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끼이익.
과거 용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의 전쟁 영웅이자, 성검 뒤랑달의 선택을 받은 자.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작센 공작성’의 대회당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 알기 쉬운 환대의 분위기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막이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무덤가를 거니는 듯한 고요함. 그것은 무례하다는 말로도 오롯이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침묵이었다.
백작을 따르는 기사들 역시, 그 얼어붙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을 삼켰다.
그 남자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회당 끝자락에 우뚝 솟은 옥좌에, 불길하기 그지없는 칠흑의 망토를 둘러쓰고서.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백작.”
흑색공.
제국 3대 공작의 일각이자, 흑색 마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죽은 용사를 제외하고, 제국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위험 중 하나’.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공작의 곁에 있는 것은, 제국 제일의 천재라 이름 높은 작센 가의 장남 ‘데일’. 그리고 공작 가의 시녀로 몸을 의탁한 신검의 딸.
증오를 감추지 않는 그녀의 눈빛을 뒤로하고, 성검사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 제일의 대귀족이 행사하는 압박에는, 천하의 성검사라 할지라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삼가 작센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숙이고 나서, 성검 뒤랑달을 세로로 내리꽂아 예를 표했다.
“바쁘신 와중, 명망 높은 성검사께서 이런 벽지까지 행차하실 줄이야.”
옥좌에 앉은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나 빨리 오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에, 다소 섭섭한 환대를 용서해 주시지요.”
비아냥대는 것 같은 그 말투에도, 백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를 표하는 것밖에.
“공작 각하의 부르심보다 달리 급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침묵 끝에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그 말에 작센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손을 뻗을 따름이다.
심장에 새겨진 ‘여덟 개의 마나 고리’를 따라, 불길하기 그지없는 마력을 회전시키며.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펼치는 어둠의 마법. 극도로 정제된 흑색 마력이 회당을 내달린다.
“……!”
그 의미를 헤아린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성검 ‘뒤랑달’의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후우웅!
흑색공의 발밑을 중심으로, 칠흑의 선풍이 휘몰아쳤다. 검고, 어둡고, 불길하게 일렁이는 죽음의 바람이 실내를 질주한다.
성검사와 그를 보좌하는 순백의 기사들을 향해 죽음의 바람이 휘몰아쳤고, 기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친다.
제대로 된 저항을 할 틈조차 없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사제들의 신성으로 벼린 미스릴 갑주가, 철이 산(酸)에 화학 작용을 일으키듯 부식되며 줄줄 녹아내린다. 그다음에는 갑주 밑의 몸이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마치 염산을 통째로 들이붓는 것처럼.
처음에는 살점이 녹아내린다. 다음에는 뼈가 새하얗게 드러나고, 그마저 힘없는 뼛가루가 되어 스러진다.
죽음의 바람이 휘몰아쳤고, 그 자리에는 뼛가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줌의 잿더미가 덧없이 흩날릴 따름이다.
성검사가 자랑하는 ‘성 막달레나 기사단’의 기사들이,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일소되었다.
오직 한 사람, 성검 뒤랑달의 가호로 보호받는 브란덴부르크 백작을 제외하고.
그러나 성검사의 주위를 따라 일렁이는 금빛의 보호막이,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다.
고위 흑마법 ‘허무의 폭풍(Tempest of Nihil)’.
그것도 일말의 영창조차 없는 즉발 시동.
“고, 공작 각하……!”
성검사가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이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옥좌에 앉은 흑색공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덤덤히 그를 내려다볼 따름이다.
“무릎 꿇으십시오.”
침묵 끝에, 흑색공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무릎 꿇어라.
그 말에 성검사의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졌다.
“지금 공작께서 무슨 짓을 하는지──!”
“제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
흑색공이 되물었다.
“무릎을 꿇으라고 했습니다, 백작.”
“…….”
적막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전쟁 영웅이자 황제의 가장 ‘충직한 검’으로 평가받는 성검사조차,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압감.
전력을 다해 맞서도 승산을 헤아릴 수 없는 상대다.
하물며 이곳은 그의 영지다. 마법사에게 있어 ‘영지’란 것은, 귀족으로서 다스리는 땅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흑색공은 명분을 쥐고 있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헤아린 성검사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굴복의 증거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평화를 위해 백작님을 불렀습니다.”
무릎 꿇고 있는 성검사를 향해, 작센 공작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제가 간곡한 마음으로 부탁드리건대…….”
무척이나 덤덤하게.
“작센의 아이들에게 또다시 손을 대려 했다가는.”
작센의 아이들.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결코 공작 가의 핏줄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제 이름에 맹세코, 브란덴부르크 가의 일족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겁니다.”
아마 이 세상에, 죽여버린다는 말처럼 그 무게가 진실하게 전해지지 않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흑색공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뱉는 그 말은, 결코 겁박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말이 가진 무게에는 성검사조차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흑색공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고된 여로에 지치셨을 테니, 부족하나마 성의 시종들이 백작님을 모실 겁니다.”
“……공작 각하의 넓은 아량에는 참으로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성검사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하오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송구하게도 이 이상 공작령에 체류하기란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러십니까.”
공작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그것참, 무척이나 유감스럽군요.”
작센 공작이 대답했다. 그야말로 남의 일처럼.
“가시는 길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요.”
공작의 비아냥 앞에서, 성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당장에라도 땅바닥을 박차고 칼날을 휘두르고 싶다는 증오가 솟구친다.
그러나 그 증오 이상으로 성검사의 심장을 억누르는 것은, 공포였다.
제국의 통일 전쟁 당시, 이 남자가 보여준 어둠의 실체를 기억하고 있기에. 흑색공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자이기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공포.
“……공작 각하의 호의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재차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 *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증오스러운 남자의 얼굴.
데일이 ‘처음으로’ 성검사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가슴을 옥죄는 것은 뿌리 깊은 증오였다.
샬롯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그리고 두 사람의 앞에서, 작센 공작은 보여주었다.
데일의 아버지로서,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이자 제국의 공작으로서, 작센 가의 이름에 걸맞은 위엄과 경고를.
흑색공의 이름이 갖는 무게를.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황제파(Ghibellines)의 가장 충실한 심복 중 하나였다. 제아무리 작센 공작이라 할지라도 쉬이 손을 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리라.
그럼에도 작센 공작은 그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경고를 꺼내 들었다. 북부의 통치자, 작센 공작의 이름으로.
‘황제파의 심복을 상대로 아버지가 보여준 모습은, 제국 전체를 들썩이게 할 도화선이 되겠지.’
처음에는 아주 작은 불씨로 시작해서, 그러나 그 불씨가 장작과 기름을 먹고 커져 나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성검사의 목을 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데일로서는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그리고 내 손으로 제국이란 나라를 무너뜨린다.’
* * *
제국에는 달리 이름이 없었다.
이 지상 대륙에 유일무이한 국가이며, 그렇기에 보통의 명사가 아니란 이유에서.
그저 과거에 사멸한 제국들과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제3제국(Drittes Reich)’이란 호칭을 쓸 뿐.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작센 공작의 집무실.
그곳에서, 세피아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세피아 님에게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침묵하는 세피아를 향해 작센 공작이 말을 잇는다.
“따라서, 제 제의에 결코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
“부디 편하게 결정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세피아는 얼마 전 공작령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검사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시프 길드의 습격을 받은 데일이 무사히 그들을 물리쳤을 때. 소중한 제자가 무사하다는 다행감도 잠시였다.
그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프 길드의 시체들을 보고, 세피아는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장을 모조리 토해내고 어둠의 꼭두각시가 된 시체. 수십 발의 작은 대포알에 맞은 것처럼, 몸 전체가 짓이겨지고 구멍이 송송 뚫린 시체.
그것이 고작 아홉 살 어린아이의 손에 의해 펼쳐진 작품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는 제자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세피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가르침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흑색공이, 세피아에게 작센 공작 가의 ‘수석 자문관(Chief Adviser)’ 자리를 제의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작센 공작의 제의를 수락하는 시점에서…… 세피아는 데일의 일개 가정교사란 직함을 넘어, 작센 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은자(隱者)로 사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격랑처럼 요동치는 세속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일.
“데일의 재능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세피아 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센 공작이 말을 이었다.
“오롯이 저 하나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지요.”
“…….”
침묵 끝에, 세피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데일이 장성했을 때, 제국과 대륙 전체에 가지고 올 파급력을 상상한다. 그 아이가 이 세상에 덧씌우게 될 진정한 ‘자신의 세계’를.
그렇기에 망설임의 여지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백 년 가까운 삶을 살아온 세피아에게 있어, 그것은 어느 때보다도 막중한 사명감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 * *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성검사가 흑색공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현요 세피아가 작센 가의 자문관이 되었다는 소식이 제국 전체에 퍼져나갈 무렵.
어느덧 데일은 수(水) · 암(暗)의 이중 속성을 2서클 마스터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샬롯과 순수하게 검을 맞대는 대결의 승률은 점차 5할로 수렴하게 되었다.
그즈음, 어린 데일에게 열 살의 생일이 다가왔다.
그리고 데일의 열 살 생일을 공식적으로 축하하기 위해…….
‘황제의 사람들’이 공작 가를 찾겠다는 서신이 도착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