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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99화 (99/100)

〈 99화 〉 후일담 ~ 에드윈 ~

* * *

(주의. 사지절단 등 불쾌한 요소가 있음

난 좀 아니다 싶으신 분들께선 부디 넘겨주세요....)

에드윈은 어쩌다 용사 루카와 만났던가.

용사는 언젠가 성녀와 마왕을 치러 떠날 터.

그러므로 에드윈은 세실리아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기에, 세실리아가 언젠가 성녀가 되어 용사의 파티에 합류하기 전에 먼저 용사 파티에 합류한 것뿐이다.

딱히 용사의 사명에 감화된 것도 아니고, 용사 루카라는 개인에 대해서 알고 있었거나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단순히 뒤늦게 합류한 세실리아에게­

우연이네­ 세실리아­

널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하고, 싸구려 삼류연극같은 대사를 한 번 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세실리아와 함께 여행을 하며 예전의 실수를 용서받고 사랑을 키워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애초부터, 에드윈에겐 루카가 안중에도 없었다.

용사가 이상한 가명을 달고 어디 모험가 길드에 '마왕성에 갈 모험가 구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공고를 올리고서 며칠째 지원자가 없어 썩고 있는 바보같은 녀석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도, 오히려 친해져서 파티에 들어가기 쉽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에도, 아직 어린 소년에 꾀죄죄한 행색. 보호자 역할을 하는 엘프는 조금 나아 보였지만, 아무리 봐도 마왕을 토벌하러 갈 용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파티에 들어간 첫날, 루카는 말했었지.

사실 저는 용사에요, 라고.

이미 뒷정보를 다 캐낸 에드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루카는 에드윈이 자기 정체를 알고 있었을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척 자랑스럽게 이어 말했던 것이다.

"에드윈 님이 제 처음이에요. 용사가 아닌 저를 도와주기로 하신 분은 여태 단 한 분, 에드윈 님뿐이었어요. 용사가 아닌 제가 마왕을 잡으러 간다고 했을 때엔 모두 저를 비웃기만 했지, 아무도 제 힘이 되어주지 않으려 했거든요."

해맑게 웃으면서.

에드윈도 사실은 그가 용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적당히 루카의 말에 맞춰주었다.

아무에게도 다른 누구의 꿈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 던가. 사실 길드에서 며칠 지켜보았는데 초보자로 보이는 네가 너무 아슬아슬한 모습이라 어쩔 수 없이 도우려 했는데 진짜 용사일 줄은 몰랐다, 던가.

적당히 어디서 들은 이야기랑 상황을 조합해서 둘러댔는데, 루카는 그 속 빈 강정같은 이야기를 듣고는 무척이지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게 나빴다. 그게 에드윈의 잘못이었다.

에드윈이 처음부터 루카에게 본심을 밝혔더라면, 루카도 실망했을지언정 에드윈을 동료로 받아들이고, 성녀를 향한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를 응원했을 것이다.

"누구냐."

어느날 밤이었다.

이클리시아 왕은 연좌의 굴레에 얽혀 파문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황청에 끌려갔다 머리만 남아서 되돌아온 둘째 아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창대에 얽어 성벽 위에 내걸어야만 했었다.

그날 이후 급격하게 쇠약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거의 대부분의 국정을 대신 돌보고 있던 에드윈은 그 어느날 밤에도, 밤이 아주 깊어서야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슬프게도, 아직 풋풋한 신혼이었음에도 신부와 밤을 함께 보낸 횟수가 다섯을 채 넘지 못했다.

오늘도 방에 돌아가면, 신부가 먼저 잠들어 있으리라.

처음 일주일은 계속 깨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난 뒤엔 먼저 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정도로 밤이 깊었다.

"누구냐고 말했다."

그런 밤이니, 인기척이 느껴진다면 곤란하다.

에드윈은 조용히 허리춤의 칼에 손을 올렸다.

암살자인가? 윌리엄이 죽었으니, 굳이 내 목을 노리려 들 자는 없을 텐데.

"섭섭하잖아요, 왕자님."

"......루카?"

돌아온 건 용사의 목소리.

두 달 전인가, 반쯤 구속된 모습으로 결혼식장에 나타나 깽판을 부리다가 교회 사람들에게 끌려갔었지.

에드윈은 식은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지? 모습을 보여라."

"네. 왕자님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루카가 은신 마법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소년. 언뜻 보이는 실루엣은 소녀나 다름없지만,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미소년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다만 눈동자는 미쳐 있었고, 입가는 망가진 미소로 잔뜩 뒤틀려 있었다.

"좋은 밤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구나. 나쁘지 않은 밤이지."

"별빛도 예쁘고. 마치 왕자님을 처음 만난 날의 하늘 같아요."

에드윈은 루카의 왼손이 뭔가를 쥐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무척 신경 쓰였다.

은신 마법을 전부 다 해제하지는 않은 느낌. 인기척도 분명 하나가 아니라 둘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긴요. 우리 왕자님 얼굴 보러 왔죠."

"나는 신부가 생겼다. 동생이 죽어버려서 대를 이어야만 해."

"왕자님이 왕자님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는, 성녀가 왕자님 동생에게 죽었기 때문이었죠. 차암. 뭔가 이상하다고 그 때 느끼긴 했는데."

루카가 미소지었다.

에드윈은 웃음으로 답할 수 없었다.

"제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세실리아를 사랑했던 거죠?"

"......부정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역시 그냥 친구가 아니었구나. 하긴 친구 하나 죽었다고 혈육을 죽이려 들 생각은 보통 안 하죠?"

루카가 휙, 하고 팔을 휘둘렀다.

들고 있던 걸 내던지듯이.

그와 동시에, 그것에게 걸려있던 은신 마법도 풀렸다.

짧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노예용 마력 제한의 족쇄가 바닥을 구르며 쇠사슬 소리를 내었다.

오른팔은 팔꿈치 언저리에서, 왼팔은 어깨와 팔꿈치 사이에서.

두 다리는 깔끔하게 무릎 바로 위 2cm 언저리.

잘려나간, 세실리아가.

루카가 내던진 대로, 힘 없이 복도를 굴렀다.

"아우으, 으아우."

혓바닥을 잃은 듯, 말이 되지 않는 신음소리를 뱉으면서.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 위에서, 잃어버린 사지를 허우적대었다.

눈은 하얀 붕대로 가려져 있었다.

아니. 눈을 가리기나 한 걸까. 이미 두 안구는 없어진 것이 아닐까.

에드윈은 충격적인 모습에 당황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선물이에요, 왕자님. 저 잘 했죠?"

"어, 어떻게, 이런."

"처음엔 재빨리 마력제한의 족쇄만 목에 걸었어요. 그런데 마력량이 많으니까 뭔가 기도를 하면서 족쇄를 부수려 하길래 일단 혀를 잘랐어요. 혀가 없는 그런 상황에서마저 묵상하며 족쇄를 부수고 회복하려고 하길래, 팔다리를 잘라내서 머리를 하얗게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세실리아는 성녀다! 아무리 네가 용사라고 한들, 이런 폭거가!!"

"죽이진 않았잖아요. 이 정도야 뭐, 저번처럼 일 년 유폐로 끝나려나."

"너..., 너...!"

"어차피 이 여자. 족쇄만 풀어주면 단번에 멀쩡하게 회복할 걸요?"

그리고 저한테 칼을 겨누면 곤란해요.

어느새 에드윈은 칼을 뽑았던 걸까. 루카는 그런 에드윈의 칼을 손가락만으로 붙잡아 빼앗았다.

"그런데, 어때요? 지금이라면 제가 눈 감아드릴게요. 팔다리는 없지만, 왕자님이 그렇게 사랑하던 세실리아라고요? 반항 하나 못하는­"

"이 악마놈!!"

"왕자님이 뭐라 부르건 간에, 저는 용사에요."

"......큭!"

"전혀 흥분하지 않으시네.... 아, 맞아."

루카가 문득 생각 났다는 듯 웃었다.

"어여쁜 신부님이 계셔서, 불륜은 안 되려나?"

"이 개자식!! 트리테에게 손 댈 생각은 하지 마!"

"물론이에요. 제가 왜 왕자님 걸 뺏는담?"

"이, 이 빌어먹을......."

"성녀는 아직 왕자님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공해서 드릴 수 있었던 거고요. 하여튼 간에."

용사 루카는 에드윈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뱉더니, 갑자기 자기 제복의 단추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겉옷을 벗고, 셔츠도 벗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 여자의 그것이다.

에드윈이 자기 두눈을 의심했다. 처음 보는 한 목걸이가 루카의 목에서 요사스런 빛을 냈다.

"우리 불륜 한 번만 해요. 그러면 트리테 왕자빈님을 저기 성녀님처럼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진심, 이냐."

에드윈이 이빨을 빠득 갈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걸렸다면, 뭘 못하랴. 에드윈도 자기 셔츠를 끌어내렸다.

하지만, 루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에드윈을 보았다.

그러더니, 엎어져서 아직 바닥을 기는 세실리아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올려서,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입을 벌리게 했다.

"근데 저도 의무심으로 하는 건 싫어요. 성녀의 입이랑 제 몸을 비교해도, 왕자님은 분명 제 몸보다 성녀의 입에 더 흥분할 거잖아요."

"닥쳐라, 루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다리나 벌리시지."

"......꺄하."

루카가 웃었다.

그리고는 에드윈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자기 목걸이를 벗어 에드윈에게 씌웠다.

"이, 이게 무......"

"왕자님. 아니, 공주님."

반대로 루카가 에드윈을 밀쳐 쓰러트린다.

"용사를 장기말로 쓰려 한 대가는, 받아갈게요. 그리고 당신과는 두 번 다시 연관되지 않을 테니까."

"기, 기다려! 루카! 이건!!"

그리고 팔다리가 너무나 짧아진 세실리아를 붙잡아, 에드윈의 가슴 위에 올린다.

두 가슴이 맞대어지고, 세실리아의 언어가 되지 못하는 목소리와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에드윈의 귓가에 꽂힌다.

"......세실리아는 건들지 마."

"공주님을 위한 배려에요. 그냥 해버리면 강간 같잖아."

"세실리아는 내버려 두라고!!"

루카는 에드윈의 표정을 한 번 보았다.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 드센 기색은 남아있어도, 루카가 아는, 그리고 바라는 그런 얼굴은 아니다.

웃는 얼굴이 좋은데.

루카는 에드윈의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걸이를 뜯어내듯 벗겼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루카가 중얼거리며 창문을 깨트렸다.

그리고, 밤하늘 사이로 사라져간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윈은 세실리아를 한 번 보고는, 잠시 내버려두고 깨진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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