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유년기
이계의 용사.
마왕 발로르를 토벌하고, 대륙을 마족의 위협에서 구한 지구의 영웅.
그러나 이 세계의 사람들이 한성을 부르는 이명은 달리 있었다.
제국의 사냥개. 피도 눈물도 없는 도살자.
한성이 어느 날 갑자기 이계에 소환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제국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고대의 소환식이 발동했고, 지구의 SSS급 괴수 사냥꾼이자 인류 결사대의 총사령관이었던 한성은 이계에서 눈을 떴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그렇게 한성은 용사란 이름의 인간병기로 거듭났다.
마왕을 토벌한 제국은 그 길로 ‘이계의 용사’를 앞세워 대륙 통일 전쟁을 선포했다.
* * *
손에 들린 칼자루를 고쳐 잡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제국의 대륙 통일 전쟁이 끝자락에 이르렀을 무렵. 마지막까지 저항을 천명한 튜토니아 기사국의 수도성 말보르크.
밤의 장막을 따라 희끗희끗한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희고 어두운 겨울밤. 튜토니아 기사국의 충신이자 ‘대륙 제일검’의 무명을 떨친 남자, 신검(神劍) ‘바델 경’을 쓰러뜨린 직후의 일이었다.
푸욱!
등 뒤에서,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싸늘한 쇠붙이의 감촉이다. 가슴을 찢고 툭 튀어나온 칼날이 시퍼런 서슬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시발.”
목숨을 건 혈투 끝에 한성을 향해 돌아온 것은, 같은 제국군의 칼날이었다.
“수고했다, 이계의 용사여.”
성검사 브란덴부르크 백작의 성검 뒤랑달.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바로 등 뒤에서 휘둘러지는 아군의 기습을 피하기에, 한성의 육체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남 뒤통수나 칠 줄 아는 졸렬한 새끼들.”
한때는 용사의 이름으로 마왕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에는, 그저 제국의 야망을 채우기 위한 정복 기계가 되어야 했으니까.
마왕도 토벌했고, 제국이 그토록 바란 대륙 통일의 숙원도 이루었다. 그럼 그다음에는?
토사구팽이지.
“그대는 이곳에서 신검 바델 경과 명예로운 동귀어진을 택했고.”
브란덴부르크 백작이 입을 열었다.
명예로운 동귀어진이라고?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국을 위한 그대의 애국과 헌신은 영원토록 후세에 칭송될 것이다.”
“하, 대한민국 국방부도 울고 가겠구만.”
한성이 입술에 피를 머금은 채 조소했다. 손에 쥔 칼날이 당장에라도 백작을 도륙할 듯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는다.
그러나 칼자루를 휘두르려는 순간, 한성의 몸이 우뚝 정지했다.
그것은 금제였다.
백색 마탑이 자랑하는 맹약의 구속…… 기아스(Geas).
“개 같은 새끼들.”
제국의 용사, 이계의 사냥개를 조련하기 위한 목줄.
“누가 누구를 일컬어 개라고 칭하는 것이냐?”
그 모습을 보며 백작이 차가운 조롱을 내뱉었다.
“그래, 이 개보다 못한 새끼들아.”
한성이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방금 자기 손으로 쓰러뜨린 대륙 제일의 검사와 함께, 자신도 이 자리에서 목숨이 다할 것이다.
길었던 사냥이 끝이 났으니까.
이곳에 있는 제국군 제1군단의 총사령관, 브란덴부르크 백작은 바로 그 토사구팽의 집행자였다.
한성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눈이 수북이 쌓인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힘없이 눈을 감는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한성의 표정은 침착하고 고요했다.
자신을 저버린 제국을 향해, 그 흔한 저주의 말을 남기는 일조차 없이.
‘이계의 용사’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다음 생에는 헌신짝처럼 버려질 용사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이 되리라 다짐하며.
이윽고 생명의 불꽃 하나가 사그라지는 동시에, 한성의 체내에 삼켜진 작은 돌이 희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득남입니다!”
새하얀 눈송이가 흩날리는, 희고 어두운 겨울밤.
하나의 생명이 눈을 감았고,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눈을 떴다.
* * *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득남입니다!”
노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들겼다. 바로 직전까지 한성을 괴롭혔던, 성검 뒤랑달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여기는……?’
한성은 곧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제 몸을 가누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사방이 새하얀 빛으로 가득해서,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다. 의식이 마치 납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다.
자신이 터무니없이 작고 가벼운 존재가 된 듯한 감각.
바로 그때, 부드러운 포대기의 감촉이 한성을 휘감았다.
한성은 포대기 속에서 간신히 몸을 뒤틀어,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여인을 응시했다. 선명한 금발을 가진 묘령의 여성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이계의 용사로서, 한성은 적지 않은 제국의 유력자들을 알고 있었다.
‘분명 어느 백작 가문의 영애로 기억하는데…….’
“참으로 고생이 많았소, 엘레나.”
‘작센 공작의 부인이 된 백작 가의 영애, 엘레나!’
엘레나. 그 이름을 듣자마자, 한성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럼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남자는 설마…….
일찍이 한성이 마왕 발로르를 토벌한 직후, 북부 일대와 제국의 속주로 전락한 구 마왕령을 다스리는 대제후.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3대 공작 가문의 일원, 작센 공작이다.
그제야 비로소 퍼즐 조각이 맞추어지는 듯한 통쾌함이 찾아왔다.
‘전생이 무사히 성공했구나!’
사냥개의 목줄을 끊어내기 위한 비장의 수. 한성이 힘겹게 손에 넣은 아티팩트 ‘전생의 돌’이 무사히 제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그것도 제국에서 손에 꼽을 대귀족 가문의 장남이라니.
그러나 작센 공작의 진가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흑마법의 총본산이라 일컬어지는 네크로폴리스, 그곳에 있는 흑색 마탑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
흑색 마탑주.
다시 말해 작센 공작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감히 견줄 자가 없다는 사령술사이자 흑마법사였다.
그렇기에 붙은 이명이 바로 ‘흑색공(Lord Black)’.
작센 공작이 구 마왕령을 봉토로 하사받은 것 역시, 그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전생의 돌’은 기억과 의식을 보존한 채 영혼을 순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전생의 대상까지 직접 지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대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날지, 창부의 아이로 시궁창에 버려질지는 전적으로 운명의 영역이란 소리다.
그럼에도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수저를 입에 물었다.
‘살다 살다 금수저를 다 물어보는군.’
한성이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자니, 작센 공작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할멈,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지 않소.”
천하의 흑색공도 자식 걱정 앞에서는 별수 없는 모양이다.
“참으로 기묘하군요. 이토록 또렷하게 호흡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울지 않는 것은 흉조가 아니던가.”
“호흡이 안정되어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노파가 한성에게 다가섰다. 한성은 일부러 보란 듯 심호흡을 계속했다.
“하오나 공작 각하께서 염려하고 계시니…….”
짝!
엘레나에게 한성을 넘겨받은 노파가, 힘껏 볼기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울 때까지 엉덩이를 후려치셔야 합니다.”
한성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불완전한 젖먹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선택지란 그리 많지 않았다.
“참으로 완고한 아이로군!”
작센 공작이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의 고집을 빼닮은 거겠지요.”
엘레나가 어머니의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해볼게요.”
어머니가 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처녀티를 벗지 못한, 귀족 영애의 보드라운 손길이 한성의 볼기짝으로 향한다.
철들고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없는 한성은,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엉엉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 * *
작센의 데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란 말처럼, 그것이 두 번째 삶을 손에 넣은 한성의 새 이름이었다.
작센 공작 가의 장남, 데일.
공작 부부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으며 ‘데일’은 때를 기다렸다. 이따금 두 부부와 시종, 그리고 가신(家臣)들이 주고받는 제국의 정세를 귀동냥하며.
아티팩트를 통해 계승된 의식이 아무리 온전해도, 젖먹이의 육체는 그렇지 않았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인고의 시간. 그리고 인고의 시간 끝에, 데일에게 처음으로 허락된 것은 언어였다.
“어머나, 우리 데일 좀 봐요!”
엘레나는 여느 어머니들이 으레 그렇듯 ‘내 자식 천재론’에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주장하는 ‘내 자식 천재론’은 결코 어머니들 특유의 흔한 착각이 아니었다.
4살 나이에 제국 공용어와 귀족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일의 학구열은 경이로울 정도였으니까.
데일은 공작성의 서고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마나 감응의 기초와 응용』
『제국군 전술 마법 교범』
『마나 서클의 회전률과 마력 생성량의 상관관계』
『수식에 의한 마법 강화 이해』
『룬 마법 개론』
하루가 멀다고 원하는 책들을 황도를 비롯한 대륙 각지에서 공수받으며.
‘금수저가 좋기는 좋아.’
한 권의 책을 완독한 뒤, 데일은 낡은 책장에 등을 기대며 과거의 고향을 떠올렸다.
지구에서 괴수 사냥꾼의 재능을 각성하고 무기를 쥐었을 때, 전생의 그는 사명을 갖고 괴수들과 싸웠다. 오직 인류를 위해서.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용사란 이름 아래 쓰러뜨린 마족과 괴물 전부를 합쳐봤자, 제국의 사냥개로서 도살한 ‘인간’의 숫자 앞에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리라.
그렇기에 데일의 목적은 조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이 손으로 제국을 몰락시킨다.’
나직이 입술을 깨물며 결의를 다진다.
바로 그때였다.
후웅!
차갑게 벼려진 증오가 휘몰아치기 무섭게, 그의 발밑을 따라 선풍(旋風)이 발생했다. 마력의 소용돌이다.
‘아차!’
아직은 미숙한 네 살의 육체가, 감정의 격류에 이끌려 체내의 마나를 폭주시킨 것이다. 아직 공작 부부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나, 데일은 자신의 심장에 착실히 ‘마나 서클’의 편린을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후우웅!
폭주한 마나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동시에, 데일이 등을 받치고 있던 책장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사고 쳤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서고에서 힘없이 주저앉자니.
“──데일.”
등 뒤에서 낯익은 기척이 느껴진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것은 데일의 아버지이자 흑색공, 작센 공작의 목소리였다.
폭주한 마나의 소용돌이로 책과 책장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수라장. 데일은 순간 네 살의 처신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는 처신 따위를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방금 체내의 마나를 방출시킨 것이냐?”
“그게……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발밑에서 이상한 바람이 불었고…….”
데일이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자각하지 못하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그 모습을 보며 작센 공작이 놀란 듯 탄성을 내질렀다.
“벌써 체내에 마나 서클의 편린을 형성했군……!”
그야말로 경악에 가까운 탄성에, 데일은 내심 아차 싶었다.
어린 나이에 자연스럽게 마나와 감응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리 마법사의 피를 잇는 혈족이라고 해도, 네 살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이른 영역이다. 그렇기에 공작 부부 앞에서 비밀로 하고 적당한 시기를 기다린 것이다.
데일은 자신이 가진 재능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신동’과 ‘괴물’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 역시도.
“역시 나의 아들이다.”
그러나 걱정하는 데일에게 화답해준 것은, 아버지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흑색공의 미소였다.
“네게 사령술을 가르칠 수 없는 게 천추의 한이구나.”
흑색공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데일조차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천하의 흑색 마탑주가, 대륙 제일의 사령술사가 자신의 전공을 자식에게 전수하지 않겠다니?
“어째서요?”
데일이 다시금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네 어미에게, 우리의 자식은 내 업을 잇게 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단다.”
그렇게 말하는 흑색공의 표정에는, 못내 커다란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하기야, 어느 어미가 제 자식이 사령술사가 되길 바라겠냐마는.’
나이 차이가 작지 않은 엘레나에게 구애할 당시, 흑색공의 악명을 두려워한 그녀에게 약속한 내용이었다.
덤으로 결혼식 때는, 흑색공을 필두로 흑탑의 장로 모두가 순백의 옷차림으로 참석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센 공작은 제국 제일의 대귀족이다. 그럼에도 그가 일개 백작 영애를 위해 약속한 것들은, 흑색공이 보기와 달리 얼마나 순애보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4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물며 젖먹이의 육신에 갇혀,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헤아린 4년은 더더욱.
그렇기에 작센 공작 가에서의 삶은, 데일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을 깨닫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