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96화 (96/100)

〈 96화 〉 그리고

* * *

장미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뒤로 가지런히 모아 묶는다.

쓸데없이 큰 가슴에 압박붕대를 두르고, 그 위에 다시 한 번 더 탱크탑 비슷한 속옷을 입어 추가로 압박한다.

그렇게 겨우 형태를 지우고 난 뒤에, 셔츠를 입고, 연미복을 입었다.

품이 넉넉한 테일코트가 라인을 상당히 지워주는 덕분에 그나마 남은 허리나 엉덩이 라인까지 다 커버할 수 있었다.

다만 내 키가 조금 작은 것과 여성 특유의 동안은 어쩔 수 없어서, 나이에 걸맞는 청년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어려워도 나름 소년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이 되었다.

"답답하진 않아?"

"네, 테레제. 코르셋보다는 괜찮네요."

더 이상 아가씨라는 호칭을 붙이진 않는다.

이젠 아가씨라서 섬기는 게 아니라 부인이기에 섬기는 거니까.

그래도 혀에 붙은 높임말이 익숙한 것도 있고, 내가 데릴사위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존중한다는 느낌도 들고 해서, 그냥 말은 높이고 있다.

"그래. 그래......."

테레제가 이해해주어서 고맙다는 듯, 지친다는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테레제는 지금도 코르셋으로 허리를 힘껏 조여매고, 파니에로 힘껏 부풀린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지치지 않을 수가 없겠지.

반면, 간편한 개량 전통복을 입고서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아일린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굳이 허리를 조여매야하는 이유가 있나? 하는 얼굴.

테레제는 그런 아일린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여전하다.

"아일린 님. 일레이나 아가씨를."

"방금 잠들었는데."

아일린은 막 잠에 들어 천사같은 얼굴을 한 딸아이의 볼을 한 번 더 살짝 찔러보고는, 아쉽다는 얼굴을 끝까지 지우지 못한 채 겨우 레라에게 넘겨주었다.

아기는 엄마의 품을 기억한다는 말도 있고, 우리 장녀 아가씨도 엄마 품속이 아니면 바로 눈치를 채고 깨어나버리곤 하지만, 유독 레라만은 예외였다.

레라 말로는 아무래도 일레이나가 자기 털 냄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피부의 체모량이야 사람이랑 비슷하지만, 여우귀나 커다란 여우꼬리에서 나는 수인 특유의 냄새가 크진 않아도 분명 존재하긴 한다.

게다가 아기들은 복슬복슬하고 푹신푹신한 걸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테디베어 대용?

"레라. 일레이나를 잘 부탁할게."

"맡겨만 주세요."

새 보금자리, 유라시아 저택.

저택의 하우스 메이드가 된 레라에게 일레이나를 맡기고 우리는 저택에서 나서서, 마차에 올라탔다.

9개월 정도 전이었던가.

테레제가 유르덴 공작 앞에서 나와 결혼하겠다 선언했을 때, 그 이전에 한 번 보았었을 때보다도 확연히 더 초췌해진 얼굴을 하고 있던 유르덴 공작은 의외로 표정만 구겼지, 별다른 말 없이 테레제와 나의 결혼을 승낙했었다.

아쉬운 표정은 전혀 숨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오히려 그 편이 네게도 좋겠지, 라며, 응원까지 하는 것이었다.

테레제가 말하기를, 그녀의 동생 때문이라더라.

본래는 이렇게 빨리 출가할 생각은 없었고, 결혼 발표도 일단 나와 속도위반을 한 뒤에 하려 했다고 덧붙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일찍 저지른 이유는­

오랜 예전부터, 테레제는 이클리시아에 정략혼을 떠나는 걸로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테레제의 동생이 가문을 잇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이제 와서 테레제가 약혼을 깨버리고 가문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테레제의 동생은 입지가 무척이나 곤란해진 셈인데, 테레제가 알아서 장자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니까, 아무리 불만과 아쉬움이 있었어도 테레제의 결혼을 반대하긴 힘들었겠지.

그래서, 테레제는 이제 유라시아 백작님이랍니다.

가문명은 내가 적당히 추천한 게 그대로 채택되어버렸다.

나쁘진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고향, 은 이제 잘 기억도 안 나지만.

그리고 나는 유라시아 백작 부인­이 아니라, 백작 부군.

이 유르체피아라는 동네는 동성 결혼이 허가된다지만, 특이한 룰이 있었다.

대외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는 남장을 하건 여장을 하건 마법을 쓰건 알아서 남녀 한짝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

안에서는 남자가 임신하건 여자가 임신을 시키건 뭘 하건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대외적으로 남들 눈에 보이기에 불쾌하게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테레제는 폴리모프도 쓸 수 있지만, 부군은 내가 되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테레제의 대외활동이 더 잦을 텐데,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전부 내다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이번 결혼식이 끝나면, 정말로 졸업식밖에 남지 않네."

문득,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테레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유르덴에서 나와, 새 영지 유라시아에 도착한 날. 그러니까 역시 9개월 정도 전이었을까.

나와 테레제는 하객이 100명도 되지 않는, 유르덴의 분가 1세대라고 이름을 대기에는 조촐하기 그지없는 결혼식을 올리고,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었다.

아일린은 일레이나를 품고 있었기에, 단 둘 뿐이었었다.

아일린이 일레이나를 낳은 이후로는 거의 십중팔구는 3명이서 함께 밤을 지새우고 있긴 있지만, 그건, 하여간에.

첫날밤을 보내고, 함께 나란히 침대에 눕자, 테레제는 탈진해 지친 얼굴로 부끄럽다는 듯 말했었지.

관계를 가지는 건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져도 좋지만, 아이는 최소한 노른데아셀을 훌륭히 졸업한 이후에 갖기로 하자고.

"그럼 테레제의 아이도 곧 볼 수 있는 거야?"

"......그렇네. 내 아이."

아일린이 묻는다.

사족이지만, 아일린과의 결혼식은 약식으로 이미 한참 전에 끝냈다.

아일린이 일레이나를 갖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인가, 글로리아에게서 반지와 함꼐 아기의 이름을 받고 그 자리에서 글로리아의 약식 주례를 받으며 식을 올렸었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고 싶었는데, 아일린이 '일단 하늘에 계신 신들 앞에서 떳떳한 기정사실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아이는 코넬리아가 낳아줄 거니까."

"네?"

"어머."

테레제의 레이디스 메이드가 된 카틀레야가 테레제의 말에 놀란 듯 탄성을 뱉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음표를 띄운 건 나 하나. 아일린은 오히려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짙은 미소를 짓고만 있었고.

"그, 잠깐만."

"뭐니. 말해보렴."

"저, 부군이잖아요?"

"그게 어때서. 전에도 말했었잖아?"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네.

"분명 테레제가 저를 임신시키겠다던가 말하긴 했던 것 같은데요, 그, 그건 출가하려는 변명으로 쓰려고 그랬던 거잖아요. 이제 출가했으니까 필요 없는 게 아닐려나요?"

"싫어."

"아니, 테레제. 제발요."

"코넬리아."

아일린이 뭔가 말을 꺼내려고 운을 띄웠다.

그게 무지막지하게 불길해서, 무심코 아일린의 입을 틀어막으려 시도할 뻔했지만, 아일린이 말을 꺼내는 게 더 빨랐다.

"한 3달 전 부터, 네가 테레제에게 깔리고 있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는 거, 혹시 알고 있었어?"

"......힉."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일린이 빛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게, 창유리에 비쳤다.

시니컬한 그 웃음이, 마치 내게 '포기하면 편해'라고 외치는 듯했다.

"다 밑 준비야."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래선 안 돼.

아무래도 나나 아일린의 체력엔 따라오지 못하는 테레제가 어쩐지 최근 들어 잘도 끝까지 나한테 달라붙어 집요하게 공격해온다 싶었어.

할 땐 별 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이상하긴 해.

......중간중간 남아있는 기억을 되짚어보자.

"히, 히익."

"왜 그래, 코넬리아?"

이제야 깨달았냐는 듯, 아일린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묻는다.

테레제 덕분에 가버리는 순간의 순간에, 항상 내게 붙어있는 아일린의 모습이 보였다.

움직이지 못하게 내 어깨를 누르고 있다던가, 등 뒤에서 내 허리를 안고 있다던가, 여기저기 어루만지고 있다던가.

밑작업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테레제를 보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더불어서, 내가 테레제를 가게한 횟수는 그 반대의 1할조차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때마저도 아일린은 집요하게 나만 노렸다. 그것도 그저 다음 테레제의 공세를 보조하려 애태우기만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나와 어떻게든 함께 끝까지 가려는 것만 같아 무척 사랑스러워서 기쁘기만 했는데, 그런 비밀이.......

"코넬리아, 코넬리아. 나 좀 봐봐."

테레제가 나를 불렀다.

등골이 서늘한 채, 고개를 돌리니 테레제가 행복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떠려나... 지금 어떤 얼굴이려나... 어떤 얼굴을 하면 좋은 걸까...

"글로리아에게서 그걸 받아올까, 아니면 내가 폴리모프를 할까?"

꺄­아­아­아­아­악.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줄게."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나는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말릴 수 있었다.

아아아니, 뭐. 으음. 아.

물론, 으으으. 테레제를 위해서라면 아이 정도야 품을 수 있겠지만.

이런 몸이니까 물론 품으라면 품겠습니다마는, 아아!

드르륵, 하고 쪽창문이 열렸다.

유르덴 공작이 가신단을 꾸릴 때까지라면서 임시로 대여해준 기사 레오날이 마부를 대신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산적입니다."

"그래. 잠시 멈추자."

마차가 천천히 멈춘다.

마차를 완전히 에워쌌는지, 바깥에서 말 발굽 소리가 시끄러웠다

"하하! 이거 횡재했군. 새로 오신 영주님이 역을 쓰지 않고 마차 한 대만 타고 이클리시아 왕자의 결혼식에 간다더니,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대장님! 호위기사도 한 명 밖에 안 보입니다."

"항복하면 죽이진 않겠다! 이 숫자는 힘들겠지? 어서 아가씨들 얼굴이 보고 싶구만."

하아. 아일린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아일린을 보고 참았다.

나는 환도를, 아일린은 새롭게 만든 창포검을 들고, 마차에서 내린다.

"영지가 개판인 건 알았지만, 대낮에 도적떼라니."

"금방 처리하자."

"그래. 옷이 먼지에 더러워지면 곤란하니까."

"응? 쟤네들 뭐라는 거냐?"

네 수명이 다 했다는 소리지, 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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