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구나.’
죽음의 도시라고 해서, 정말로 그 이름처럼 음습하고 불길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고려해도, 마차의 차창 너머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물살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도 마법이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구경거리다.
그리고 매해 탑의 시험이 펼쳐지는 이 주기에는, 탑의 내부가 사람들의 여흥을 위해 특별히 개방되는 까닭이다.
어느 의미에서 마탑이 자리 잡은 도시 최대의 축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당장 황도에 있는 ‘적색 마탑의 시험’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스케일의 행사 중 하나니까.
게다가 흑색 마탑의 경우에는 흑색공의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방을 시작한 까닭에, 그 주목도가 각별하다. 아울러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너의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아버지 작센 공작이 입을 열었다.
마도의 세계에, 그리고 세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
지금까지 데일의 행보는 어디까지나 입에서 입을 타고 부풀려진 소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 시험을 지켜보게 될 이들의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
그 행위가 가지게 될 의미 역시도.
“네, 알고 있어요.”
데일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있기에 이토록 급하게 3서클을 이루고, 탑의 시험을 자청한 것이다.
덜컹.
바로 그 순간, 가벼운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우뚝 정지한다.
“도착한 모양이구나.”
아버지 흑색공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삼가 흑색공 각하를 뵙습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마차에서 걸음을 옮기는 두 부자를 향해, 대기하고 있던 흑색 마탑의 장로들이 일제히 예를 표했다.
“봐, 데일 공자님이야!”
그리고 저 멀리서, 공작 가의 어린 신동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저 어린 나이에 벌써 3서클을……!”
“제국에서 유례가 없는 마법의 천재라더니, 그 이야기가 정말이었나!”
“아니야, 듣자 하니 검술 실력도 공작 가의 기사들과 호각이랬어!”
‘낯 뜨겁다, 낯 뜨거워.’
어느 의미에서는 이 시험의 가장 커다란 주역.
“데일 공자님.”
바로 그때 장로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묘령의 여성이 데일에게 다가선다.
“에리스.”
“삼가 탑주님을 뵙습니다.”
흑색의 대행자, 에리스.
탑의 장로이자, 평상시 흑색공의 부재를 대신해 탑의 업무를 총괄하는 비서장이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일 공자님.”
“잘 부탁드려요, 에리스 씨.”
잿빛 정장에 모노클을 빛내고 있는 차가운 느낌의 여성.
“시험이 치러지는 사이, 그녀가 널 보필할 것이다.”
“예, 아버지.”
그 말을 끝으로 휘하의 장로들을 거느린 채, 흑색공이 앞서 걸음을 내디뎠다.
“공자님, 부디 이쪽으로.”
감정 없이 차가운 목소리. 에리스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공자님과 함께 시험에 응시할 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생, 3서클의 어린 흑마법사들. 그들이 바로 데일과 함께 가장 밑바닥부터 ‘탑의 시험’을 치르게 될 경쟁자들이다.
고작 3서클의 풋내기 마법사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경쟁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 * *
‘괴물 새끼…….’
그것이 공작 가의 신동, 작센의 데일을 마주한 3서클 마법사 벨릭의 순수한 감상이었다.
──탑의 시험, 제1계층.
‘생명점 쟁탈전’. 배틀로얄.
그렇다고 해서 정말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는 데스매치는 아니다.
시험자에게는 실드 마법이 걸린 ‘생명점(Life Point) 목걸이’가 주어지고,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를 일으켜 자신을 지키거나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치명상에 준하는 ‘유효 타격’을 입을 경우, 생명점 목걸이가 실드 마법의 발동과 함께 파괴되며──탈락 처리.
그 후 유효 타격을 준 ‘공격자’의 생명점 목걸이에 +1점을 가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3점 이상의 점수를 가진 자는 비로소 다음 계층으로 올라갈 자격을 부여받는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점을 제외하고 두 개 이상의 생명점을 확보해야 하는 셈이다.
매회 수십여 명씩 지원하는 시험자들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솎아내기 위한 시험.
‘생명점 쟁탈전’의 룰 자체는 여러 형태로 오색 마탑, 심지어 기사들 사이에서도 적잖이 치러지는 방식이다.
매해 흑색 마탑의 제1계층에 우르르 쏟아지는 풋내기들을 걸러내는 일에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데일이 시험장에 들어섰을 때, 데일의 실력을 시험하고자 다수의 흑마법사가 팀을 짜서 망자병을 움직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주목과 견제의 중심에서, 데일이 하나의 망자병을 일으켰다. 백골 전체를 따라 시린 냉기를 덧씌우며.
일대 다수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 망자병이 격돌했고, 이내 도륙…… 아니, 도골(屠骨)이 시작되었다.
흡사 소드 마스터가 적진 속에서 잡병들을 도륙하듯이.
데일의 망자병이 뼈로 이루어진 칼날을 휘둘렀고, 칼날에 서린 냉기가 시퍼렇게 서슬을 흩뿌린다.
카앙!
뼈의 검이 맞부딪쳤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칼날을 타고 냉기 무리가 질주하며 상대에게 휘감겼다.
쩌적, 쩍.
휘감겼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수, 수계 마법!”
“설마 이중 속성을…….”
냉기의 무리가 상대 망자병을 잠식하고 얼어붙기 무섭게, 얼음 위로 백골의 칼날이 내리꽂혔다.
쨍그랑!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일격에, 얼음 조각이 결정 형태를 이루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흡사 유리병을 떨어뜨린 것처럼 맥없이 조각나 버린 것이다.
“하나.”
데일이 덤덤이 중얼거린다. 사방으로 흩어진 얼음 조각들이, 다시금 데일의 망자병을 향해 휘감기기 시작했다.
방금처럼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얼어붙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카앙!
사방에서 휘둘러지는 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갑주이자 방패를 형성한 것이다.
냉기 갑주(Frozen Armor)와 급속 동결(Rapid Freezing) 마법 사이를 자유자재로 전환하는 냉기의 무리.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공수일체였다.
“둘.”
쨍그랑!
데일의 망자병이 이격을 휘두르자, 또 하나의 망자병이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졌다.
“셋.”
일합조차 맞받아치지 못하고,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수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규칙을 깨는 부정행위가 아닙니까-!”
그 모습을 보고 시험자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를 높였다.
이곳은 순수하게 흑마법사로서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한 대결의 장이다.
해당 시험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망자 소생과 망자 강화의 마법 두 계통. 그 외 일체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꼭 암 속성 마법 하나로 망자를 강화하란 법은 없지 않나요?”
그러나 데일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설령 그게 ‘살아서 움직이는 얼음의 갑주’라고 해도 말이죠.”
교묘하나, 결코 틀린 말도 아니리라. 그 증거로 데일의 말에 동의하듯, 달리 시험이 중지되는 일은 없었다.
암묵의 긍정.
“아무래도.”
그 모습을 보며 데일이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여기서는 모두가 다 함께 힘을 합치셔야 할 것 같네요.”
아이답다고 해야 할지, 아이답지 않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렇지 않나요?”
생명점 쟁탈전, 배틀로얄의 룰.
그럼에도 이곳에는 공공의 적 하나와 그를 쓰러뜨리기 위한 협력자들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고작 열 살의 어린아이가, 수십 명의 흑마법사와 그들이 거느린 망자병 앞에서 홀로 맞서고 있다.
그 사실에 수치스러움이나 자괴감을 느낄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너희들이 저 망자병을 봉쇄하고 술사 쪽을 노려!”
“상대 하나다! 수적 우위로 몰아붙여!”
상대는 바로 그 흑색공의 아들이다.
어느덧 이것이 ‘배틀로얄’이란 사실마저 잊고서, 모두가 데일을 제압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데일의 망자병이 무적에 가까운 무위를 자랑해도, 결국 ‘생명점 목걸이’를 가진 것은 어디까지나 술사 데일이다.
십수 마리의 망자병들이 하나의 망자병을 봉쇄하고, 그 틈을 노려 나머지 망자병이 쇄도했다.
상대는 어느덧 일사불란하게 편제를 이루어 움직이는 ‘망자 부대’였다.
‘……이런.’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데일이 비로소 혀를 찼다. 당황이 아니라, 그저 한 가지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탓에.
‘그러고 보니 아티팩트의 사용도 금지였지.’
초보자와 풋내기들로 이루어진 ‘아래층의 시험’에서 아티팩트 및 마도서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다. 데일의 애검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 망토’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
게다가 망자 소생과 강화 외의 마법 사용은 불가능해서, 별도의 수 속성 마법을 쓸 수도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데일의 시선이 다시금 망자병 부대를 향했다.
‘정공법으로 가야겠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저 아주 조금, 일이 귀찮아졌을 따름이지.
데일이 망자들을 향해 땅을 박찼다.
‘보통의 마법사’에게는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모습.
그러나 자진해서 적들의 사이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뼈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콰직.
뼈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데일이 그 틈을 노리고 망자의 팔목을 비틀어 부러뜨렸다. 부러뜨린 다음, 그대로 망자의 팔을 찢고 솟아나 있는 ‘뼈의 칼날’을 낚아챘다.
즉석에서 체내의 뼈를 조작해 망자를 무장시키는 백골검(Bone Sword).
바로 그 검을 낚아채, 등 뒤에서 휘둘러지는 일격을 튕겨냈다.
자신의 손에 들린 백색의 검을 능숙하게 다루며, 물 흐르듯 매끄럽게 펼쳐지는 체술과 검술.
어디까지나 ‘검사’로서, 홀로 십수 마리의 망자병과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을 쓰지 말랬지, 체술과 검마저 사용하지 말란 규칙은 없었으니까.
“설마 검술까지……!”
“저게 흑색공의 아들…….”
데일의 명성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콜로세움 형태의 실내에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들.
“제국 제일의 천재란 게 과장이 아니었어!”
“역시 데일 공자님이야!”
시험장의 상대들이나,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객석의 이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경(畏敬).
데일의 망자병이 일기당천으로 적들을 파쇄했고, 데일 역시 그에 뒤지지 않고 차례차례 망자들을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망자병과 술사 사이, 마력의 실이 엮여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손에 들린 뼈의 칼날을 휘두름으로써.
상대의 미숙함과 데일의 역량, 어느 하나라도 빠질 경우 성립할 수 없는 신기였다.
아울러 ‘그림자 기생충’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데일의 망자병 역시 오토매틱(Automatic)이 아니다.
검과 사령술. 하나에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마당에, 데일이 보여주는 집중력이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데일과 마찬가지로 사령술사의 일석을 자처하는 이들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경악.
그 시점에서 승패란 더 이상 왈가왈부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더 이상 가용할 수 있는 해골이나 시체가 완전히 바닥나고, 무력화됐을 때. 적의 부대가 비로소 전멸을 맞이했을 때.
데일이, 자신이 거느린 망자병과 함께 덤덤히 걸음을 옮겼다.
“히, 히익!”
칼날이 휘둘러졌고, 실드 마법이 발동했고, 상대의 생명점 목걸이가 부서졌다. ‘공격자’ 데일에게 1점의 생명점이 추가되었다.
생명점 쟁탈전.
더 이상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시험자들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생명점 수확.
“고, 공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에이, 정말로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쟁탈이 아니었다. 독점이다. 그야말로 학살이란 말이 어울리리라.
차례차례 시험자들의 생명점을 거두며, 데일이 걸음을 내디뎠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백골의 칼날을 휘두르며.
이윽고 마지막 시험자가 데일의 앞에 홀로 남겨졌을 때.
‘괴물 새끼…….’
그리고 자신을 향해 뼈의 칼날이 휘둘러지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공작 가의 신동, 작센의 데일을 마주한 3서클 마법사 벨릭의 순수한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