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 *
아직 제국과 마족의 전쟁이 미처 끝나지 않았을 무렵. 용사였던 전생의 데일은 딱 한 차례, 흑색공의 위명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마족들의 간계로 제국군의 주력 부대가 발을 묶이고, 무방비하게 작센 공작령의 수도가 적들에게 노출되었을 때. 바로 그곳에서, 작센 공작은 덤덤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작센 공작성과 도시 일대를 포위한 오크 워로드의 대군에 맞서, 자신을 지켜줄 호위 기사 하나 없이 홀로.
당시 별동대로 급파되었던 전생의 데일은, 그날 자신이 본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칠흑의 로브를 흩날리며, 그가 손을 휘젓는 바로 그 순간.
쏟아지는 저물녘의 어스름이 스러졌다.
빛이 사라지고 나서는, 어둠의 군세가 강림했다. 불사의 어둠으로 이루어진 군마를 타고 쏟아져 오는 죽음의 기사들이.
절대로 쉬지도 멈추지도 않는 불사의 군대.
그것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전율이었다.
* * *
“공자님.”
자신을 부르는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데일은 조용히 눈을 떴다. 눈꺼풀 사이로 새벽녘 햇살이 스며들었다.
‘꿈이었나.’
이제는 자신의 아버지가 된 남자의 꿈.
“깨워줘서 고마워.”
데일은 이내 고개를 젓고 나서 감사를 표했다.
이브는 작센 공작 가에서 일하는 어린 하녀였다. 어린 나이라고 해도, 올해 8살을 맞는 데일에 비해서는 띠동갑에 가까운 터울이었으나.
8살.
벌써 공작성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아하니, 데일은 어렵지 않게 오늘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데일은 드디어 8살 생일을 맞는다.
좀처럼 귀족의 허례나 사교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흑색공조차, 자신의 가신과 귀족들을 소집해 성대한 생일을 준비했다.
공작성의 그레이트 홀(대회당).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이미 적지 않은 귀족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작센 공작에게 충성하는 북부의 귀족들.
“여덟 살이 된 것을 축하한다.”
엘레나는 공작 부부를 위해 준비된 옥좌의 왼편에 앉아,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무사히 자라주어 고맙구나, 데일.”
“어머니.”
데일은 여덟 살답지 않은 조숙함을 갖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죠?”
“잠시 용무가 생기셔서, 헬무트 경과 회의를 하고 계시는 중이란다.”
엘레나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기사단장 헬무트 경을?’
헬무트 경은 작센 가 직속의 ‘밤까마귀 기사단’을 지휘하는 단장이다.
적들에게는 통칭 ‘검은 기병대’란 악명으로 익숙한 전장의 파괴자들.
휘하의 기사단장을 급히 호출할 정도의 일이니, 필시 영지 내에 던전이 발견되었다거나 하는 일이겠지. 영지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작의 의무는, 설령 데일의 기념할 생일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회가 미뤄지는 사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네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단다.”
그러나 엘레나는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나직이 몸을 일으켰다. 소개해줄 사람? 데일은 눈을 끔벅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레나는 시녀들과 함께 영주성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홀에서 벌어지는 떠들썩한 사교를 뒤로하고, 엘레나는 아래층의 손님방을 향해 데일을 이끌었다.
“세피아 님.”
엘레나가 정중하게 노크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정중한 예우에 데일은 눈을 끔벅거렸다.
“실례했습니다, 부인.”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차분하고 투명한 미성이 새어 나왔다.
“소란스러운 곳은 익숙하지 않아서.”
데일은 순간 놀라서 숨을 삼켰다.
“인사하렴. 청색 마탑의 장로이신 현요(賢妖) 세피아 님이시란다.”
청색 마탑의 장로, 현요 세피아.
방에 있던 손님은 갓 처녀티를 벗은 것 같은 엘레나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앳돼 보이는 여성이었다.
흡사 수정처럼 차갑게 빛나는 미모. 그러나 사파이어색 머리카락 사이로 쫑긋 솟은 귀가, 겉으로 보이는 나이의 무의미함을 말해주고 있다.
마나의 사랑을 받는 종족, 엘프다.
“흑색공과 부인에게는 적잖은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세피아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엘레나는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우리 아이가 세피아 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어 황송할 따름이지요.”
세피아 님의 가르침? 그 말을 듣자마자 데일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다.
‘참으로 호화로운 가정교사를 고용했군.’
“저 아이가 데일이군요.”
청탑의 장로, 세피아는 어느새 진중한 눈동자로 데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이께서 체내에 미약하나마 마나 서클의 편린을 형성 중이라고 하더군요.”
벌써 몇 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러나 네 살, 다섯 살의 어린 나이는 재능의 날개를 펼치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데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자신의 능력이 ‘괴물’의 영역에서 ‘천재적인 재능’으로 격하(格下)되기에 적합한 시기를.
물론 그 시간을 마냥 허송세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사이 데일의 ‘수련’은 적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확실히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세피아는 당황하는 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엘레나는 데일이 사령술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데일이 가진 찬란한 마도의 재능을 썩히고 싶지도 않았으리라.
‘청색 마탑의 마법이라.’
데일은 결코 조급하게 여기지 않았다. 흑색공이 아버지로 있는 한, 어둠의 마법을 배울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올 테니까.
무엇보다 데일은 자신의 그릇을 이해하고 있었다.
보통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는 평생에 걸쳐 하나의 속성을 다루는 것조차 벅차다. 그러나 데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의 사랑을 받는 엘프이자 청탑의 장로야말로, 데일에게 있어서는 진기한 배움의 기회가 될 것이다.
‘배움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일개 청탑의 장로가 데일에게 가르칠 것이 얼마나 될지는 둘째 치더라도.
* * *
첫 수업은 생각보다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어머니 엘레나는 흑색공이 돌아올 즈음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잘 부탁하겠다, 데일.”
손님방에 홀로 남겨진 데일을 향해, 세피아가 생긋 미소 지었다.
청색 마탑의 장로이자 좀처럼 보기 힘든 속세의 엘프. 옅은 냉기마저 감도는 듯한, 수정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 사이로 쫑긋 솟은 귀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잘 부탁해요, 선생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작 가의 위세가 있기에 가능한 가정교사다.
전생의 데일은 기본적으로 검과 마법, 심지어 암기와 독술까지 가리지 않는 올라운더 타입이었다.
용사란 이름의 인간병기로서 그 어떤 형태의 전투에도 완벽한 임기응변을 위해서.
그 까닭에 청탑이 주력으로 삼는 수 속성 마법에도 아주 조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자신이 배운 것은 전투와 살상에 극도로 편중된 기형적 방식이었다. 그마저 육체에 온갖 개조 시술과 마력 각인을 때려 박아 새기는 무식한 방식으로.
지금의 데일이 배우는 것은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마법과는 거리가 멀다.
수 속성 마법들은 공격보다 방어와 교란에 특화되었으며, 그렇기에 청탑이 주력으로 하는 수계 마법의 기조는 크게 두 가지다.
무력화와 불살(不殺).
‘이것도 어머니의 바람일까.’
자식이 피를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엘레나는 청탑의 마법사를 초청했을 것이다. 아마 이 기회를 통해 장기적으로 청탑의 마법사가 되는 진로를 고려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데일은 그녀의 뜻대로 순순히 장래를 정할 마음이 없었다.
‘지금의 내 그릇은 예전과 다르다.’
아무리 전생을 계승해 높은 심득(心得)을 얻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데일의 그릇은 순수한 8살 꼬맹이다.
물론 흑색 마탑주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마법에 대해서는 배 이상의 재능을 갖고 있겠지.
그러나 결국 그 정도였다. 수십 년 가까이 갈고 닦은 SSS급 괴수 사냥꾼의 재능과 육체를 바탕으로, 제국의 온갖 인체 개조 시술을 받은 ‘인간병기’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기에 데일은 이전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깊은 심득을 바탕으로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히기 위해서.
‘욕심을 부린다 쳐도 검술과 두 계통의 마법이 한계겠지.’
하나를 암 속성 마법이라 가정할 경우, 남은 하나의 슬롯을 수 속성 마법으로 채우는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데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의 데일은 겨우 8살 어린아이다. 설령 청색 마탑의 장로를 스승으로 삼는다고 해봐야 당장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우겠는가? 아마 마나를 운용하고 마법의 기초를 가르치는 수준에서, 수 속성 마법 몇 가지를 배우는 데 그치리라.
게다가 지금의 데일은 아직 최초의 마나 서클을 완전히 형성하지도 않았다. 무엇 하나 당장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잠시 나와 바깥 산책이라도 하자꾸나.”
바로 그때, 유심히 데일을 지켜보던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데일의 가장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하고서.
“네, 선생님.”
달리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 * *
데일은 세피아와 함께 공작성에 마련된 중정(中庭)을 거닐고 있었다. 시린 냉기가 폐부 사이로 스며들었다.
“공기가 무척 서늘하구나.”
중정을 둘러싼 순백의 대리석 회랑을 가로지르며,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꼭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군.”
희미한 그리움이 감돌고 있는 목소리였다. 얼핏 짐작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그녀는 스노우 엘프(Snow Elf)일 것이다.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너의 의지인가?”
바로 그때, 세피아가 입을 열었다. 뜻밖의 질문에 데일은 일순 눈을 끔뻑였다.
“내게 마법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아이답지 않은 망설임이 엿보이더구나.”
“마법을 배우려는 것은 제 의지입니다.”
데일은 내심 정곡을 찔린 감상이었다. 적당한 핑계를 찾으려던 데일은, 이내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가 배우고 싶은 마법이 달리 있는 까닭에…….”
“암 속성 마법이겠지.”
세피아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흑색공이 자식에게 자신의 업(業)을 잇지 않겠다고 한 약속은 유명하다.”
흑색공과 엘레나의 연애담은, 여전히 대륙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화다.
“선생님께서는 흑색 마탑의 사령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엘프는 자연의 섭리를 중시하는 종족이다.
그렇기에 세피아 역시 내심 흑색공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망자를 되살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거기까지 말하려는데, 세피아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생각하느냐?”
“그,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죽음이 예정된 중병의 환자를 소생시키는 사제들의 신성(神聖)은, 자연의 뜻인가?”
그 말을 들은 순간, 데일은 세피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동족들은 내 뜻을 이해해주지 않더군.”
세피아가 짐짓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아득한 목소리로.
“그 덕에 참으로 풍파 많은 삶을 보내고 있지.”
“그 말씀은…….”
세피아는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특유의 폐쇄 사회를 지향하는 엘프가 어째서 속세의 한복판에 있는지, 데일은 얼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추방자.’
확실히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는 의중은, 보통의 고지식한 엘프들이 가질 법한 발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스승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녀의 진심을 엿본 데일은 비로소 확신을 품었다.
‘이 이상 굳이 나의 재능을 감출 필요는 없겠다.’
그렇게 데일이 확신을 굳히기 무섭게.
“그럼 가장 앞서 마나의 감응부터 시작할까.”
아스라이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뒤로하고, 세피아가 데일을 향해 몸을 돌렸다.
“흑색공께서 말씀하시길, 꽤 전부터 심장에 마나 서클의 편린을 형성했다고 했지.”
“예.”
그 후 세피아는 마법에 대해 아주 원론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이 세계는 마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드래곤 같은 고대의 존재가 아니고서야, 날것 상태의 마나를 아무런 필터링 없이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인간이나 엘프를 비롯한 종족들은, 마나를 체내에서 ‘마력(魔力)’의 형태로 가공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다.
즉 심장의 마나 서클은, 날것 상태의 마나를 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주는 ‘마력 발전소’다.
따라서 서클의 숫자가 곧 마법사가 가진 경지의 척도로 통하는 것이다.
“우선 네가 가진 서클의 편린을 완전한 환형(環形)으로 확장해, 1서클을 이루는 게 첫 시작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겠지.”
데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심장 주위로 회전시키는 수련부터 차차 시작하자꾸나.”
그 자리에서 세피아는 데일에게 마나를 운용하는 기초적인 요령을 전수해주었다.
“이 과정을 게을리 여기지 않고 성실히 거듭해야 한다.”
세피아의 설명을 듣고 나서, 데일은 그녀가 가르쳐준 요령을 따라 심호흡을 했다.
외부에서 마나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심장 주위로 마나가 회전하는 일정한 루트를 구축하고, 그것을 곧 고리 형태(서클)로 확장하는 작업.
“아무리 빨라도 몇 주 가까이 소요될 것이니, 그사이 나와 찬찬히 배우고 싶은 마법을 알아보자꾸나.”
정신을 집중하는 데일을 향해, 세피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데일이, 조용히 눈을 떴다.
“선생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느냐?”
세피아가 상냥한 스승의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궁금한 것은 사양하지 말고 이야기하란 듯이.
“됐는데요.”
“……?”
자신의 심장을 중심으로 확실하게 고정된 마나의 고리를 느끼며, 데일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