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역대급 신동-12화 (12/301)

12화

* * *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는 데일의 일화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고 부풀어서 제국 전체를 내달렸다.

수천 마리의 오크 무리에 맞서, 한 사람의 기사를 구하기 위해 적진 앞에 선 작센 가의 장남.

당사자로서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낯 뜨거운 무용담은, 그러나 북부 공작령 전체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했다.

* * *

새벽녘 일찍부터 공작성의 기사들과 함께 하는 검의 수행.

“오셨습니까, 데일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삼가 공자님의 존체를 뵙습니다!”

스산한 새벽 공기를 뒤로하고, 데일을 보자마자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스릉!

일제히 자신의 검을 세로로 내리꽂으며.

평소 헬무트 경을 필두로, 가신 기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검에 매진하는 데일이다. 그 자체로 이미 공작 가의 귀하신 후계자와 기사의 벽을 넘어서는 신뢰의 행위이리라.

그러나 그날의 일을 계기로, 데일을 향하는 기사들의 예우는 일찍이 어느 때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데일이 가진 재능이나 공작 가의 후계자란 이유에서 비롯되는 존중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기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적들을 향해 말을 달린 공작 가의 장남.

물론 기사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아야 했던 작센 공작의 비정(非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흑색공은 자신의 부하들을 아끼기로 이름 높았고, 기사들 역시 그 같은 현실의 이치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이 세계에서 신분의 고귀란, 이계에서 온 데일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데일의 모습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작센 가는, 절대로 충성하는 검을 버리지 않습니다.’

설령 호사가들의 입을 타고 부풀릴 대로 부풀려진 이야기보다는 다소 초라할지라도,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느끼는 감격에 비할 바는 아니리라.

“에이, 다들 왜 그러세요. 쑥스럽게.”

그럼에도 데일은 그저 멋쩍은 듯 고개를 긁적거릴 따름이다.

“당당하게 가슴을 펴십시오, 공자님!”

이윽고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데일을 향해, 헬무트 경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자, 다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웃고 나서는 엄하기 그지없는 맹수의 모습으로, 손에 쥔 검을 고쳐 잡는다.

“훗날의 공자님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검을 더더욱 날카롭게 벼려야 하지 않겠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

헬무트 경의 외침에 기사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흉갑을 두들기며 검을 치켜들었다. 작센 공작이 걱정했던 것처럼, 데일의 온정은 결코 자신들의 검을 무뎌지게 할 수 없다는 듯.

그 이상으로 날카롭게 검을 벼리겠다는 일념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새벽녘의 아침을 달구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열혈이 따로 없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데일로서는, 참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미묘했으나.

* * *

대륙 칠검 헬무트 경의 검에 맞서 실전의 감각을 갈고닦고, 아티팩트 ‘그림자 망토’에 숙달되는 수행. 세피아에 의한 수계 마법의 교육. 끝으로 흑색공에게 암 속성 마법을 배우는 일까지.

어느덧 2서클의 완성을 앞둔 데일의 수행은 신속과도 같은 진척을 내고 있었다.

검과 마법의 수행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도 공작 가의 후계자로서 익혀야 할 것들은 끝이 없다.

데일의 하루는 그야말로 제왕학이란 이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혹독한 일정이었다.

적어도 그날 하루를 제외하고서.

“공자님, 손님께서 오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새벽녘 일찍부터 기사들과의 수행을 마치고 나서, 이내 데일을 맞이하러 온 것은 어린 하녀 ‘이브’였다.

“헬무트 경과 함께, 그레이트 홀로 오시라는 공작 각하의 말씀이십니다.”

“아, 응. 고마워.”

“벌써 때가 그렇게 되었군요.”

그리고 그 말에 잇달아 수행을 멈추고 검을 집어넣는 것은, 헬무트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작센 공작성에는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튜토니아 기사국 출신의 몰락 귀족. 신검 바델 경의 젊은 미망인과 아홉 살의 어린 딸이었다.

* * *

과거 용사에 의해 쓰러진 ‘바델 오르하르트’를 호명하는 이름은 수도 없이 많았다.

신검(神劍).

칠검의 하나이자, 그중에서 제일검의 칭호를 가진 자. ‘이계의 용사’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은 튜토니아 기사국 최후의 충신.

그 후 튜토니아 기사국이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고 나서──.

무가(武家)로 이름 높았던 오르하르트 가는, 말 그대로 몰락 귀족의 신세를 전전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작센 공작 가는 여전히 대륙 제일의 대귀족이자, 흑마법을 업으로 삼는 마법사 가문이다.

얼핏 보기에 일말의 접점도 없을 것 같은 두 일가를 이어준 것은, 바델 경과 함께 칠검의 이름을 가진 헬무트 경의 몫이었다.

“무리하기 그지없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자네가 기사의 길을 걷게 해준 은사라 하였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헬무트 경을 향해, 작센 공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부가 되신 오르하르트 가의 부인께서, 경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하셨지요?”

마찬가지로 공작 부부를 위해 준비한 옥좌 왼편에 앉아, 아내 엘레나가 되물었다. 세상모르고 천진하게 잠들어 있는 젖먹이, 데일의 여동생 ‘리제’를 품고서.

“그렇습니다.”

헬무트 경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옛적 일이라고 하나, 도움을 준 이들의 어려움을 모르는 체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딱히 대수로울 일도 아니란 것처럼 엘레나가 웃었다. 그러나 공작 부부와 헬무트 경의 대화를 경청하는 데일로서는,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또다시 엮이게 될 줄이야.’

신검 바델 경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누구도 아니고, 제국의 사냥개였던 자신이 직접 그 남자의 숨통을 끊었으니까.

그 후, 조국과 집의 기둥을 잃고 제국에 복속된 ‘오르하르트 가’의 운명이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오히려 9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오르하르트 가의 손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그레이트 홀 너머로 공작 가의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중히 모시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고, 머지않아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하르트 가의 두 모녀와 함께.

칠흑의 베일에 검정 일색의 옷차림을 한 여성. 그리고 말없이 어머니의 곁을 따르고 있는, 데일과 동갑내기의 어린 딸.

어머니와 딸 모두 허리춤에 비스듬히 찬 세검이, 일순 데일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귀족 여성용 레이피어(Rapier)다.

‘아무리 몰락 귀족이라고 하나, 시종 하나 없이 작센 공작성까지…….’

그 까닭에 귀족 여자의 몸으로 검까지 무장한 거겠지. 작센 가의 시종들을 제외하고, 달리 두 사람을 모시며 수행하는 이들이 없는 것이 그 증거다.

“바네사 오르하르트, 삼가 작센 공작 각하를 뵙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검정 옷차림의 여성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금발의 소녀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감추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어머니, 어째서 이깟 자들에게 고개를 숙이시는 거예요!”

“샤, 샬롯!”

그 태도에 검정 옷차림의 과부, 바네사가 당황하며 딸아이를 다그친다. 소녀의 새된 목소리에, 엘레나의 품에서 잠들어 있던 ‘리제’가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오시는 길이 험했을 텐데,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센 공작은 당황하는 일 없이, 덤덤하게 말을 잇는다.

“엘레나, 리제가 놀란 모양이니 침실로 데려가도록 하시오.”

“알겠어요, 당신.”

“그리고 데일.”

“예, 아버지.”

“샬롯 양에게 성의 구경이라도 시켜주려무나.”

이렇게 분위기가 얼어붙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내 엘레나와 데일을 급히 자리에서 물린다.

그것은 오르하르트 가의 딸, 샬롯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레이디를 에스코트해주는 것은 귀족의 의무이니.”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제법 복잡해질 모양이군.’

그러나 작센 공작의 말에도, 금발의 소녀는 당차게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다.

“누가 제국 귀족들의 말 따위를 들을 것 같아!”

“샬롯!”

다시금 바네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제야 비로소, 샬롯이라 불린 소녀가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한다.

비취색 눈동자를 따라 차오르는 눈물. 꾹 참고 또 참으려 해도,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

‘아무리 강한 체를 해도 결국 겁에 질린 여자애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몰락한 귀족 가의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소녀.

밤의 장막을 따라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 신검 바델 경의 아내는 뱃속에 이미 저 소녀를 품고 있었으리라. 데일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일순 정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데일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레이디 샬롯.”

이 이상 분위기를 망가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데일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부디 이쪽으로.”

일으키고 나서는, 샬롯이라 불린 소녀를 이끌었다.

* * *

공작성의 홀을 빠져나오자, 스산하기 그지없는 냉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아파.”

바로 그때, 울먹이며 침묵하고 있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비로소, 데일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빼앗은, 이 소녀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저항할 생각조차 품지 않는 가녀린 손목이었다.

“……작센의 데일.”

데일이 다급히 거리를 벌렸고, 금발의 소녀 ‘샬롯’이 데일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이 말하길, 제국에서 검이나 마법에 견줄 자가 없는 천재라고 들었어.”

그리고 나서는 호사가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부풀려진 데일의 ‘무용담’을 입에 담았다.

“수백 마리의 오크 무리를 상대로, 혼자서 자기 기사를 지키려 했다지?”

“……과장이 심해진 이야기야.”

“그래도 보통 기사들보다는 훨씬 강하지?”

샬롯이 되물었다. 내심 데일이 자신의 강함을 긍정하길 바라는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 수백 마리의 오크를 상대로 자기 기사를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수백 마리가 아니고…….”

그 말에 데일이 무용담의 실체를 정정해주려는 바로 그때.

스릉.

금발의 소녀 샬롯이, 레이피어의 칼자루 위로 손을 올린다.

“나랑 대결을 해줘.”

올리고 나서, 샬롯이 말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데일이 물었다. 그 말에, 샬롯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내 검이, 공작 가의 천재보다 낫다는 걸 증명할 거야.”

침묵 끝에 샬롯이 말을 잇는다.

“나는 자랑스러운 신검의 딸이니까.”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 남자에게서 오르하르트 가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어머니에게 증명할 거야.”

“그 남자?”

샬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

“……!”

끄덕이고 나서, 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전생의 자신을 향해, 등 뒤로 성검의 칼날을 찔러 넣은 토사구팽의 집행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증오스러운 이름을.

* * *

“그자는…… 제 딸아이를 범하려고 했습니다.”

대회당에 내려앉은 정적을 깨트리며, 검정 옷차림의 과부가 입을 열었다.

“아직 아이의 초경이 오지 않았다는 제 애걸을 듣고 나서야, 겨우 겁탈을 멈추었죠.”

그 말에, 헬무트 경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작센 공작은 평정을 유지하며, 묵묵히 이야기를 경청할 따름이다.

“필시 신검이라 불린 그이의 피를 잇는 자식일 테니, 딸아이에게 자신의 씨앗을 잉태시켜──.”

“……그 이상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이어지는 말에는, 제아무리 작센 공작이라 해도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우생(優生)의 욕망은 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망이다. 하물며 가계를 잇는 것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귀족의 경우에는 더더욱.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홉 살 소녀를 겁탈하고 그 아이가 가진 ‘신검의 피’에 자신의 씨앗을 심겠다는 발상은…… 응당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양심마저 저버린 짐승의 그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짐승으로 전락하는 일조차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신검의 피가 가지는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망국이 되어버린 조국에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고, 달리 도움을 청할 곳이라고는…….”

“무척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작센 공작이 심심한 위로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 딸아이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토록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그처럼 행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작센 공작이 달리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공작 각하에게 절대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신검의 젊은 과부, 바네사 오르하르트가 떨리는 말을 잇는다.

“부디 그 남자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추악한 마수를 뻗칠 수 없도록…….”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제 딸아이를, 작센 가의 시녀로 받아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