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 *
전대미문. 그렇게밖에 형용할 수 없는 사태였다.
효율적으로 시험자들을 솎아내기 위해 치러져야 할 시험이, 고작 한 사람의 손에 엉망으로 무너졌다.
데일의 생명점, 59점. 그 외 전원 탈락.
‘생명점 쟁탈전’이란 이름을 내걸기는 했어도, 하나가 나머지 모두의 생명점을 독식하게 될 줄이야.
곳곳에서 경악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흑색 마탑의 이들을 향해서.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는 풋내기 마법사들에게는 흥미조차 없었다.
데일이 진정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상대.
작센 가의 기사들, 밤까마귀 기사단이 무력을 통해 작센 공작의 친위대를 자처하듯. 흑색 마탑주로서 거느린 흑색 마탑의 장로들…… ‘흑의위(黑衣衛)’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탑의 시험’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 *
──탑의 시험, 제2계층. 그리고 제2의 시험.
계층 수호자 ‘살덩어리 골렘(Flesh golem)’을 쓰러뜨리는 것.
족히 수 미터의 거구에, 우락부락 터질 것 같은 근육 덩어리를 뭉쳐 이루어진 괴생물.
두말할 것 없이, 일개 3서클 마법사가 홀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상대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다수의 시험자가 힘과 지혜를 합쳐 맞서는 협동전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
제2계층의 시험을 응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1계층의 ‘생명점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자들.
그런데.
“내가 다 떨어뜨렸지, 참.”
다시 말해, 함께 힘을 합칠 협력자가 없다는 뜻이다. 딱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나.
데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살덩어리 골렘을 바라보았다.
막 탑의 시험을 받기 시작한 마법사 다수가 힘을 합쳐, 전력을 다해야 겨우 승산을 장담할 수 있는 상대.
살덩어리 골렘이 포효했고, 그 우렁찬 모습을 지켜보며 객석의 이들이 숨을 삼켰다. 아무리 방금 보여준 데일의 재능이 놀랍다고 해도, 상대가 상대였으니.
여전히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망자 소생과 강화 이외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다.
마법사로서의 전력을 다하는 것이 허락된 상대.
‘그걸로 됐지.’
데일에게는 그 사실 하나로 족했다. 지나칠 정도로.
3서클을 이루고,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시험해볼 기회였으니까.
어느덧 살덩어리 골렘이 포효와 함께 땅을 박차며 쇄도했다. 전차가 질주하는 것 같은 위압감에 장내의 모두가 숨을 죽이는 바로 그 순간.
데일이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대로 살덩어리 골렘의 주먹이 데일의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골렘의 주먹이 데일에게 ‘유효 타격’을 입히고, 데일의 생명점 목걸이가 파괴되리라 생각한 바로 그때.
“부패 가속.”
정제된 어둠의 마력이 발밑에서 휘몰아치며, 데일을 장막처럼 휘감았다.
살덩어리 골렘의 일격이 바로 그 어둠의 장막 위로 내리꽂혔다.
고작 데일의 코앞에서 몇 센티미터의 거리를 남겨두고, 휘둘러지는 주먹 끝자락부터 골렘의 살덩어리가 빠르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신선기, 팽창기, 붕괴기, 붕괴 후기.
유기체의 사멸을 알리는 일체의 과정이, 시계의 초바늘 하나에 응축된 것이다.
──부패 세균에 의한 유기질소 화합물의 분해.
‘저쪽 세계’에서 괴수를 상대로 하는 생화학전(Biochemical Warfare)은 열병기와 더불어 중요한 전략의 하나였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이러한 생화학전을 일컬어 ‘흑마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울러 인류 결사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전생의 지식이란, 결코 고등학교 수준의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히 흑색공 이상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거기에 더해 시체가 썩고 구더기와 갑충, 파리가 득실거리는 그 지옥 같은 전장의 참혹함.
데일의 일평생을 함께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경험과 이해가 더해져야 비로소, 마법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하나가 어긋나도 성립할 수 없는 일체의 요소들이 기적처럼 맞물린 결과물.
코를 찌를 것 같은 시취(屍臭) 속에서, 데일이 덤덤히 고개를 들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죽음의 냄새였다.
* * *
“……터무니없네요.”
객석에 들어서지 못한 이들이 마탑 내의 마법 영사기를 통해 ‘탑의 시험’을 지켜보듯, 흑색공 역시 탑의 일실에서 아들 데일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비서장,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와 함께.
터무니없다. 그것이, 데일의 활약을 지켜본 그녀의 순수한 감상이었다.
좀처럼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그녀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의 경악.
부패 마법은 흑마법 중에서도 특히 그 레벨이 높고, 고작 3서클의 ‘어린 마법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과정, 그 이치에 깊이 통달해야 비로소 가능한 고도의 마법. 하물며 그것을 즉석에서 ‘전투 마법’의 형태로 활용하는 것은 제곱의 역량이 필요하다.
“탑주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네요.”
그러나 그 사실을 납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데일의 재능과 더불어 ‘흑색공의 이름’ 역시 가볍지 않았다.
흑색공의 아들이란 사실 하나로 사람들을 납득시킬 정도의 위명.
그것이 바로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이자 흑마법사, 흑색공이 가진 힘이었으며.
“…….”
바로 그 같은 남자조차 침묵을 지키게 하는 것이, 데일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 * *
그날의 끝자락.
데일은 무사히 10계층을 돌파해 자신을 증명했고, 그 활약을 지켜본 사람들의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자체로 경이적이라 할 수 있는 대기록이었고, 시험을 치르며 데일이 보여준 활약은 더더욱 경악할 내용이었으니까.
그리고 며칠의 휴식 이후 치러지는 제11계층의 시험이 다가왔다.
풋내기와 그렇지 않은 마법사들을 구별 짓는 계층이자, 급격하게 시험의 레벨이 상승하는 경계.
데일과 마찬가지로 10계층 이상을 돌파한 전기(前期) 시험자들이 추가로 합류하며, 상대는 아카데미의 풋내기 졸업생들이 아니라, 정식으로 흑색 마탑에 소속되어 어둠의 마법을 수행하는 이들과 마주친다.
구울이나 살덩어리 골렘 등의 시시한 괴물 사냥은 더 이상 없다.
시험자들에게 지급되는 ‘생명점 목걸이’는 더 이상 100% 목숨을 보장해줄 수 없으며, 시험에 응하는 자들은 자신이 가진 전력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된다.
각종 아티팩트, 마도서, 그 외에 자신의 능력이나 가문의 배경으로 구매할 수 있는 온갖 아이템들.
아울러 그사이, 제1계층의 ‘생명점 쟁탈전’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학살 사태를 수습하고자…… 데일을 제외하고 탈락한 아카데미 졸업생 59명의 재시험이 이례적으로 허락되었다.
* * *
“데일.”
그날 밤, 시험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데일 앞에 뜻밖의 얼굴이 나타났다.
“세피아 선생님!”
사파이어색의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쫑긋 솟은 엘프의 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나는 미모에, 희미하게 감도는 상냥한 미소.
“아주 훌륭하게 시험을 치렀더구나.”
스승 세피아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그녀 역시 데일의 시험을 지켜본 모양이다.
“거기다 하루아침에 3서클을 이루다니, 너의 행보에는 참으로 놀라울 뿐이란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덕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세피아가 웃으며 말을 흐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서려 있었고, 데일도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더 이상 데일이 자신의 능력을 숨기지 않기로 했을 때, 그리고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며.
스승으로서, 청색의 6서클 엘프 마법사는 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괴물로 여겨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데일이 보여준 성취는 이미 천재라고 할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천재와 괴물이란 결국 종이 한 장의 차이이며, 지금의 데일은 그 종이를 수백 장 가까이 쌓아 올린 셈이니까.
“세피아 선생님.”
생각하고 나서 데일이 입을 열었다.
“저랑 데이트라도 하지 않을래요?”
“데, 데이트……?”
뜻밖의 말에 세피아의 표정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야말로 수줍음을 타는 앳된 소녀처럼.
“네, 모처럼 도시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데일이 말했다. 데이트란 말의 깊은 의미를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열 살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가장하고.
“……음, 그래. 그러자꾸나.”
그 말에 비로소 세피아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데이트라…… 확실히 틀린 말도 아니겠지.”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세피아가 ‘네가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무척이나 상냥하게.
그리고 그날의 세피아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데일이 ‘데이트’란 말의 의미를 아주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속이 시커멓다는 게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정말로,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 * *
창백한 잿빛의 겨울 하늘. 살을 에는 것 같은 삭풍도 축제의 열기를 녹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여, 죽음의 도시에 커다란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네크로폴리스를 가로지르는 작센 강의 지류(支流).
추위에 강물이 꽁꽁 얼어붙었고, 그 얼음 위로 흩뿌려지는 달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빛났다. 데일과 세피아는 바로 그 강물 위의 돌다리를 거닐고 있었다.
“무척이나 어려운 시험을 치렀는데, 피곤하지는 않으냐?”
돌다리 위를 거닐며, 세피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저는 멀쩡해요.”
데일이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게다가 다음 시험이 시작되기까지 며칠 더 걸릴 테니까요.”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짤막하게 대화가 이어졌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달이 아름답네요.”
침묵 끝에 데일이 입을 열었다.
“음, 참으로 그 말대로구나.”
데일의 말에 세피아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좀처럼 대화가 이어지지 않네.’
딱히 침묵이 불편하지는 않다. 세피아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더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싶다.’
그저 일개 스승과 제자로서의 사이가 아니라.
어째서? 데일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그날, 3서클을 이루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세계를 떠올린다.
그것이 도망칠 수 없는 진실이었고, 데일의 진정한 세계였다.
그 진실을 깨닫고 나자, 역설적으로 세피아의 다정함이 가슴에 사무쳤다. 자신이 가진 괴물의 얼굴을 부정하지 않고, 지금까지 품어준 그녀의 상냥함이.
여느 때처럼 자신을 믿어주는 세피아가 좋았다. 혹은 그저 ‘그 세계’에서 도망치기 위해 누구라도 좋은 걸지도 몰랐다.
끝없이 펼쳐진 잿빛의 지평과 허무, 뼈가 시릴 정도의 고독에서, 진정한 자신의 세계로부터.
“좋아해요, 선생님.”
“……?!”
데일이 말했다. 뜻밖의 말에 세피아가 놀라서 엘프의 귀를 쫑긋 세웠다.
“바, 방금 뭐라고 했느냐?”
“저, 세피아 선생님이 좋아요!”
데일이 천진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내뱉는 말의 무게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하고서.
“……그래.”
세피아가 나직이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나 역시 데일을 아주 좋아한단다.”
무척이나 상냥하고 자애로운 목소리. 여느 때의 다정한 세피아.
결국에는 열 살의 인간 아이와 엘프의 사이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고마워요, 선생님.”
그렇기에 데일이 나직이 미소 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슴속의 어두운 감정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며.
‘……인생 2회차가 좋기는 좋아.’
남의 일처럼 짐짓 무심하게 생각한다.
잿빛의 하늘은 여전히 검고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