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4화 (14/301)

14화

* * *

작센 공작의 집무실.

그날, 샬롯 오르하르트가 공식적으로 작센 공작 가를 섬기는 시녀가 되었을 때. 작센 공작은 그 철없는 소녀가 어떻게 그토록 올곧은 결의를 품게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날, 너와 그 아이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신검의 딸, 샬롯 오르하르트.”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아버지께서 헤아리는 것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호오.”

그 말에 작센 공작이 즐겁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작센 공작이 아무리 사람이 좋다고 하나, 동시에 그는 제국 제일의 대귀족이기도 하다. 그 자리는 절대 덕망 하나로 유지할 수 있는 직위가 아니다.

충신의 어쩔 수 없는 부탁이나 오르하르트 가의 딱한 사정 하나에서 결정을 내릴 정도로, 작센 공작이란 남자는 무르지 않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저는 샬롯 양과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

“작센 공작 가의 이름으로 그녀를 보호해줄 것이란 약속입니다.”

“고작 그 아이의 처지를 동정해서 작센 공작 가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냐?”

작센 공작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동정이 아닙니다.”

데일이 고개를 젓는다.

“그녀는 신검이라 불리는 자의 피를 잇는 유일한 딸입니다.”

데일이 대답했다.

“샬롯 양이 설령 그 사실을 끔찍하게 증오할지라도, 그녀의 ‘쓸모’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신검의 피. 그리고 여자의 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가치. 성검사의 추악하기 그지없는 욕망을 떠올리며, 흑색공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기에 우리 공작 가는, 그 같은 악의에서 샬롯 양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대가 없는 호의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지?”

“한 자루의 신검(神劍)입니다.”

성검사가 샬롯을 통해 ‘신검의 아이’를 욕망할 때, 데일이 바란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심플한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 ‘신검에 가까운 존재’가 데일의 앞에 있었으니까.

자신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어린 신검의 딸.

“훗날의 우리 공작 가를 위해 휘둘러질.”

그 말을 듣고, 작센 공작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한 사람의 기사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 자신의 검 그 자체로 무명을 떨치는 것.

둘, 진정으로 자신이 충성할 수 있는 주군을 섬기는 것.

셋, 자신의 유지를 잇고 검을 물려줄 좋은 제자를 가르치는 것.

그 점에 있어 헬무트 블랙베어 경은 실로 축복받은 기사라 할 수 있으리라.

대륙 칠검, 광검(狂劍)의 별호를 가진 기사. 작센 공작 가를 위해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기사.

끝으로──.

카앙!

공작 가의 신동, 작센의 데일이 손에 쥔 스틸레토를 빙글 돌려 역수로 고쳐 잡는다. 고쳐 잡는 즉시 내리꽂히는 그 일격을, ‘샬롯 오르하르트’의 레이피어가 비스듬히 비껴냈다.

비껴내기 무섭게, 스틸레토의 칼날이 재차 뱀처럼 휘감겼다.

그러나 이 이상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샬롯의 레이피어가 집요하게 검로를 가로막는다.

어린아이 둘의 싸움이기에 강(强)을 기조로 삼는 기사들의 박력은 없다. 그럼에도 그 이상으로, 고도의 암살자들이 맞붙는 것 같은 기교와 속도가 느껴졌다.

빠르고, 일검 하나하나에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가 담겨 있다.

‘정녕 이것이 아홉 살 아이들의 대결이란 말인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할 말을 잃는 것은, 작센 가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일의 재능을 향해 가지는 감정은 이미 익숙하다. 그러나 저 어린 소녀는.

‘역시 신검의 딸이다.’

자신의 옛 은사이자 신검이라 불린 바델 경의 검을 떠올리며, 헬무트 블랙베어 경이 숨을 삼켰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걸까.’

샬롯 오르하르트.

정식으로 검을 배운 일조차 없이, 레이피어 한 자루를 쥐고 홀로 터득한 자기류(自己流).

그 후로 몇 차례의 검이 맞물리기 무섭게, 결국 데일의 스틸레토가 샬롯의 레이피어를 제압하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 났다.

“훌륭했습니다, 샬롯 아가씨.”

그 모습을 보며 헬무트 경이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입에 발린 칭찬 같은 것은 됐어요, 헬무트 경.”

그러나 샬롯은 패배의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당돌하게 되물었다.

“제 부족함이 뭐죠?”

샬롯의 재능은 뛰어나다. 그러나 데일의 수준에 비할 바는 아니다. 아니, 애초에 데일의 그것은 이미 ‘재능’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

그럼에도 헬무트 경은 알 수 있었다. 마도(魔道)를 걸을 데일과 다르게, 오로지 검도(劍道)를 걷게 될 샬롯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게 될지.

두 사람이 순수하게 검으로 맞붙을 때의 승패가 뒤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샬롯 아가씨, 레이피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찌르기요. 샬롯이 대답했다.

“틀립니다.”

헬무트 경이 고개를 저었다.

“레이피어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다리입니다.”

두 다리. 레이피어의 핵심은 스텝(Step), 다시 말해 보법이다.

“그러나 데일 공자님께서는 샬롯 아가씨의 찌르기를 비끼는 동시에, 틈을 놓치지 않고 거리를 좁히셨죠.”

헬무트 경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샬롯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중하고 냉정하다.

제대로 검의 교육을 받은 일조차 없이 벌써 이 정도 경지다. 그렇기에 실력 있는 검사 밑에서 제대로 된 배움을 시작하는 순간, 화려하게 꽃필 그녀의 검무를 떠올린다.

신검의 재능을 가진 소녀, 샬롯의 재능을 꽃피우는 것은 바로 헬무트 경의 몫이었다.

데일과 샬롯.

이들 중 한 명의 아이를 제자로 맞이하는 것도 보통 기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러나 헬무트 경은 바로 이 두 아이의 검술 스승을 맡고 있다.

작센 공작 가의 충신이자, 광검 헬무트 블랙베어 경. 그는 대륙에서 가장 축복받은 기사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 * *

구 튜토니아 기사국의 수도성, 말보르크.

그리고 지금은 전쟁의 공적을 치하하여, 제국군 제1군단장 브란덴부르크 대백(大伯)에게 하사된 그의 거성.

“오르하르트 가의 영애가 작센 가에 몸을 의탁했다는 내용입니다.”

밀사의 보고를 듣기 무섭게,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손에 쥔 유리잔을 내팽개쳤다.

“그 망할 계집이 선수를 칠 줄이야……!”

쨍그랑!

욕지거리를 내뱉고 나서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곁에는 여느 때처럼 성검 뒤랑달이 순백의 이채를 내뿜고 있다.

백작의 얼굴에서, 참을 수 없이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아, 사랑스러운 나의 뒤랑달(Durendal).’

용사의 등에 칼날을 꽂아 넣은 바로 그 검.

‘아아,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나의 피앙세여.’

성검의 이채를 황홀한 듯 바라보며, 백작이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조금 더 기다려주시오, 나의 사랑.’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나서, 백작이 다시금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 나가는 즉시 시프 길드를 찾아라.”

일그러진 집착에 가득 찬 목소리로.

“천금이라도 지급할 테니, 액수에 개의치 말고 실력자들을 꾸려 작센 공작령으로 보내도록.”

* * *

심장을 따라 회전하는 마나의 흐름을 자각하고, 그 흐름이 일정한 환형 루트를 구축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린 후.

새겨진 마나 고리의 형태를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것이 바로 2서클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참 쉬웠다.

“됐어요.”

“……!”

데일이 새 서클의 존재를 태평하게 대답하자, 세피아는 놀란 듯 자신의 귀를 쫑긋 세운다.

그러나 심장에 하나의 서클을 추가하는 것은, 아무리 하위 서클이라 해도 어림잡아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소위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어린 마법사들이, 마탑의 부속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시점…….

다시 말해 최초의 마나 서클을 새기는 나이는 열 살 남짓.

그로부터 아카데미 졸업에 필요한 3서클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일은 다시 10년 전후. 빨라야 스물이란 소리다.

그렇기에 10대 끝자락에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으로도 ‘영재’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8살에 마도를 걷기 시작한 데일이 2서클 마법사가 되는 데에는, 고작 1년이 걸렸을 따름이다.

영재나 수재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천재(天才)의 영역.

데일이 손을 뻗는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마나 고리가 각각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통상 마법사들의 서클 회전률은 300rpm(회전체의 분당 회전수).

1분에 300차례 회전시켜 마력을 생성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이 수치에 이르러야 비로소 ‘다음 서클’을 확장할 자격이 된다.

그러나 데일의 경우, 지금 시점에서 최초로 각성한 제1서클의 회전 속도는 2,000rpm.

그 위에 갓 생성한 제2서클의 회전 속도는 400rpm.

새로운 서클을 확장하자마자 ‘다음 경지’를 노릴 수 있는 수치를 충족하고 있다.

“그럼 시험 삼아…….”

두 개의 서클에서 생성되는 마력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온다.

굳이 발음하지 않고, 무의식중으로 자신의 심상을 떠올리며 ‘아이스 불릿’에 새로운 수식을 투영한다.

총알이 될 얼음의 분자 결합을 강화해 중량과 내구력을 높이고, 보이지 않는 대구경 총신을 그려 탄체의 회전력과 운동 에너지, 탄속을 강화한다.

철갑탄(Armor Piercing Bullet).

‘화염 마법을 더하지 않는 이상, 고폭소이탄까지는 무리겠지.’

타앙!

시험 삼아 방출된 아이스 불릿이 허공을 갈랐다. 새 수식을 투영한 강화 버전을, 그것도 무영창으로.

‘뭐지?’

아이스 불릿을 쏘고 나서는, 데일 자신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철갑탄의 메커니즘을 투영하기가 쉬웠나?’

쉬워도 너무 쉽다. 처음 아이스 불릿을 사용할 때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고작 하나의 서클을 추가한 것으로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를 현실에 투영하는 작업이 몇 배는 쉬워진 느낌이다.

──마법사가 자신의 심상을 이 세계에 투영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명확해야 하며, 그것을 그리기 위한 화가의 그림 실력도 중요하다.

그중에서 ‘서클’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미술 도구의 역할을 한다.

자신의 심상 세계를, 이 세계에 덧씌우기 위한 필터이자 매개체.

아무리 그림 실력이 뛰어나도 물감이나 붓 없이 수채화를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렇기에 곧 서클의 숫자가 마법사의 척도로 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폭이 넓어진 시점에서 데일의 성취는 제곱의 제곱을 곱하는 것 같은 속도를 내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화가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색(色)을 하나씩 더해 나가는 것처럼.

“배우는 것이 빠르구나.”

그 모습을 보며 세피아가 조용히 웃었다.

데일이 가진 재능에 두려움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 이상으로, 세피아는 데일을 믿기로 했다.

──오크 무리 앞에서 펼쳤다는 무용담이나, 공작성에 새로 들어온 오르하르트 가의 영애까지.

적어도 이 아이는 자신이 가진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데일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엘프 마법사, 세피아의 결심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