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 *
그날 밤.
피곤했던 하루를 마치고 데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기사단장 헬무트 경은 공식적으로 공략대를 꾸려 마왕령으로 향했고, 지금쯤 데일의 부모님은 아들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한창 힘을 내고 있을 것이다.
‘부부 금실이 보통 좋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데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정교사가 된 현요 세피아는, 그 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데일은 양모를 가득 채워 넣은 침대 위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심장을 타고 흐르는 마나의 흐름에 집중하며, 천천히 손을 뻗는다.
손바닥을 타고 일렁이는 마력의 기류가, 어느덧 으슬으슬한 냉기를 머금고 빛나기 시작했다.
‘우선 내 몸을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겸손하게 재능을 숨기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오늘 같은 실수가 더더욱 뼈저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피아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자신을 보며 경악하는 세피아의 시선을, 데일은 일찍이 경험한 적 있었다.
‘괴물로 여겨지고 싶지 않다.’
동시에 자신의 등 뒤로 뒤랑달의 칼날을 찔러넣은 성검사의 조소가 떠올랐다.
‘다음 생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이 될 것이다.’
엇갈린 바람.
후우웅!
의식이 흐트러지기 무섭게, 다시금 마력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
급속도로 주위의 기온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데일이 앉은 곳을 중심으로 실내 전체에 허옇게 얼어붙은 서릿발이 내려앉았다.
영하의 영하로 끝없이 이어지는 혹한.
황급히 의식을 집중하고 흩어진 평정을 다잡는다. 그러자 휘몰아치는 서릿발이 다시금 마력의 입자로 화하며 소멸했다.
‘그야말로 천부의 재능이다.’
평정을 다잡고 나서 깨닫는다. 그것은 전생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흑색공의 피를 계승한 지금의 혈육을 놓고 하는 말이었다.
전생의 심득이 개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의, 그야말로 시대가 내린 마왕의 그릇──.
* * *
새벽이 깊어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데일은 결국 방을 빠져나와, 오늘 아침 세피아와 함께했던 공작성의 중정으로 향했다. 새하얀 대리석 주랑(柱廊)을 가로지르며 마음을 다잡을 생각에서.
그리고 그곳에는 뜻밖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데일의 가정교사이자 6서클 마스터의 엘프 마법사, 세피아였다.
“세피아 선생님?”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냐.”
세피아 역시 놀란 듯 쫑긋 귀를 세웠다. 아마 데일처럼 밤 산책이라도 나온 것일까.
“그게, 잠이 오지 않아서요.”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들이 많겠지.”
참으로 아이답지 않은 대답이다. 그럼에도 세피아의 수정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8살이 된 것을 축하한다.”
“고마워요, 선생님.”
조금 늦은 생일 축하의 말. 데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마침 너에게 줄 생일 선물이 있다.”
“선물이요?”
“나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뜻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일을 향해, 세피아가 말을 이었다.
“나와 함께 찬찬히 배우고 싶은 마법을 알아보자고.”
애초에 몇 주 가까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한 일이, 하루아침에 끝을 맺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데일의 모습은 더더욱 놀라운 것들이었다.
이 아이의 재능은 위험하다. 훗날 이 아이의 마법이 악의로 가득 차서 휘둘러질 경우, 그 결과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일의 가정교사를 맡는다는 것은, 세피아가 상상한 이상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나와 함께, 네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심해보자꾸나.”
“선생님…….”
오늘, 흑색공과의 대화를 통해 세피아는 마음을 굳혔다. 데일의 아버지, 흑색공이 결심을 내렸듯이.
‘부디 현요 님의 지혜로 데일을 올바르게 이끌어주길 바랍니다.’
세피아의 손에 들린 낡아빠진 책이 바로, 그들 두 사람이 내린 결심의 증표다.
데일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 8살의 생일 선물.
그것은 『기초 사령술』 마법서였다.
* * *
며칠 후.
공작성을 중심으로 지어진 ‘작센시’는 명실상부한 작센 공작령의 주도(主都)이자, 제국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도시였다.
마름모꼴 쇄석을 채워 넣은 돌길 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데일 역시 그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시가 떠나갈 듯 거창하기 그지없는 요란한 의전 따위는 없다.
공작 가의 귀하신 공자님이 이토록 무방비하게 도시를 거니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정체를 감추고 데일을 호위하는 기사 두셋이 있기야 하다. 그러나 딱 그 정도다.
바로 데일의 믿음직한 가정교사, 세피아가 붙어 있는 까닭에.
새삼 세피아를 향한 공작 부부의 신뢰가 얼마나 높은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예!”
데일의 어린아이 같은 미소에, 세피아 역시 흐뭇한 듯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로브로 정체를 감춘 두 사람은 그대로 마구간의 말을 빌려, 도시 북문 바깥의 평원으로 향했다.
작센시의 북쪽은 마왕령으로 통하는 ‘하얀 산맥’과 이어져 있어, 보통 사람에게는 용무가 없는 장소다. 이따금 길드에서 의뢰를 수주한 용병들이 괴물을 토벌하러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시 말해 ‘괴물의 사냥터’란 뜻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네게 마법을 가르칠 것이다.”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키는 공작 가의 기사들을 뒤로하고, 세피아가 말에서 내린다. 데일 역시 그녀를 따라서 하마했다.
“이곳에서요?”
세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평지. 머지않아 세피아의 뾰족한 귀가 쫑긋하고 움직였다.
“아이스 볼트를 구사해서, 저것을 쏠 수 있겠느냐.”
저 멀리, 토끼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토끼를…….”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해본 경험은 있겠지.”
데일 역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적지 않은 사냥을 경험하고는 했다.
이 세계는 철저한 강자존(强者存)의 세계다. 아이들은 철이 들 무렵부터 짐승을 사냥하고 검을 휘두르며, 활을 쏘고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엘프에게 그 같은 말을 들으니, 다소 복잡한 심경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달리 주저할 이유도 없었으나.
──타앙!
심장의 서클을 따라 마나를 회전시켜, 가공한 마력을 손가락 끝에 싣는다. 서슬 퍼런 송곳 모양의 얼음 결정이, 총알 같은 속도와 파괴력을 머금고 내리꽂혔다.
토끼는 그 자리에서 움찔 몸을 떨더니 이내 움직임을 그쳤다. 즉사였다.
“같은 마법이라 해도, 그 형태가 술사에 의해 무궁무진한 개성을 갖는 까닭을 아느냐?”
그 모습을 보고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조금 어두운 목소리로.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마법의 본질이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란다.”
“…….”
“그렇기에 마법사는 필연적으로 마법을 통해 자신이 가진 ‘마음의 풍경’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
마법은 마나 입자를 매개로 삼아 이 세계에 투영되는 심상(心象)의 실체화다. 쉽게 말해,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라 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사람들이 ‘무슨 무슨 마법’이라 부르는 것들은, 엄밀히 말해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스 볼트니 파이어 월이니 하는 이름들은, 그저 ‘확고한 심상’을 공유하기 위한 의식적 약속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바로 그 심상을 뜻대로 통제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의 정신을 갈고닦는다.
자신의 마법이 추구하는 정신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가령 청색 마탑은 ‘조화에 의한 질서’를 중시하고, 적색 마탑은 ‘힘에 의한 질서’를 중시한다. 그 같은 사상이 물이나 불 따위의 형태나 현상으로 투영되며, 각 마탑이 쌓아 올리는 마법 체계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아직 어린 너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구나.”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세피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데일은 웃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의 진의를 헤아린 까닭에.
지금, 세피아는 바로 그 마음의 거울을 통해 데일의 ‘진짜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
데일의 마법이 추구하는 정신.
“──네 마법에는 생명을 빼앗는 재능이 있다.”
세피아가 말을 잇는다.
“처음 너의 마법을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다.”
예상대로 세피아는 이미 데일이 가진 재능의 형태를 간파했다.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세피아의 말은, 데일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너를 가르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선생님……?”
세피아의 수정처럼 파란 눈동자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는다.
“내가 너와 함께하게 된 것도 운명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말하고 나서, 세피아는 케이프 망토 속에 넣어둔 『기초 사령술』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
귀속 각인을 맺어야 하는 ‘마도서(Grimoire)’와 달리, ‘마법서’ 그 자체는 누구나 열람해서 마법 내용을 습득하고 수학할 수 있다. 그럼에도 데일에게 사령술의 비법이 담겨 있는 마법서를 주는 행위는, 절대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함께 수업을 시작하자꾸나.”
“네, 선생님!”
세피아의 말에, 데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몇 주 후.
싸늘하게 식은 토끼 한 마리가, 그대로 부르르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에 묶여 춤추는 꼭두각시처럼.
좀비(Zombie)가 되어 움직이는 토끼.
‘빠르다.’
데일의 성장을 지켜보며 세피아가 느끼는 것은 순수한 경이였다.
고작 몇 주 사이에 시체를 소생시켜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하다니.
사체를 일으키는 것은 사령술사에게 있어 기초 중의 기초다. 그렇기에 6서클 경지의 세피아에게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그러나 바로 이 기초를 익히기 위해서, 흑색 마탑의 풋내기 학생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에 가까운 수행이 필요하다.
대기 중의 냉기를 응축시키는 아이스 볼트와는 감히 수준을 달리하는 것이다.
아울러 데일의 성취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럼 다음으로.”
“알겠어요, 선생님.”
데일이 알겠다는 듯 손을 뻗었다. 다시금 그의 손끝에서 청색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죽은 토끼에게 마력의 실을 묶어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동시에, 그 주위를 향해 냉기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서릿발이 토끼를 휘감고 빙벽(氷壁)을 쌓는다. 얼핏 보기에는 토끼를 그대로 얼음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 싶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데일은 재차 마력의 실을 움직여, 능숙한 인형사처럼 좀비가 된 토끼를 조종했다.
토끼의 움직임에는 일체의 제약이 없다. 오히려 세피아가 시험 삼아 아이스 볼트를 날리자, 얼음의 벽은 세피아의 공격을 막는 갑주의 구실을 한다.
죽은 토끼를 휘감고 보호하는 얼음의 갑주. 1서클의 수 속성 마법, 프로즌 아머(Frozen Armor)다.
“드디어 선생님의 볼트를 막았어요!”
“그래, 훌륭하구나.”
데일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세피아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위력을 감소시켜 날린 아이스 볼트라고 하나, 데일이 ‘프로즌 아머’를 습득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방금 죽은 토끼를 보호하는 프로즌 아머는, 강철 갑주에 버금가는 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장세다.’
흑마법과 수계(水係) 마법. 그날 이후, 데일은 세피아에게 동시에 두 가지 계통의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제게 수 속성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암 속성에서 그치지 않고, 수 속성의 마법을 배우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데일의 의지였다.
세피아 역시 처음에는 망설였다.
동시에 양대 속성의 마법을 구사하는 듀얼 메이지라니.
가령 마탑의 장로쯤 되는 세피아가 사령술이나 화계(火係)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초심자가 동시에 수(水) · 암(暗) 속성의 마법을 배우겠다고?
처음에는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갖고 배워도 늦지 않다는 세피아의 말에, 비로소 데일은 또래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함께 나아갈 길을 찾아보자고 하셨잖아요.’
혹은 아이답지 않은 설득에 넘어갔다고 해도 좋으리라.
어차피 기초 수준의 마법을 두루두루 배워서 손해 볼 것은 없을 테니까. 처음에는 그 정도 생각에서, 흑마법과 함께 수 속성의 기초 마법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죽어서 뻣뻣하게 경화되고, 거추장스러운 얼음의 갑주를 휘감고 있는 토끼. 초심자에게는 몇 걸음을 움직이는 일조차 벅차리라.
그러나 얼음의 갑주로 무장한 좀비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주위를 뛰놀고 있었다.
수(水) · 암(暗)의 이중 속성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조합하며.
배우는 족족 모든 것을 흡수하는 스펀지. 한 가지 마법을 이 속도로 배워도 희대의 천재란 말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세피아는 무심코, 흑색공이 부리던 죽은 자들의 군대를 떠올렸다.
바로 그 군대가 얼어붙은 갑주를 휘감고 진격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무심코 등줄기를 훑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