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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97화 (97/100)

〈 97화 〉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

* * *

에드윈 왕자는 아티켄 백작가의 여식과 결혼했다.

나로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지만, 그건 에드윈도 거의 마찬가지라는 모양이었다.

용사 루카가 백화궁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교황청으로 끌려가 꼬박 일 년 동안 자숙하는 사이에 아버지가 추천해준 가문의 딸과 냅다 결혼해버렸다고.

나라면 용사가 무서워서 그러지 못할 테지만.

완전히 쓰고 버리는 거 아냐, 이거

에드윈도 에드윈 나름대로 급박했던 게 아닐까 싶어도, 루카가 과연 에드윈을 이해해줄까 싶다.

"연미복이 잘 어울리는 걸 보아하니,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나보군."

테라스에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빛을 보며 쉬고 있었는데, 그 왕자 본인께서 갑자기 나타났다.

"저하가 이리 걱정해주시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죠."

"그러냐. 하하."

"저하께선 그렇지 못한 모양이지만요. 그나저나 파티의 주역이신데 이렇게 나와 계셔도 괜찮나요?"

"나랑 이야기하는 게 싫은가?"

"저 평민 출신이라 왕족이랑 이야기하면 위장 아파서 싫습니다만."

"실없는 소리 하기는."

에드윈이 피식 웃더니, 하아, 하고 한숨을 연이어 뱉었다.

그리고 별을 보던 나로부터 등을 돌려, 안쪽 연회장을 바라보며 난간에 등을 대었다.

그러면서도 에드윈의 시선은 혼자가 되어 우물쭈물하면서도 나름 착실하게 다른 가문의 여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아티켄 가문의 아가씨에게 꽂혀있었다.

"가서 도와주시는 편이 낫지 않나요?"

"됐다. 저런 서투른 모습이 옛날 옛적의 테레제를 보는 것 같아서 더 사랑스러우니까."

"와, 최악. 지금 아내를 보며 첫사랑의 느낌이 나서 좋다고 말하는 건가요?"

"음."

에드윈은 나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내 가슴을 보았다.

그냥 슬쩍 보는 것도 아니고, 꼭 집어서 노려본다.

어딜 보는 거야, 이 자식아.

뒤늦게 팔로 가슴을 가리니, 에드윈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다.

뭐가 그런데, 이 성희롱범아.

어디 같은 피 아니랄까봐 윌리엄이 연상되는 짓거리를 꼭 그렇게 해야만 하겠어?

"너도 여자였지."

"......그, 그러게요."

"왜 네가 더 당황하나?"

"아니, 그거야 복잡한 사정이..., 하여간에. 그게 왜요?"

"일단은 또래이면서도, 나보다 조금이나마 더 일찍 신혼생활을 시작한 네게 남편이란 아내에게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어볼 심산이었다만, 이래서야 곤란한가."

"거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는 게 좋을까나. 나의 경험에 따르자면, 으음.

"서로에게 순종하는 편이."

"너는 애초부터 네가 말한 대로 평민이었으며, 테레제의 종자였지 않나."

"네? 그건 그런데요."

"그럼 당연히 순종해야겠지."

조언을 해줬더니 뭔 개소리래, 이 양반은.

그러니까 네놈이 테레제에게 차인 거다, 이 멍청한 멍텅구리야.

우리 테레제가 얼마나 귀여운데!

테레제와 한 쌍이 되지 못한 걸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도록 해라!!

이 한심한 한량아!

"듣기 싫으면 듣지 말던가요."

"아니, 잠깐만. 하나 넘겨들을 수 없는 게 있군."

"뭐가요?"

"방금 서로에게 순종하는 편이 좋다, 라고 했었지?"

"아, 예에. 뭐. 네."

물론 테레제 뿐만이 아니라, 아일린에게도 잘 따른다.

둘 모두 역시 내게 잘 따르는 편이고.

"테레제가 네놈에게 순종한다고?"

"그럼요?"

"그게 무슨......."

에드윈이 뭔가 번개라도 맞은 표정이 되었다.

자기 딴엔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인데, 굳이 저럴 것까지야 있나 싶다.

애초에 테레제는 나와 맺어지기 이전, 내가 시녀였던 시절부터 꽤나 내 말을 잘 따라주는 편이였었다.

무턱대고 명령을 내리는 성격도 아니고.

애초에 순종한다는 게, 말만 거창하지 아내를 신하로 대할 것만 아니라면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당연한­

생각해보니까 이 자식, 우리 테레제를 약혼자로 삼고 있던 시절에, 테레제를 신하로 대하는 듯한 발언을 했었다.

"알아서 잘 생각하세요. 어쨌거나 나랑 테레제는 둘 모두 다 조금이라도 떨어져있기 싫어할 만큼 엄청 사이 좋으니까."

물론 밤낮 가리지 않고.

아일린도 더불어서, 셋 다.

어때, 부럽지 이 못난이 왕자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우리 테레제가 나만 바라봐준다고.

언젠가 너에게도 그랬었는데, 그 기회를 어떻게 못 잡냐.

불쌍하다 불쌍해. 세실리아가 그렇게 이뻤느냐.

심지어 결국 차였지? 까르르, 깔깔.

"맞아. 그러고보니, 네게 할 제안이 하나 있었다."

"말투를 보니 이게 주 목적이었네요. 제안? 뭘까요?"

"내 기사가 되어다오."

이 자식 머리 이상한 거 아냐?

"......지금 누구 남편을 꼬시는 건가요?"

"아니, 젠장. 그래. 네가 여자라는 건 잘 안다."

"그거 뺴고도 전 지금 저하께서 말한 대로 신혼인데요. 제가 달달한 신혼을 보내는 게 그렇게 꼬우셨나요?"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길게 말하는 걸 보면, 관심이 나름 있는 모양이지?"

"와, 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자식. 아주 반격이 거세네."

"어전이다. 속마음을 막 내뱉지 마라."

어머, 실수.

에드윈은 그다지 내 무례가 그다지 싫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나의 무례한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웨인이 제멋대로 사표 쓰고 죽어버려서, 왕자로 돌아왔건만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 없구나."

"이 인간, 진짜 유부녀???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오히려 유부녀라서 안심하고 하는 소리다. 내 사랑하는 비가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오해하는 일이 없을 터이니."

"......뭐, 그건 그렇다 치고요."

이클리시아 왕자의 호위기사 자리라.

실은, 그렇게 나쁜 자리는 아니다.

오는 길에 난데없이 도적을 만난 것에서 이미 알 수 있었겠지만, 테레제가 맡은 영지는 악지?에 가까운 땅이다.

뭔가 개발을 하려 해도 역시 돈이 필요한데, 테레제가 개인적으로 모아온 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얼마 줄 건데요?"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앞으로 10년 안에, 그 동안 테레제가 무기를 팔러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너희 유라시아 령을 영민들이 맘 놓고 살 만한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와아."

맘에 든다, 그거.

테레제는 현재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바리바리 사놓은 무기가 산더미처럼 있긴 있지만, 테레제 본인이 영지 안정화를 위해 책상물림을 하느라 너무나 바쁜 상황이었다.

테레제가 돌아다닐 수 없으니 팔 수가 없었다.

우리 영지 교통상황도 개판이라 운송비를 받아먹고 팔 수도 없다.

전쟁의 총희가 테레제라는 걸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사러오는 놈도 없고.

텔레포트도 있고 그냥 가서 팔고 오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수요 공급 그래프도 있고, 살 사람도 찾아야하고,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니까.

유르덴의 이름을 내걸고 있을 때엔 이클리시아의 재상인 유르덴 공작 쪽으로 여러모로 정보가 모이기도 했으니 정말로 그냥 가서 팔고 돌아오기만 하면 됐지만, 지금으로는 여러모로 난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일린이 구해낸 실험체 아이들이 아일린을 따라 유르덴 령에서 유라시아 령으로 이주해준 것이려나.

기본적으로 강한 아이들이라서 영지 여기저기서 마수잡이 사냥꾼이나 도적을 사냥하며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밭일도 몸이 튼튼한 덕분에 열심히 해주고 있고.

"근데 하나만 물을게요."

"뭔가?"

"굳이 저를 영입하려 드는 건, 용사가 무서워서 그런 거죠?"

"......하하."

메마른 웃음. 나도 웃음으로 에드윈에게 대답해준다.

절대로 그딴 데는 안 가. 시한폭탄이 묻혀있고 언제 터질 지도 모르는 직장이라니, 그런 데서 누가 미쳤다고 일해?

"그래도, 테레제에게 한 번 물어나 보는 게 어떻겠나?"

"테레제가 직접 저하를 죽이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요."

"정말로 곤란하구나. 곁에 있어줄 사람이 이렇게나 부족하다니."

"그거 업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렇군. 나도 미안했다. 신혼에다가 갓 태어난 아이도 있는 사람에게 죽어달라고 부탁하긴 힘들지."

잘 아는 자식이 그러고 있어.

"잡담이 길어졌군. 나는 그만 돌아가보겠어. 너는 언제까지 거기서 별이나 보고 있을 거지?"

"......저도 늦긴 늦었지만,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여태 하지 않았었네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됐다. 얼굴이나 보자는 거지."

그러면서 에드윈은 내게 손을 뻗었다.

악수하자는 건가. 왕족의 악수는 받아도 되는 건가?

일단 받았다.

"여기 있었네, 코넬리아. 괜찮아? 이 자식이 널 꼬시진 않았니?"

"다행이에요, 테레제. 이 못돼먹은 왕자가 절 덮치려 하더라고요."

"더, 덮치기는!"

"코넬리아. 그런 장난 치는 거 아냐."

농담이 심했나.

테레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다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마치 에드윈 보라는 듯, 기쁜 얼굴이다. 무척이나 행복해보이는 얼굴이라 나도 덩달아서 기뻤다.

사랑하는, 나의 사랑스러운 테레제.

에드윈도 우리 모습을 보더니 씁쓸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제 와서 겨우 자기 잘못을 자각한 모양인데.

그러다가 뭔가 입을 열었다.

"테레제. 네 칼끝에 내려 앉았던 나비가 이젠 되려......."

"에드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순간 등골에 소름이 내달렸다.

에드윈은 어련할까. 거의 사색이나 다름없는 낯빛이 되어 안으로 달려간다.

불청객, 용사 루카가 두 팔에 수갑을 차고, 두 발목에는 커다란 철구가 달린 족쇄를 찬 채로 귀부인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런 루카의 뒤로 세실리아와 펠릭스 심문관이 헐레벌떡 따라들어온다.

세실리아도 펠릭스도 사색이었다.

특히 세실리아는 새까만 다크 서클이 눈 아래 몇 뼘이나 내려온 걸 보니, 루카 탓에 상당한 고생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루, 루카. 여긴 어떻게."

"도대체 어떤 년이 당신을 유혹한 거예요?! 저, 용사 루카! 인간의 검이자 용사로서 그 도둑고양이를 찢어죽이려­"

"기다려요, 용사!! 멀리서 보고만 있는다고 했었잖아요!"

"이딴 걸 보고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어!!"

"펠릭스 심문관!! 당장 페린데우스 기사를 호출해주세요!!"

거 전부 업보다.

아주 꼴 좋고.

"백작님. 코넬리아 님."

어느새 나타난 카틀레야가 나와 테레제를 불렀다.

"아일린 님이 파티 끝났으니 집에 가자십니다."

"그래. 집에 돌아가자."

우리 일레이나 공주님은 잘 자고 있으려나.

레라를 너무 힘들게 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시끌벅적한 파티장을 뒤로 하고, 나와 테레제는 팔짱을 낀 채 빠져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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