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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역대급 신동-5화 (5/301)

5화

* * *

저물녘 어스름과 밤하늘 어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눈 내린 새하얀 지평 너머, 지상에는 그보다 빠르게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데일.”

스승 세피아의 말에 데일이 팔을 뻗었다. 사령술을 통해 죽음에서 되살아나 있는 좀비 토끼. 그리고 그 토끼를 휘감고 있는 얼음의 갑주. 그 대상을 향해 의식을 집중하기 무섭게…….

쨍그랑!

토끼를 휘감은 프로즌 아머가 산산이 조각나며, 흡사 수류탄처럼 폭발했다. 무수한 얼음 파편들이 흩뿌려지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빙결 폭발.

폭발의 세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토끼를 휘감은 프로즌 아머가 부서진 직후, 갑주 아래의 얼어붙은 육골이 터져나갔다.

시체 폭발.

얼음 조각에 이어서는 체내의 뼛조각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흩날렸고, 이중의 폭발이 비로소 끝을 맺었다.

물 흐르듯 수(水) · 암(暗)의 이중 속성을 조화시켜 펼치는 터무니없는 기예.

“잘 해주었다.”

중장갑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족히 대여섯까지 일격에 보내버릴 수 있는 파괴력.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폭발 마법이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하나 숨겨져 있는 기교를, 세피아는 놓치지 않았다.

‘파편화를 통해 살상력을 극대화했다.’

데일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폭발물에 세열(細裂)을 가해, 외피를 잘게 찢고 파편 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21세기의 수류탄과 같은 이치임을, 세피아로서는 알 턱이 없었으나.

‘도저히 8살 아이의 결과물이라고 믿을 수 없는 정교함이다.’

마법이란 결국 사용자가 가진 심상의 구체화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수식(修飾)이라 불리는 의식적 자기암시를 통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마법의 개성과 형태’를 유도한다.

그리고 8살의 데일은, 전장에서 평생을 바친 전투 마법사들에 버금가는 ‘살육의 수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수백 년에 거친 전쟁을 통해 축적하고,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쌓아 올린 제국군의 전투 마법 교리 그 이상의 경지. 도대체 이 아이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선생님 덕이에요!”

그럼에도 이 아이는, 스승의 칭찬을 받고 또래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다. 세피아는 그 모습을 보며 무척 복잡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이쯤까지 하자꾸나.”

“네!”

바로 그때였다.

히이잉!

어스름 깔린 지평 너머에서, 말을 탄 일군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갑주 위로, 작센 공작 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서코트 차림의 기사들이었다.

얼마 전, 헬무트 경을 필두로 마왕령 쪽에서 발생한 던전의 공략을 위해 출정했던 밤까마귀 기사들이다.

“헬무트 아저씨!”

그 모습을 보고 데일이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두 사람을 지나치려던 기사들이, 급하게 기수를 돌린다.

“공자님, 그리고 세피아 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선생님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어요.”

데일의 말에, 헬무트 경이 놀란 듯 눈을 끔벅거린다.

“벌써 마법을 통달하기 시작하신 겁니까!”

헬무트 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에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정도에요.”

데일은 8살 아이답지 않은 겸손함을 유지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보다 헬무트 아저씨, 던전의 공략은 어떻게 되었어요?”

웃고 나서 데일이 되묻자, 헬무트가 자신의 흉갑을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번 던전 역시 무사히 공략되었습니다!”

“역시 아저씨예요.”

대륙 전체를 통틀어 일곱 손가락에 꼽는 검술의 보유자. 그리고 바로 그 기사가 이끄는 ‘검은 기병대’까지.

작센 공작령의 전력은 결코 흑색공의 사령술 하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헬무트! 훗날 공자님에게 이 대지를 무사히 물려드리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다해 작센 공작 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지요!”

“고마워요, 아저씨.”

헬무트 경의 충성스러운 모습에 데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헬무트 경이 다시금 말의 고삐를 고쳐 잡는다.

“나머지 일들은 공작 각하에게 보고를 올린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헬무트 아저씨.”

“예, 공자님!”

헬무트 경이 넉살 좋은 미소와 함께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그의 흑색 전투마가 갈기를 흩날리며 땅을 박찼다.

“훗날 물려받게 될 땅이라.”

그 모습을 보고 세피아가 덤덤히 중얼거렸다. 지평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산맥의 능선을 주시하며.

“참으로, 무척이나 넓은 땅이구나.”

* * *

그날 밤.

작센 공작의 집무실에는 헬무트 경과 작센 가의 집사장, 흑색 마탑의 장로들을 비롯한 가신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데일의 가정교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청색 마탑의 장로, 세피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데일의 수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장 처음으로 공작이 꺼내는 화제는, 역시나 그의 아들에 관한 물음이었다.

“사령술과 수계 마법 모두, 1서클 마스터를 이루었습니다.”

“사령술과 수계 마법이라니, 설마 이중 속성을……!”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흑탑의 장로가 놀라서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 이상 공자님에게 암 속성의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제 역량으로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세피아의 시선이 작센 공작을 향했다.

대륙 제일의 사령술사이자 흑마법사. 흑색 마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칠흑의 마탑주.

동시에 데일의 아버지.

그를 놓고 일개 청탑의 장로가 암 속성 마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우선 데일이 바라는 대로, 수계 마법의 지도를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의미를 헤아린 흑색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엘레나는 아들이 사령술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데일이 어둠의 마법을 희망할 경우,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세피아의 몫이 아니다.

“아내에게는 제가 다시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흑색공은 데일의 화제를 끝맺었다.

* * *

그날 새벽, 공작 부부의 침실.

“어머나, 늦게 오셨네요.”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을 향해 엘레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어요.”

“고맙소.”

미소 짓고 나서는, 포도주가 담겨 있는 잔을 내밀었다. 흑색공은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받아들였다.

“무척이나 좋은 소식이 있다오.”

아내 엘레나 이외에는, 좀처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는 상냥한 미소. 그녀 역시 그의 미소를 알기 전까지는, 제국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처럼 흑색공의 악명을 두려워했다.

“우리 아들에 관한 일이지.”

“데일이요?”

아들의 이름을 들은 순간, 엘레나의 표정에 화색이 감돌았다.

“현요께서 말씀하시길, 벌써 1서클의 마법을 완성했다고 하더군.”

“벌써 그렇게나!”

“그 아이는 내가 여태껏 보아온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는, 찬란한 재능을 갖고 있소.”

흑색공이 흐뭇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숨길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기쁨을 드러내며.

“역시 우리 아이는 예사롭지 않아요.”

“확실히 또래의 아이답지 않은 점들이 있지.”

그것은 천재라는 말로 형용하는 것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가끔 너무나 아이답지 않은 모습에 섬뜩함마저 일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예요.”

그럼에도 엘레나의 모습에는 흔들림 없는 어머니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우리의 아이지.”

그것은 흑색공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그렇기에 흑색공은 나직이 심호흡하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로서, 우리의 땅을 지키기 위한 힘을 가르치고 싶소.”

침묵 끝에, 흑색공이 입을 열었다.

* * *

며칠 후.

데일은 여느 때처럼 도시 바깥의 평원에서 마법의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체를 일으키고 냉기를 조종하는 일들. 수, 암의 두 가지 속성을 가다듬고 2서클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

그리고 여느 때처럼 세피아의 지도를 경청하고 있던 찰나였다.

저 멀리 도시 입구에서, 작센 공작 가의 문장을 새겨넣은 일군의 행렬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아침 흑색 마탑이 있는 네크로폴리스로 향하셨는데, 무슨 행차일까?’

데일이 일순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직후 마차에서 내린 그림자 앞에서, 데일과 세피아를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어, 어머니!”

데일의 어머니, 엘레나였다.

시녀들의 보필을 받으며 엘레나가 다가왔다. 데일이 일순 당혹을 삼켰고, 그것은 세피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마법을 배우고 있었니?”

“예.”

엘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데일에게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는 방금까지 죽음에서 되살아나 폴짝거리던 토끼가 보였다. 급히 소생을 해제하기는 했어도,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 토끼의 사체는 참으로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에, 엘레나 님. 이것은…….”

천하의 세피아조차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며 데일 역시 무어라 입을 열려는 찰나.

“네 아버지와 약속을 했었지.”

엘레나가 데일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결코 데일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느 때 이상으로 깊은 어머니의 자애를 머금고 있었다.

“그이가 일으키는 죽은 자들의 군대가, 어린 내게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엘레나는 결코 화를 내는 일 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이가 나에게 고백을 해왔을 때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단다.”

“어머니…….”

“그때의 나는 참으로 어리고 철없는 여자아이였지. 내 앞에서 당황하는 그이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구나.”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엘레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우리의 영지는 너무나도 많은 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침묵 끝에, 엘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의 자애 이상으로 굳은 결의를 담고서.

비록 엘레나가 금지옥엽처럼 자란 백작 가의 영애라고는 하나, 그녀 역시 엄연한 제국 귀족이다. 나아가 작센 공작 가의 안주인으로서 그녀가 말하는 ‘너무나도 많은 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데일은 그 숨겨진 진의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욕망의 아귀다툼으로 얼룩져 있는, 제국이란 나라의 추악한 실체.

“그 적들에 맞서 이 땅을 수호하는 것이 네 아버지의 힘이란 사실을, 내가 잊은 모양이구나.”

“…….”

“공작 가의 장남으로서, 네가 짊어져야 할 것들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 미숙함이란다.”

공작 가의 장남으로서 짊어져야 할 것들. 데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넓은 땅과 가문, 나와 네 아비, 그리고 너의 새로운 동생까지.”

“도, 동생이요?”

“여동생을 갖고 싶다고 했지?”

엘레나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 속에서 희미하게 약동하는 작은 생명을 느끼며.

“조금 늦은 생일 선물이란다.”

8살 맞은 데일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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