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매일 새벽 공작 가의 기사들과 수행에 힘쓰는 그곳에서, 데일은 한 자루 칼을 꺼내 들었다. 기사들의 부무장으로 애용되는 스틸레토(Stiletto)였다.
빙글 칼자루를 돌려 고쳐 잡고, 가볍게 그립감을 시험한다.
‘딱 적당하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진검이다.
마찬가지로 데일과 맞서는 소녀 ‘샬롯 오르하르트’의 손에는, 서슬 퍼런 레이피어가 들려 있다.
진검 승부. 그러나 데일의 기준에서는, 결국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마법을 쓰지도 않고, 데일의 진짜 무장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 망토’는 말할 것도 없다.
‘나랑 대결을 해줘.’
소녀의 입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온 순간, 데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성검사의 악취미에 대해서는 그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오르하르트 가의 두 모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째서 이곳 작센 공작령까지 찾아왔는지. 그리고 눈앞의 소녀가 어째서 이토록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공작 가의 천재를 쓰러뜨리고, 자신의 힘으로 오르하르트 가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
데일의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나, 결국 현실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발상이다.
“전력을 다해서 덤벼.”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그렇기에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금발의 어린 소녀, 샬롯이 처해 있는 진짜 현실이 얼마나 혹독하고 차가운지. 그녀의 삶에 끝없는 겨울을 가지고 온 당사자로서.
타앗!
샬롯이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하고, 칼끝에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를 담아.
‘……!’
빨랐다. 아이의 몸놀림이라고 믿을 수 없는 속도.
‘미약하나마 오러를 활용하고 있다.’
천부적으로 전투의 감각을 갈고닦은 데일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사가 심장의 서클을 통해 마력을 생성하고, 그 힘으로 세상의 이치를 덧씌우듯이. 체내에 오러를 축적한 기사들 역시, 그 힘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가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신검의 딸이란 이름과 자부심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카앙!
칼자루를 쥐고 쇄도하는 움직임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데일이 레이피어의 찌르기를 흘려내기 무섭게, 샬롯이 손목의 스냅을 통해 검로를 뒤틀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고 튕겨 나가며, 다시금 맞부딪치는 일체의 ‘흐름’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물속의 물고기가 수중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처럼.
레이피어란 무기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움직임. 천부적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전투의 감각.
‘내가 압도하고 있어!’
끝없이 퍼붓는 공세를 튕겨내고, 그럴 때마다 다시금 스냅을 꺾어 집요하게 파고드는 레이피어의 찌르기.
샬롯의 입가에서 일순, 승리를 확신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
그럼에도 하늘이 준 재능의 소유자란 점에서는, 데일 역시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데일이 가진 가장 커다란 강점이란 결코 ‘하늘이 준 것’이 아니었다.
일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오며 갈고닦아진 경험과 지혜. 고작 두 자릿수 나이도 못 채운 핏덩어리가 하루아침에 범접할 경지가 아니다.
샬롯의 레이피어에서 끝없이 흩뿌려지는 검영이, 끝내 데일에게 도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끝없이 공세를 가하는 자신의 검을 막기 급급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자신을 맞받아치는 데일의 표정에는 일말의 흐트러짐 하나 없다. 게다가 아까부터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역습을 넣지 않아……?’
오로지 샬롯의 공격을 방어하며, 그 이상의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있다.
여유가 느껴졌다. 검사로서 시종 자신을 압도하고 있다는 여유.
‘어째서 닿지 않는 거야!’
칼끝에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가 조금씩 옅어진다. 차가워야 할 평정심이 점차 동요하며 흐트러진다.
‘네 아버지는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였단다.’
샬롯이 태어날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샬롯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대륙 제일검, 신검 바델 경의 무용담.
작센 공작 가의 장남에 대해 떠들어대는 호사가들의 말을 듣고, 샬롯은 코웃음을 쳤다.
검과 마법에 있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 신동이라고?
‘나는 신검의 딸이야.’
그러니까 절대 검으로는 패배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어야 했다.
오러를 활용하지도 않고, 심지어 심장에 서클을 새겨넣은 ‘마법사’에게, 검으로 압도당하고 있다.
기사국이 멸망하고 나서, 조국을 버린 ‘제국파 귀족’들은 오르하르트 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어린 샬롯조차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가세는 빠르게 기울었다. 하루가 멀다고 시종들의 수가 줄고 집의 재물들이 사라져갔다.
그럴 때마다 샬롯은 어머니가 해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그녀의 아버지.
신검(神劍) 바델 오르하르트.
이제는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신이 ‘오르하르트 가’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자랑스럽고 긍지 높은 신검의 딸로서.
평정심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카앙!
어느덧 샬롯의 손에 들린 레이피어가, 빙글빙글 하늘을 날았다. 빙글빙글 하늘을 날고 나서, 레이피어가 샬롯의 발밑을 향해 세로로 내리꽂혔다.
“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어느덧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다.
데일의 스틸레토가 처음으로 넣은 일격.
“어째서…….”
그 일격에 승패가 정해진 것이다.
“어째서 이길 수 없는 거야……?”
발밑에 세로로 꽂혀 있는 자신의 레이피어를 보며,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일찍이 신검 바델 경께서는.”
데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계의 용사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결 끝에, 함께 숨이 끊어졌다고 했지.”
거짓말이다. 전생의 데일, 이계의 용사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신검 바델 경에게 승리했다. 그저 그 후의 이야기가, 제국의 입맛에 따라 멋대로 와전되었을 따름이지.
“그 괴물 같다는 용사와 끝내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필시 대륙 제일의 기사였을 거야.”
“…….”
그 말에 샬롯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이 세계에서 전생의 데일──‘이계의 용사’를 두고 하는 말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제국의 영웅, 사냥개, 애국자, 도살자.
그러나 적어도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한 가지는, 그가 괴물처럼 강하다는 사실이다.
신검 바델 경은 바로 그 괴물과 맞섰던 이들 중 가장 강한 자였다.
성검사 따위는 감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강하고 긍지 높았으며, 진정한 고결함을 가진 기사. 그렇기에 ‘5할의 진실’을 데일이 입에 담았다.
“네가 신검의 딸로서 갖는 긍지는 잘못되지 않았어.”
덤덤히 그녀를 긍정하며.
“그러나 지금의 너로서는, 절대 ‘그 남자’에게서 오르하르트 가를 지키지 못해.”
긍정하고 나서, 자신의 손으로 가져온 냉혹한 겨울을 말해주었다.
“너는 신검이 아니고, 성검사의 검은 지금의 나보다 몇십 배는 더 강하니까.”
“몇십 배……?”
거짓말이 아니다. 적어도 그 남자가 ‘지금 이 시점의 데일’보다 강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아, 아아…….”
그날, 짐승처럼 추악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샬롯은 검을 쥘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켜준 것은 그저 슬플 정도로 애처로운 어머니의 애걸이었다.
무엇 하나 지킬 수 없었다. 그것이 힘없는 몰락 귀족의 말로였으니까.
“그럼 나더러 어떡하란 거야…….”
샬롯이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이대로 가문을 지킬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터져 나오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는 여자아이의 모습.
“내가 여자애고, 힘도 없고 강하지도 않으니까…….”
방금까지 날카롭게 벼려진 검사의 냉정함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나약함.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데일이 나직이 입술을 깨물었다.
“훗날 ‘레이디 샬롯’의 검은.”
깨물고 나서, 데일이 말했다.
“지금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림자 망토가 있다고 해도,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데일에게 검사로서의 최대치는 명백하다.
그러나 이 소녀는 다르다.
“복수를 바라지?”
“……!”
“그럼 내 손을 잡아.”
그렇기에 데일이 손을 내밀었다.
바델 경을 향하는 알량한 부채 의식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그날, 자신의 등 뒤로 칼날을 찔러 넣은 성검사의 조소를 떠올린다.
그 남자가 충성하는 제국이란 나라의 어둠을 떠올렸다.
“어째서…….”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뜻밖의 대답에, 샬롯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거린다.
“약속을 하나 하자.”
“약속……?”
“나 작센의 데일이, 공작 가의 이름을 걸고 ‘오르하르트 가’의 보호자가 되어주겠어.”
샬롯에게는 ‘검의 재능’이 있다. 설령 지금의 승부가 데일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고 할지라도.
“훗날의 네가 그 남자를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때까지.”
데일이 말했다.
“나와 작센 가문이 전력으로 너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줄게.”
“……무엇을 대가로?”
그러나 데일의 말에, 샬롯이 차가운 표정을 하고 되물었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 그렇기에 데일이 대답했다.
“네 손에 들린 검(劍).”
“……!”
미래의 그녀가 검의 재능을 꽃피우고, 진정한 의미에서 ‘신검의 딸’로 거듭났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훗날 나와 작센 공작 가를 위해 휘둘러지는 검이 되겠다고 맹세해.”
‘신종(臣從)의 맹세’를 통해, 그녀의 검이 데일을 위해 휘둘러질 것이다.
“이게 우리 사이의 약속이야.”
미래를 위한 투자. 그 말에, 샬롯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기사의 명예에 걸고 맹세할게.”
데일이 손을 뻗었고, 샬롯이 손을 내밀어 응답했다. 설령 그것이 어린아이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할지라도.
조용히 결의를 굳히며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검희 샬롯.
아버지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대륙 제일검이자 ‘신검(神劍)’의 이명으로 거듭날 소녀의 손을.
훗날 새로운 ‘작센 공작’의 곁을 보좌하며, 그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검이 될 여기사의 손을.
* * *
결투를 마치고 나서, 데일은 샬롯을 데리고 공작성의 홀로 돌아왔다. 자신의 결의를 아버지에게 말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어느덧 샬롯의 어머니와 데일의 아버지, 그리고 헬무트 경의 이야기는 얼추 정리되어 있었다.
“샬롯.”
신검의 젊은 과부, 바네사 오르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어머니로서,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서.
‘샬롯 오르하르트 양은, 우리 작센 가의 이름으로 보호받을 겁니다.’
자신의 부탁에 작센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었다. 이제 그 결정을 딸에게 말해줄 차례다.
아마 철없는 딸은 울며불며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떼를 쓰겠지.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검정 일색의 옷차림으로, 베일을 쓴 바네사가 샬롯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샬롯은 묵묵히 어머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듣고 나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
절대 어머니와 헤어지지 않겠다며 울고불고 떼를 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딸이.
제국의 대귀족 따위에게 보호받을 필요 따위는 없다며 고집부릴 것으로 생각한 딸이.
“저, 강해질 거예요.”
그저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 짧은 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작센 공작과 헬무트 경은 말할 것도 없었고, 바네사 역시 놀란 듯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결의를 지켜보는 데일을 향해서.
“훗날의 제 검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엄마와 오르하르트 가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데일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하게 샬롯의 결의를 바라볼 따름이다.
“저는 자랑스러운 신검의 딸이니까요.”
바네사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딸을 포옹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