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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92화 (92/100)

〈 92화 〉 매듭

* * *

금방 돌아온다던 아일린은 해질녘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아일린에게 있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 건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못하고, 그 사실을있나 역시도 아주 잘 알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이쯤 되면 걱정이 된다고 할까.

윌리엄을 잡으러 갈 때, 하필 오웨인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버려서 더욱 그랬다.

오토바이란 게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가 있지 않나.

갑자기 소식이 끊어지면 큰일이 난 거라는, 그런 식의. 음.

"세실리아, 저것 좀 봐. 무슨 주인이 집을 나가서 홀로 남은 강아지처럼 하염없이 담장 바깥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잖아. 귀엽지 않아?"

"뭐어어. 귀엽긴 하려나요."

"주인은 나인데, 정말로."

테레제의 말에 머쓱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우리 아가씨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어떻게 풀어줘야 좋으려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저 멀리서 오토바이의 엔진이 혹사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그렇게 급하게 돌아올 필요는 없을 텐데.

아니, 물론. 응.

빨리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고맙기야 하지만.

"어라."

"......자, 잠깐만."

소리가 계속 커져만 간다.

속도를 줄이려는 생각 따위 없는 듯 무진장으로 소리가 커져만 간다.

브레이크를 밟는 듯한 소리도, 뭣도 없이.

"세­실­리­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정원의 외벽이 깍둑썰기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한 손으로는 오토바이의 핸들을, 다른 한 손으로는 창포검을 뽑아든 아일린의 모습이 나타난다.

먼지는 물론, 여기저기 잔 상처가 가득한 모습. 오토바이도 정상은 아니다.

유르덴의 정원에 난입한 아일린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오토바이에서 자기 몸을 내던지듯이 단번에 내렸다.

그리고 단번에 정원에 모인 면면들을 훑어보더니, 망설임 없이 세실리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다려, 아일린."

물론 검을 뽑은 채다.

나는 누구의 명령을 받기도 전에 띠돈을 돌리고 발도해, 세실리아에게 향하는 아일린을 막아세웠다.

세실리아는 화가 잔뜩 난 아일린의 모습에 겁에 질려선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못하고 그저 돌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해야지 나도 도울 수 있을­.

아니, 이런 아일린에게 말을 거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비켜, 코넬리아!!"

"윌리엄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 자식, 지금은 하나도 안 중요하니까 당장 비켜!!"

"뭐?"

"비키라니까!!"

아일린이 검을 휘둘렀다.

캉. 무지막지한 힘에, 환도가 크게 떨렸다.

그러는 사이 카틀레야가 세실리아를 일으켜 세워서 뒤로 물러나게 한다. 아일린은 단순히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며 검을 크게 휘두를 뿐인데, 나는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한 번 두들겨질 때마다 크게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그다지 싸울 생각이 없는 탓도 없잖아 있긴 한데.

"말로 해, 아일린!"

"나는 세실리아에게 할 말이 있는 거지, 너랑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란 말야!"

쾅. 거칠게 휘둘러진 일격.

환도가 손에서 빠져나가 하늘을 날았다.

아일린은 그런 나의 모습에, '대체 뭐하자는 거야'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나를 걷어차 날려버리고는 세실리아에게 향한다.

그런 그녀를 레라가 막아선다. 카틀레야도 증원한다. 마지막으로 어디서 계속 숨어있던 건지, 펠릭스 심문관까지 나타나 무기를 들었다.

아일린은 이빨을 한 번 까득이더니 칼을 다시 잡고 셋에게 덤벼들었다.

전력을 다하지 못한 나라면 모를까, 비록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선이지만 나름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는 두 메이드에 이단심문관 한 명을 더한 세 명을 상대하면서도, 아일린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서히 셋을 밀어낸다. 죽이지는 않겠다는 듯, 칼날이 아닌 칼허리로 후드려 패서 물러나게 한다.

언젠가, 테레제가 내게 싸우면 이길 수 있느나고 물었었지.

그때도 자신감이 없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테레제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장했다.

내가 몇 개월이나 자고 있는 동안, 가만히 있진 않았겠지.

이젠 내가 끼어들어 4대 1로 아일린을 두들긴다 해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지도.

"자, 잠깐!"

세실리아가 결국 목소리를 높혔다.

아무래도 준비가 되어있던 탓인지, 나름 각오를 빠르게 되새긴 셈이다. 아일린의 칼부림은 체감시간으로는 상당히 길었지만, 총합해선 아마 아직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레라와 카틀레야가 떨어진다. 아일린도 약간 머리가 식은 듯, 칼끝이 곧장 세실리아에게 향하지 않고, 아래로 살짝 내리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살짝 훔쳐내고, 땅을 구르던 환도를 들어 납도했다.

"윌리엄을 마음대로 데려간 건 미안해. 하지만 나는, 메흐레니아의 성녀로서 법도를......."

"그게 아니잖아!"

고함소리.

낮아져있던 아일린의 칼끝이 높아져 정확하게 세실리아의 가슴을 겨눈다.

물론 펠릭스가 앞서나와 아일린의 칼끝을 자기 몸으로 가리기야 했지만, 세실리아는 상당히 당황해 놀란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일린의 적의에 그대로 노출된 셈이니까.

"......됐어. 여기선 말 안 해. 다 됐으니까, 윌리엄에게서 훔쳐간 거나 넘겨."

"응?"

"종이였겠지. 윌리엄이 떨어트린 서류 같은 거 말야! 네가 태워버리려다가 말고 숨겨버린 그거 말이야!"

"아니, 그거라면."

"태워버렸다고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아도 네가 공간마법을 쓰느라 생긴 균열 정도는 나도 느낄 수 있으니까!"

"그건 여기 있어."

아일린이 고개를 돌린다.

테레제와 시선을 맞추는 게 아니라 듣기 위해서, 세실리아와 테레제 사이의 어느 구간에서 단아한 얼굴을 멈추었다.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아있던 테레제가 서류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일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려 테레제에게 검을 겨누었다.

"내 놔."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안전해. 걱정하지 마."

"......."

아일린은 미심쩍은 얼굴로 검을 납도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다시 세실리아 쪽으로 살짝 굴렸다.

그렇게 잠시 움직이지 않다가, 아예 몸을 세실리아에게로 돌렸다.

아일린이 세실리아에게로 한 발자국 내딛자, 세실리아가 한 발자국 물러난다.

아일린은 난처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창포검을 땅에 버렸다.

펠릭스 심문관이 눈을 크게 뜨더니, 공간마법으로 자기 모닝스타를 허공에 지웠다.

"성녀님. 아일린 양이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가까이에 가도 괜찮을까?"

아일린이 말한다.

세실리아는 그다지 자신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웃어 보이며 그런 아일린에게 대답한다.

"물론이지. 우린 친구잖아."

"응."

아일린이 걸어가 세실리아의 두 손을 자기 두 손으로 붙잡아 감싸쥔다.

그리고는 잠시 그 가녀린 손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얼굴을 아일린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한다.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

그 이후로는 내겐 들리지 않았다. 아일린이 목소리를 더 죽인 탓이다.

펠릭스는 들었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직접 들은 당사자인 세실리아는 그보다도 더해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일린의 속삭임을 들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괜찮지?"

"응, 으응. 물론이야."

"우린 친구잖아, 세실리아. 아무리 네가 성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친구잖아."

"그치."

훈훈한 분위기지만, 세실리아는 억지로 웃었다.

펠릭스는 웃지 못했다.

뭔가 분위기는 협박이라도 한 분위기인데.

"나는 내게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부디 부탁할게, 세실리아."

"......어차피 나는 이젠, 응. 됐다. 아니야. 알았어, 아일린."

"고마워."

"아일린은 좋겠다. 부러워."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얼굴은 왜 보는 걸까.

다행히 질척거리는 느낌은 없고 순수하게 부럽다는 얼굴이라서 걱정은 없다.

어떤 느낌일까. 그냥 동경하는 여배우가 결혼 발표를 했을 때 상대 남배우를 보며 배게를 깨무는 팬의 얼굴 같은 느낌이다.

...그건 위험한 쪽인가?

아일린은 팔을 뻗어, 세실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세실리아는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끝났어. 이제 다 끝났어, 하고 엄청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뭐가 끝났다는 걸까. 기뻐서 우는 표정이라 끝났다고 말하긴 해도 그다지 걱정되진 않았지만, 세실리아를 품에 안은 아일린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안 죽고 여기까지 왔어. 누구도 죽일 필요 없었어. 이제 이거면 된 거잖아. 굿 엔딩이잖아. 해피 엔딩이잖아."

울면서 그런 말을 마구 내뱉는다.

아일린도 세실리아를 토닥여주다가, 문득 세실리아가 말한 '해피 엔딩'이라는 단어에 꽂혀선 입에서 해피 엔딩, 해피 엔딩 하고 계속 굴렸다.

그런 아일린에게서도 눈물이 또르륵 흐른다.

하지만, 금세 그걸 닦아버리고는 말한다.

"내가 이겼어."

라고.

/

윌리엄은 어딘가의 의자 위에서 깨어났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것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

윌리엄은 오래 전에 동화책에서 읽었던 제국 이단심문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들은 교회 바깥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민간인을 죽이곤 하면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에겐 '너희도 제국 신민이다'라고 말하며 쉽게 죽이려 하질 않는다.

나는 결코 굴하지 않는다.

윌리엄이 자기 자신에게 새겼다. 어떻게든 살아나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문받아도 죽지만 않고, 시계탑에 유폐되는 결말만 이끌어내면 된다.

"하기 싫다니까 그러네."

"이것 좀 보십시오."

문이 열렸다.

모노클을 쓴 이단심문관과,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소녀 한 명이었다.

소녀의 머리에는 사슴뿔처럼 보이는 뿔이 잔뜩 자라나 있었다.

가느다란 발목에는 족쇄가 달려 있었다.

수인 노예인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딘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어딜 봐도 족쇄까지 찬 수인이 아래일 텐데, 나이도 지긋한 이단심문관이 수인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연구를 저지른 자입니다. 마땅히 처벌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노하실 겁니다."

"그래, 그래. 너희들이 그런 일이 아니고서야 나를 꺼내오겠니."

수인 노예처럼 보이는 소녀가 체념한 얼굴로 윌리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름 상냥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우리 사람 친구. 오래 끌지 말고 그냥 죽자. 응? 단번에 편하게 해줄게."

"......싫다. 내 죄는 사형당할 만큼 깊지 않다! 사형만 아니라면 뭐든지 감내할 터이니, 어서 재판장에나 데려가주시지."

"반말이나 찍찍 뱉기는. 그리고 죄의 무게는 네가 재는 게 아니야."

소녀의 말에, 모노클을 쓴 이단심문관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실 마음이 든 것 같으니, 저는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나가, 페리 추기경."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다.

하지만 추기경, 이라는 직책에선 불길함을 느꼈다.

색이 들어가지 않은 평범한 수도복을 입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문이 닫힌다.

수인 소녀는 둘 만 남은 지금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한 때 한 수인 부족에서 섬김받던 야생신이었어. 사람들은 흔히 내게 풍요와 다산을 빌더라고. 사람을 조금 괴롭혔더니, 악신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이단심문관들에게 잡혀와, 지금은 메흐렌 님의 권속신으로 격하되었지만."

"풍요와 다산? 그런 몸으로? 하. 됐다. 네가 신이건 말건 아무래도 좋다. 고문으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을 걸."

"불경하긴. 하긴 그 정도 깡은 있어야지 천상의 열셋 신님들과 지상의 구름 같은 신님들을 모두 좆으로 보고 그딴 실험을 할 수 있었겠지."

소녀가 미소지었다. 그가 나름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소녀의 족쇄가 저절로 풀렸다.

딸그락, 하고 바닥에서 공허하게 강철의 소리가 울렸다.

"시작하라고 하네."

소녀의 뿔과 몸에서 옅은 안개가 피어오른다.

안개가 닿자, 단칸방의 심문실은 어째서인지 무한히 확장해간다.

수평선이 보일 만큼, 무한히.

그런 이후에는, 여기저기서 나무가 솟아올라 숲을 조성한다.

소녀 신이 살던 고향의 모습일까.

그 기현상에 당황해있는 사이, 소녀도 모습을 바꾸었다.

무척이나 많은 뿔이 달린 소녀의 얼굴을 한, 말을 닮은 다리 여섯의 짐승으로.

그것이 본 모습이겠지.

아무래도 신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윌리엄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오래 산 사슴이 안개 속에서 신이 되었었나. 좋다. 이제 이제 어쩔 셈이냐?"

"[강한 척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고문도구를 가져와라. 아니면 그 육체가 고문도구냐? 아무래도 받아들이지. 죽이지만 않는다면, 나는 결코 굴하지 않아."

"[어머, 용감해라. 하지만, 고문도구? 글쎄요. 당신은 우리에게 그 몸으로 봉사하는 걸로 그 모든 불충에 대한 죗값을 갚으면 돼요.]"

짐승신의 꼬리가 다가와 윌리엄의 속박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종아리를 걷어차 그를 꿇게 만들었다.

무릎을 꿇은 그가 고개를 들자, 짐승신의 머리, 소녀의 커다란 눈동자만이 윌리엄의 얼굴에 들어왔다.

"몸으로, 봉사를 해?"

"[맞아요. 당신이 지은 죄로는 아마 저를 포함해 일곱 위의 신을 즐겁게 하면 죗값을 치를 수 있겠죠.]"

짐승신이 혀를 내뻗어 윌리엄을 한 번, 두 번 핥았다.

윌리엄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고문의 일환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우드득, 으득. 다음 순간, 윌리엄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 사지가 찢어지고 골격이 재구성되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윌리엄이 눈을 까뒤집었다.

육체는 여성의 것으로.

봉사라던가. 고통 속에서, 윌리엄은 깨달았다.

고통이 끝나자마자, 짐승신이 그녀를 넘어트리고 올라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이었던 것은 이빨을 악물었다.

어떻게든 버텨내주마. 봉사? 신 일곱 마리? 해주마. 죽지만 않으면 버텨낸다. 버텨내서, 어떻게든 돌아가서 이 몰락에 대한 복수를 갚아줘야만 한다.

"[왕족이라던가요? 살이 연하네요. 무녀의 역할에 어울리는 모습이에요. 단지, 음. 제가 좀 무겁죠?]"

"헤윽, 극, 내기, 를 하자. 흐극."

등과 어깨를 짓누르는 짐승의 발굽 무게.

커다란 가슴이 땅에 눌리는 생소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짐승신도 그녀의 제안에 짝짓기를 시작하려다 말고 즐거운 듯 발굽을 떼었다.

그리고 얼굴을 길게 뻗어, 괴이한 소녀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들은 내기를 좋아하는 편이니까.

"[무슨 내기?]"

흥미를 가진다.

그녀는 이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네 아이를, 가지면. 신의 반려로써, 무죄로."

"[착각도 유분수지.]"

발굽이 그녀의 왼팔 팔꿈치를 짓밟아 부순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올라탄다.

"[듣자하니 아이들을 많이도 가지고 놀았더라고요.]"

"게흑, 케흐극......."

"[저도 당신을 가지고 조금 놀 뿐이에요.]"

윌리엄이 이빨을 갈았다.

괜찮아. 참을 수 있어. 버텨. 나는.

그렇게 하나가. 둘이.

셋. 넷. 다섯. 여섯번째.

야생 신 하나에 일주일. 마흔둘의 일자가 지났다.

페리 추기경이 마지막 신을 끌고 와서 봉헌실의 문을 열었다.

엉망진창이로군. 하여간에 지상의 야생 신들이란.

이번에 들어갔던 게 무수히 많은 그림자의 신이었던가.

페리 추기경은 다섯 번 이미 그러했듯, 완전히 망가진 그녀를 다시 고쳤다.

힘겹게 눈을 뜬 그녀가 신을 보며 말한다.

"......그게 마지막, 하나지?"

"예. 그렇습니다."

"버텨냈고, 버텨낼 거야. 약속 꼭 지켜, 이 더러운 사육사놈!"

대답을 듣자, 빛을 잃었던 두 눈이 다시 생기를 띄기 시작한다.

악독한 녀석이군. 페리 추기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사육사라는 비난에 공감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마지막 신을 던져넣고,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다 말고 희망찬 표정이 된 윌리엄에게 넌지시 한 마디를 건네었다.

웃고 있으리라. 이 부서에서 일을 하면 사람이 더러워진다.

"많은 악신들이 인신공양을 받습니다."

"......뭐?"

"마지막 봉사입니다. 그대가 인류에게 영광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떠나기를."

절망에 가득 찬 표정이 된 윌리엄이 닫히려는 문에 달려든다.

마지막 신은 그런 윌리엄의 발목을 붙잡았다.

"머리는 남겨주십시오. 효수해야 하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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