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받아야할 포상
* * *
"아일린."
아일린은 이미 상복을 벗었다.
희생당한 아이들에게 내세의 행복이 있기를 빌며 기도를 올리고, 상복을 곱게 접어 함에 넣었다.
그리고는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적당히 씻은 상태였다.
그런 모습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고, 그러다가 테레제에게 붙잡혔다.
아일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가장하고 고개를 돌렸다.
"좋은 밤이야, 테레제."
"그래. 좋은 밤이네."
테레제는 한숨을 뱉었다.
아일린은 표정관리를 한다고 한 모양이었지만, 얼굴에 가득한 붉은 기는 전혀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저번에 키스까지밖에 안 했다고 했던가.
오늘 진도 끝까지 다 나가버릴 생각 만만이잖아.
아일린의 얼굴을 살펴본 테레제는 아무래도 좋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아직 피곤할 텐데. 오늘은 그만 쉬지?"
"어머나."
아일린은 테레제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 여유로움이 테레제에겐 아무래도 거슬렸다.
이상하게도 또 그렇게까지 싫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뭔가.
아쉽다는 느낌, 일까. 부러움?
미묘한걸. 테레제가 아일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일린은 테레제의 시선을 느끼다가, 고개를 데구르르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
"응?"
테레제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혹시나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짖궃음이 섞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옅게만 웃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심으로 보였다.
"어, 으으."
"코넬리아도 테레제의 포상이라면 엄청 좋아할 거야."
"에으, 으으으."
약간 창백하게도 보였던 테레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간다.
당황스러운데다가 부끄러웠다.
세 명이, 같이? 테레제가 웅얼거린다. 뇌마저 새빨갛게 익을 것 같다.
테레제로서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다. 아일린의 눈이 멀어 테레제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면, 정말로 그랬다
스스로도 설마 싶을 만큼 흐트러져선, 하지만, 하지만, 하고 말을 잇지 못한 채 중얼중얼거릴 뿐이었다.
"......너는, 그. 괜찮아?"
"행복해진다면 모두가 행복한 게 좋아."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뻗어, 테레제의 손목을 붙잡았다.
모든 결계가 단번에 돌파당했다. 자신을 지키는 껍질을 모조리 잃은 채, 테레제는 이미 알몸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아일린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게 또 싫진 않다는 게.
"아가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레라였다. 그제야 테레제는 정신을 겨우 차렸다.
여기에 왜 왔는지를 기억해냈다.
"기다려, 아일린. 기다려 보라니까."
"응? 왜."
"넌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없어?"
"코넬리아에게 가고 싶은데."
"그런 말이 아니라! 코넬리아에게 휴가를 줄 테니까, 둘이서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아일린의 발이 멈췄다.
그러더니 고개를 또르르 굴려서 테레제에게 묻는다.
"정말 괜찮겠어?"
"일주일 정도 줄 테니까, 가서 제대로 돌아오기만 해."
"그럼 테레제도 같이 가자."
테레제는 아일린의 순진무구한 제안에 홀릴 뻔 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테레제라고 해서 질투심이 없고, 독점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강하면 더 강했으니, 보통이라면 여기서 아일린과 코넬리아 단 둘만 휴가 보내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양보해야만 한다.
코넬리아와 아일린을 휴가보내는 건 글로리아와 충분히 토론하고, 그녀의 조언을 적극 수정한 결과 끝에 나온 계책이었다.
모두가 손해보지 않고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일이 잘 풀리면 1년 정도는 코넬리아를 독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글로리아가 말했었다.
테레제는 마쉬멜로우를 곧바로 먹지 않고 남겨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둘이서만 다녀와."
"......어째 수상한 걸."
테레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일린은 그런 테레제의 분위기를 유심히 읽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 딱히 나쁜 일을 하려는 것 같지도 않고...."
"그건 확실히 아니야. 보증할 수 있어."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코넬리아가 너를 믿는 만큼, 네가 코넬리아를 믿는 만큼, 나도 그저 너를 믿을 테니까."
테레제는 그거 다행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아일린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참아. 최고의 여행지를 골라서,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오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
"으으으음."
아일린이 고개를 또다시 또르르르 굴렸다.
그리고 고민한다. 어쩔까나.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래. 그럴게. 네가 양보해주는 만큼, 나도 양보할게. 뭔가 서프라이즈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서 두근두근하네. 기대해도 되는 거지?"
"물론이야, 아일린.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해."
"그것 참 고마워라. 대신 지금 코넬리아의 방에는 가야겠어. 어디로 여행을 갈 건지 정도는 의논해봐도 괜찮잖아?"
"그 정도야......."
"만약 코넬리아가 못 참고 덮치면, 저항하진 않을 거다?"
알아서 하세요. 테레제가 한숨을 뱉으며 말한다.
아일린이 손을 흔들며 떠나간다.
글로리아를 믿자. 지금은 믿고, 견디고. 조금만 참자.
/
휴가라.
입에서 몇 번을 굴려봐도, 역시 달콤한 울림이다.
함께 여행을 가줄 연인이 있다면, 세상 그 무엇조차도 비할 바가 되지 못하지.
윌리엄과의 악연에 끝마무리를 지은 바로 다음 날.
아일린과 나는 북녘 노르덴킬라이나에 왔다.
테레제가 휴가를 준 덕분이었다.
아직 저택도 반파되었고, 일손은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텐데도 테레제는 거의 억지까지 쓰며 내게 휴가를 줬다.
좋게 생각하자.
나랑 아일린이 여태 조금 고생하긴 했지.
"이런 데는 어떻게 안 거야?"
"나도 처음 오는 거야."
노르덴킬라이나, 노른피아엘.
나무 수인의 직할령인 노르리카엘 성채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온천 도시였는데, 자그마하지만 꽤나 북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전에 지하 온천에 갔을 때, 류드밀라가 말해줬었거든. 이런 곳이 있다고."
"......그렇구나."
"응."
아일린도 상세한 지명같은 건 알지 못했다.
테레제도 글로리아는 물론, 레라를 포함해 다른 저택 사람들 모두가 노르덴킬라이나의 온천 도시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일단 출발해 우선 노르덴킬라이나로 가 여기저기 물어보며 가볼 생각이었다.
그 때, 테레제가 잠시만이라고 말하더니, 유르덴 공작부인에게 가서 물어보고는 단번에 답을 알아오는 것이었다.
신혼때 몇 번 가봤던 것 같아, 라고 말하더니, 그 자리에서 마도구를 사용해서 여관에 연락하고 예약까지 잡았다더라.
역을 이용할 수 없는 아일린을 위해서 제국 공항에서 비행선까지 탔다.
그리고 지금이 벌써 사흘째 저녁.
이제야 여관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세 명에서 네 명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온천이 딸린 개인실이다.
무척 고급이라는 느낌. 이런 곳을 예약해주다니, 황송하기까지 하네.
여관 주인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새하얀 반룡 아가씨였었는데, 어째서일까 나를 보더니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옅은 미소로 자기 표정을 지웠었다.
어디서 마주쳤던 걸까? 딱히 적대하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나는 아레이유와 권총도 풀어 환도를 기대어 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오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아일린이 투정을 부렸다.
투정이다.귀여울 뿐이려나.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온천, 들어갈까?"
"으응."
두근대서, 침착할 수가 없었다.
새빨갛게 물든 아일린의 얼굴이 보였다. 아일린이 보는 나의 얼굴 역시도 저만큼 빨갛겠지.
마치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만약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온천은 이미 뒷전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잠깐만요! 내가 가서 보고 올게."
"응. 그, 그러면 나는 먼저 들어가 있는 편이 나으려나."
아일린이 온천 쪽으로 도망치듯 향하고 나는 호들갑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하자,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녁시간에 식당으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귀한 인연의 손님이 오셨기에 조금 호화로울 것 같으니, 부디 잊지 말고 참석해주시길."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떠나간다.
인간이 아니었다. 마족?
뭔가 결계 같은 걸로 정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체질 탓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니까....
별 거 아니겠지.
몸가짐에서도 상당히 오래 일한 분위기가 흘렀다.
바로 옆에 나무 수인 직할령도 있고, 이 여관 주인도 반룡이고, 이 동네 풍경 자체도 인간과 인외 사람종족이 어울려 산다는 느낌이고.
그냥 인간 손님이 왔으니 배려한다고 정체를 숨긴 게 아닐까, 싶은 느낌.
그런 거겠지. 더군다나 유르덴 공작부인도 잘 아는 여관이랬으니까.
생각을 그만두니,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들어갈까."
온천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작은 욕실. 옷을 벗어내리고, 적당히 몸을 한 번 씻으려 했다.
바닥에는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걸 의식하니 어딘가 이 작은 욕실이 아일린의 냄새로 가득 찬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씻긴 씻었다.
옷을 정리해 아일린이 가지런히 개어놓은 옆에 놓고, 온천으로 들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