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기쁜 날에는 조금 울어도 괜찮아
* * *
테레제에게서 보름의 긴 휴가를 받아, 아일린과 함께 단 둘이서 온천도시에 여행을 다녀왔다.
어쩌다보니, 아니,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온천은 거의 뒷전이 되어버렸고, 아침, 점심, 저녁, 새벽, 그야말로 시간을 가리지 않고 아일린과 잔뜩 해버리고 말았지만.
아니, 아일린이 너무 귀여운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휴가가 절반쯤 지나갔을 무렵에는 갑자기 난데없이 글로리아가 찾아와선 실제로 정자를 생산가능한, 유통기한 7일짜리 유사남성기관을 선물이라며 두고 갔는데, 여기서부턴 정말로 더 거리낄 것도 없어져버려서.
그게.
음.
하루에 대충 10회 정도의 비율로. 5일 정도.
밥먹는 시간, 자는 시간까지도 전부 아껴가며, 그.
나나 아일린이나 둘 다 나름 인간은 가볍게 초월한 몸인데도, 마지막에 가선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해버렸습니다만.
"코넬리아. 코넬리아."
"응?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봐줘. 어때?"
휴가에서 돌아온 뒤 다시 2주 정도.
저택 보수도 거의 끝났고, 대청소와 세세한 정리정돈이 진행중이던 어느 날에, 아일린이 빨래가 끝난 이불들을 널고 있던 나를 불렀다.
아일린은 내게 코르크로 밀봉된 유리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플라스크 같은 느낌인데, 유리병 바닥에는 이끼와 흙이 조금 깔려 있었고, 그 이끼들 틈바구니의 정중앙에서 자그마한 새싹 하나가 돋고 있었다.
"이게 뭔데?"
"나도 몰라. 글로리아가 '병의 밀봉을 풀어 피 한 방울을 떨어트린 뒤 다시 잘 밀봉해서 코넬리아에게 가져가면 어련히 알 거예요'라고 말했었어."
"과연 이게 뭘까......."
보틀 가든 같은 느낌이다.
흙이 깔린 부분에 해당하는 유리병 바깥에는 예쁜 조각까지 새겨져 있어서, 보틀 가든이 조성되지 않은 그냥 유리병만으로도 굉장히 좋은 예술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어. 그거! 저 뭔지 알아요!"
최근에 고용된 한 메이드가 빨래를 밟다 말고 번뜩 외쳤다.
아직 자그마한 꼬맹이인데.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보틀 가든을 들고 그 메이드에게 가서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이거, 엘프 특산물인데, 엄마들이 자기 뱃속에 아이가 생겼는지 아닌지 알아볼 때 쓰는 물건이래요. 저희 삼촌이 보부상을 하고 있어서 알고 있어요."
"어..., 임신?"
"그래? 어떻게 쓰는 건데?"
"그으으러니까. 죄송해요! 쓰는 법은 저도 잘 몰라요. 근데 아이가 생기면 거기서 작은 나무가 자란대요. 그걸 잘 키우고 나중에 땅에 옮겨 심어서, 어른이 될 때까지 잘 지키는 게 엘프들의 풍습이래요!"
"코넬리아."
메이드 꼬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일린이 나를 불렀다.
"나무, 자랐어?"
"새싹은 돋았는데...."
내 말을 들은 아일린이 손을 덜덜 떨며 자기 배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진정될 때까지 몇 초. 겨우 아일린이 자기 배를 쓰다듬었다.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흐아아앙, 아아아으, 흑, 흐윽, 으아앙, 코네리, 아. 코넬리아!"
"아일린......."
"힉, 흐끅. 흐아앙, 이런 좋은 날에 울기 싫은, 데. 흐으윽, 너무 기뻐서, 좋아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아일린을 꼭 안아주었다.
아이, 라. 아일린과 나의 아이라니.
한 번에 생길 줄은, 아니. 그렇게나 해댔으니 이건 당연한가.
아무래도 아직 실감이 제대로 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뭉클해서 마치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그런데, 실제로 아이를 품게된 아일린은 과연 어떨까.
더불어서 내가 말하긴 조금 부끄럽긴 해도, 아일린은 내 아이를 갖는 걸 그토록 바라고 있었다. 그걸 소망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을 정도였다.
"흑, 흐윽. 흐아아앙. 흐아아앙, 흐그윽......."
"자자, 아일린. 일단 진정하자. 아이에게도 안 좋대."
"히끅. 흑."
아일린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또 펑펑 울기 시작했다.
몸에 안 좋다니까....
시선이 느껴져서 슬쩍 고개를 돌리니, 방금 우리에게 병의 용도를 알려준 꼬맹이 메이드가 계속 우리를 보고 있었다.
"뭘 봐. 넌 가서 일이나 해,"
"아빠는 누구에요?"
"......."
천진난만한 질문.
대답하기 조금 곤란하네. 물론 내가 아빠는 아빠지만, 이런 모습으로는 그다지 말에 신빙성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그건"
"앗, 하우스 메이드 님! 좋은 점심입니닷!!"
곤란한 순간에 글로리아가 나타났다.
내게 매달려서 울음을 그치질 못하는 아일린의 모습을 슬쩍 보더니,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게 와서 말했다.
"잘 되었나 보네요."
"네, 뭐어.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감사를 하기엔 아직 이를 텐데. 일단 그 새싹이나 좀 주실래요?"
"네? 이건."
"안 돼. 히끅. 주지 마. 흑. 흐끅."
아일린이 제지한다.
"이걸 심어서 아기가 어른이 될 때까지 잘 지키는 게 엘프의 풍습이라던데요."
"그럼 심으세요. 근데 그 나무, 우리 엘프의 사이클에 맞춰져 있어서 그대로 심으면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긴커녕 늙어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다 안 자랄 걸요."
이 만큼은 자라려나. 글로리아가 자기 가슴 앞에 두 손을 올려 높이를 보였다.
대략 45cm 정도 높이. 그렇다면 묘목이라면 묘목이지, 나무라고 하기엔 곤란한 크기긴 하다.
"제게 주시면, 제가 고향에 돌아가 심을게요. 제 일족이 평생 보살펴줄 거예요. 물론 저도 가끔 고향에 돌아가면 돌볼테고. 아무래도 코넬리아나 아일린에 대해선 잊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일린?"
"아. 굳이 주시기 싫으시다면 안 주셔도 괜찮아요. 대에 대를 이어나가며 가문을 지탱하는 대들보, 같은 느낌으로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아일린은 내 두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말도 없었다.
질식한 거 아냐? 농담이지만.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이 없었으면, 아이가 생길 일도 없었겠지."
"......아하하."
글로리아가 드물게도 쭈뼛거리며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실은 글로리아가 없었더라면 내가 여자가 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렇게 만든 팔찌를 글로리아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나를 여자로 만들면 테레제를 섬기기 쉬울 거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 글로리아니까.
"선물로 줄게. 가져가서, 부디 잘 보살펴 줘."
"어머, 고마워라."
"그리고. 둘째를 만들 떄도, 그게. 부탁할게."
아일린이 부끄럽다는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글로리아에게 말한다.
나도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으리라.
글로리아는 나와 아일린의 얼굴을 한 번씩 슬쩍슬쩍 보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노력할게요."
"고마워."
"그리고 코넬리아는 잠시, 여기로 와 봐요."
글로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뒤를 뒤따라서 인적이 적은 곳으로 향한다.
적당히 한적한 곳에서 글로리아가 발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너무 행복해서 잊고 있는 게 아니라는 가정 하에서 말할게요."
"네?"
"언제 테레제 아가씨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신가요?"
나는 글로리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 여자의 의중은 전혀 모르겠다.
아무래도 아일린이 단번에 임신해버려서, 프러포즈를 해달라던 테레제의 부탁을 들어주기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만, 이 상황을 전적으로 지원한 여자가 바로 이 여자잖아.
"저도 금방 하려 했는데, 그. 아일린이."
"그래서, 저희 아가씨를 버리시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글로리아가 웃으며 묻는다.
"당연히 아니에요. 다만, 아가씨의 사회적... 지위? 같은 게."
대답을 하기 직전까지, 글로리아 주변의 땅이 무진장의 압력에 으스러지고 있었던 걸 놓치지 않았다. 풀들도 모조리 잎사귀와 잎대가 부러지고 짓이겨져서 땅에 납작하게 되어 있고.
나를 바로 짓누르지 않은 건 조금 의아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서. 게다가 아가씨도 아이와 아내가 딸린 사람의 청혼을 기쁘게 받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가씨가 먼저 해달라고 했잖아요. 아닌가요? 분명 또 '내가 알아서 다 할게' 같은 소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뇨, 그. 그건. 맞는데."
"일단 지금 가서 아일린에게 상황을 설명하세요. 아일린의 허락을 받게 되면 저를 찾고, 극구 반대한다면..., 어쩔 수 없죠."
"뭐가 어쩔 수 없는데."
아일린이 걸어왔다.
아무래도 내부의 마력은 물론 외부의 마력도 죄다 차단하는 아일린의 기척은 무척이나 옅었다.
진심으로 숨고자 하면,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테레제가 윌리엄을 잡은 뒤에 내게 청혼해달라고 했었거든."
"거절하진 않았지?"
뭔가, 예상하던 대답이 아닌데.
물론 거절했지? 라고 대놓고 묻는 것 역시 아일린답진 않지만, 뭐라고 할까.
"응."
"그럼 지금 가자, 코넬리아."
"응? 뭐? 어딜?"
"테레제의 방이지. 바로 침대에 넘어뜨려버리자."
"아, 아니. 그게? 어? 어라? 뭔가 이상하잖아."
"괜찮아. 둘이서 힘을 합치면, 테레제 정도야 단번에 함락시킬 수 있어."
"아니. 기다려. 함락 같은 단어 쓰지 마."
아일린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다.
당황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말이야. 내가 행복한 만큼 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미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해."
"그건 나도 당연히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테레제를 아끼고 테레제가 너를 끔찍히도 아낀다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어."
"그, 렇긴 하지만."
"뭐어, 나와 우리 코넬리아 사이의 끈끈함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일린이 아직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야말로, 내가 반했고 사랑하는 아일린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코넬리아를 사랑하는 테레제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어. 애초에 나, 테레제에게도 한 번 권유했었거든. '같이' 코넬리아에게 포상을 주러 가자고. 부끄러운지 거절했었지만."
"야, 아일린......."
"그럼 대충 이야기는 된 것 같네요."
글로리아가 작은 함 하나를 건네왔다.
반지다.
"미안해요. 아일린 양과 코넬리아의 반지는 나중에 따로 제작해드릴게요."
"......미안, 코넬리아."
어째선지 아일린의 사과가 이어졌다.
아일린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난 질투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테레제가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의 배엔 더한 사랑의 결실이 있잖아요?"
글로리아가 딴죽을 넣는다.
아일린이, 그치만하고 입술을 삐죽인다. 너무 귀엽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버렸네.
어딘지 모를 새까만 곳에서, 이름도 없던 내가.
"......눈물 닦고 가셔야겠네요."
글로리아가 손수건을 건넨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