아의 일을 뒤로하고, 데일은 제11계층에서 ‘탑의 시험’을 맞이했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세피아는 데일의 믿을 수 있는 스승이었고, 그녀에게 있어 데일은 사랑스러운 제자이리라.

그날의 일은 그저 의미 없는 해프닝에 불과했고, 아마 세피아에게는 그것이 ‘해프닝’이란 자각조차 없을 것이다. 그저 열 살 아이의 치기 어린 감정에 불과하다고 넘겨짚겠지.

이럴 때는 어린아이의 몸이란 사실을 좋아해야 할지 어떨지, 제법 복잡한 심경이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에게 다그치듯 중얼거린다. 흑색 마탑의 시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흑색 마탑주의 가장 정당한 후계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아래 계층의 시험 일거수일투족은 마법 영사기를 통해 중계되며, 사람들이 누구를 향해 이목을 집중하고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공작 가의 신동이자 흑색공의 아들. 바로 자신이다.

손바닥 위로 시린 냉기와 정제된 어둠의 마력을 일렁이며, 데일이 자신의 머릿속을 차갑게 얼린다.

제11계층.

아티팩트와 마도서, 가용할 수 있는 온갖 아이템과 더불어 마법사로서의 전력이 허용되는 곳.

생명점 목걸이가 시험자의 목숨과 안전을 100% 보장해줄 수 없는 곳.

그 덕에, 오히려 시험 자체를 맞이하는 데일의 마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고, 상대를 ‘배려할’ 필요도 없다. 비로소 무거운 족쇄가 풀린 것 같은 홀가분한 감각.

미풍조차 불지 않는 실내에서, 데일이 걸친 망토가 사방으로 펄럭이기 시작했다.

데일의 애장(愛裝)이라 할 수 있는 어둠의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

‘3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지금, 어디까지 그림자 망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

망토 자락의 음영을 따라 발밑의 어둠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우리 공작 가의 기사들과 다르다.’

그리고 데일이 탑의 시험에 임하기 직전, 작센 공작이 해준 충고를 떠올린다.

‘그들에게 마탑 자체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며, 자신의 목표를 위한 사다리에 불과하니까.’

아버지이자 동시에 마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탑주로서.

‘그럼 마탑의 충성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무엇입니까?’

‘공포다.’

공포.

그렇기에 제1계층의 ‘생명점 쟁탈전’에서 그 같은 활약을 보여준 것이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서 비롯되는 공포.

군림하지 않고서는 다스릴 수 없다.

데일에게 있어 작센 공작은 때때로 엄격하되, 더없이 자상하고 사려 깊은 아버지다. 그러나 흑색 마탑의 이들에게, 그리고 북부 바깥의 이들에게 ‘흑색공’의 이름이 갖는 흉명(凶名)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아울러 작센 가에 대적한 자들의 말로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충고를 되새기며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탑의 시험, 제11계층. 시험의 형태는 ‘마법 결투를 통한 승자 진출전(Tournament)’.

제1계층의 첫 시험 ‘생명점 쟁탈전’과 마찬가지로, 솎아내기의 의미를 갖는 시험 방식.

그러나 상대 역시 더 이상 아카데미 졸업생 레벨의 풋내기가 아니다. 이전 기수의 시험자들이 합류하며 흑색 마탑의 정식 마법사들과 맞서는 결투의 장.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 정도의 상대도 아니지.’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통해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란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데일의 앞에 있는 상대 역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으리라.

흑색 마탑의 수석(首席) 3서클 마스터, 엘버트 로젠하임. 그 역시 ‘흑색공의 아들’을 꺾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열의로 불타고 있으니까.

이윽고 마법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아니, 휘슬이 울려 퍼지는 것보다 0.몇 초 남짓 빠르게.

“다크 애로우.”

후웅!

상대 흑마법사 엘버트가, 어둠의 화살을 속음(速音) 영창으로 펼쳐냈다.

결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공격 마법을 날린 것이다.

명백한 부정행위.

‘오호라, 이거 봐라?’

그 일격에는 데일조차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심장의 서클을 가속해야 했다.

고작 0.몇 초라 해도, 숙달된 마법사에게는 몇 개의 어절을 발음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림자 망토에서 칠흑의 칼날이 솟아나며 어둠의 화살을 튕겨냈다.

한 발의 화살을 막아내기 무섭게, 어느덧 수십 발의 다크 애로우가 엘버트의 등 뒤에서 마력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호오.’

끝없이 증식하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어둠의 화살. 일개 3서클이 감당할 수 있는 숫자를 아득하게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정체를 헤아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증폭 계통의 아티팩트를 쓰고 있군.’

10계층 이상을 넘어올 정도의 마법사이니, 아티팩트 몇 개쯤 갖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비록 작센 공작 가의 수준에 감히 비교할 바는 아니었으나.

“하하, 어떠십니까! 데일 공자님!”

부정 시작을 통해 전투의 템포(Tempo)를 잡고,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끝없이 이어지는 공세.

타앗!

폭격처럼 내리꽂히는 화살 세례를 피해 데일이 땅을 박차고 질주했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시작부터 대담하게 펼쳐지는 부정행위. 그러나 달리 결투를 제지하려는 신호나 기색은 없다.

구경하는 이들은 이 미세한 차이의 중대함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경지의 이들은 데일을 시험하고자 침묵을 지켰다.

참으로 영악하게도,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서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래서 마법사들이 싫다니까.’

주군의 가문을 위한 충성을 덕목으로 삼는 기사와,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마법사는 그 성향 자체가 다르다.

철저한 실력 지상주의. 오로지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

흑색공의 아들이란 사실 역시, 그들에게는 자신을 증명할 기회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자, 바로 지금이다! 일어나서 이 몸 앞에 영겁의 복종을 맹세해라!”

이윽고 데일이 수비에 집중하는 틈을 타서, 엘버트가 널브러진 시체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피에 굶주린 칠흑보다 깊은 어둠의 종자들이여!”

자아도취에 빠진 마법사들 특유의, 과장된 수식으로 점철된 주문.

‘내가 다 부끄럽네.’

그러나 듣는 사람이 부끄럽고 효율이 끔찍하다는 점을 제외하고서, 그 길이와 형용사에 비례해 효과는 확실히 증폭된다.

망자들의 소생과 동시에,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끝없이 쏟아지는 흑마법 화살의 세례.

결국, 아티팩트의 힘을 끌어내는 것 역시 술자의 역량이다. 확실히 수석 3서클 마스터란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다.

‘풋내기들보다는 실력이 낫군.’

데일은 계속해서 수비에 집중하며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딱히 수세에 몰린 까닭은 아니다. 비록 상대가 부정하게 선공을 취하기는 했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데일에게는 상정 이내의 일이니까.

그럴 마음을 먹을 경우, 데일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에는 일발의 아이스 불릿으로 족하리라.

그저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전력을 모조리 펼칠 때까지 기다려주기 위해서.

상대의 증명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명이 될 테니까.

이윽고 거창한 주문으로 강화된 망자병들이 데일을 에워쌌다.

“공격해라, 어둠의 종자들아!”

승기를 확신하며 수석 3서클 마스터, 엘버트가 재차 소리를 높였다.

“……이제 더 보여줄 거 없죠?”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되물었다. 이윽고 망자들이 땅을 박차며 일제히 데일에게 쇄도하는 바로 그때.

사방에서 쇄도하는 망자들의 두개골을 향해, 데일의 발밑에서 칠흑의 칼날들이 솟아났다.

콰직!

정확하게 두개골 틈새를 찢고 파고들어, 망자들의 움직임을 고정하고자.

씨익.

엘버트 로젠하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릿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시폭(屍爆).”

시체 폭발. 중얼거림과 함께, 데일의 코앞에서 고정된 망자들의 육체가 일제히 터져나갔다.

“이걸로 끝입니다, 공자님!”

망자들의 살과 피와 뼈가 수류탄처럼 터지며 흩날렸다. 그림자 망토로 막아낼 수 없는 미세한 뼛조각이 날카롭게 쇄도했다.

그렇다고 얼음의 벽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그러나 데일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악당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

검고 아스라한 발밑의 그림자가, 데일의 몸을 흐릿하게 휘감았다. 데일의 육골(肉骨)이 실체를 잃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다.

흡사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이,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들의 무리 속으로.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의 새 활용법.

‘망령화’.

땅바닥의 그림자 무리가, 그의 앞에 있는 수석 3서클 마스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헬무트 경이 말했듯, 마법사와의 싸움은 거리가 생명이다.

데일 자신이 마법사란 점은 둘째치고서.

“히, 히익!”

엘버트의 발밑을 휘감고, 어둠의 무리가 ‘육골의 형태’를 이루며 실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결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속음 영창이라니.”

바로 그의 등 뒤에서.

“──고작 어린애를 상대로 너무 비겁하지 않아요?”

두 사람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진다. 망토의 음영이 자아내는 그림자들의 무리가 광희하기 시작했다.

수중에서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 떼처럼.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아아!」

「먹어도 돼? 먹어도 돼?」

「빨리 먹게 해줘!」

굶주린 그림자들의 외침에, 데일이 나직이 미소 지었다. 미소 짓고 나서 차갑게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티팩트에는 아티팩트로.

그 말과 함께, 굶주린 그림자들의 무리가 엘버트의 발목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 어둠의 뱀에 휘감기듯이.

“아아, 아아악, 아아아악!”

미친 듯이 발버둥 치고 발악해도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살아 있는 그림자들의 무리가 아가리를 벌린다.

카앙!

‘유효 타격’이 성립됨과 동시에, 엘버트의 목에 찬 ‘생명점 목걸이’가 실드 마법을 발동하며 부서진다.

그러나 끝없이 굶주린 그림자 무리 앞에서, 고작 실드 마법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생명점 목걸이는 시험자의 목숨과 안전을 100% 보장해줄 수 없다.

“아, 저도 아직 이놈들을 통제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데일이 남의 일처럼 시치미를 떼고 웃었다. 무척이나 차갑게.

“아아악, 아아아악!”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콰직, 콰직, 아그작.

굶주린 그림자들이 발목을 물어뜯고, 가슴과 어깻죽지를, 살점을 찢고 물어뜯고 피를 들이키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급소와 주요 장기를 피해서.

죽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포식이 펼쳐졌다.

보여주어야 했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차이를, 그리고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이윽고 엘버트의 육체가 갈가리 찢겨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데일이 중얼거렸다.

“물러나라.”

날뛰고 있는 그림자 무리가, 일제히 데일의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참혹한 풍경 앞에서, 정적이 내려앉았다.

객석의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흑색 마탑의 흑마법사들조차 할 말을 잃고 침묵을 지킬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작센 가의 방식이었고, 나아가 흑색공의 방식이다.

그 까닭에, 누구도 감히 데일이 ‘흑색공의 가장 정당한 후계자’란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 * *

──탑의 시험, 제11계층.

마법 결투를 통한 승자 진출전, 제2회전.

“패, 패배를 선언합니다!”

제3회전.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끝으로 최종전까지.

“살고 싶습니다…….”

딱 한 차례의 승부를 제외하고, 데일의 승부는 모조리 부전승이었다.

참으로 맥 빠지는 결말이었으나, 감히 데일을 상대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 엘버트의 결말을 고려했을 때.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을 내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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