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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90화 (90/100)

〈 90화 〉 If. 배드엔딩 ~ 피는 다만 피로써 씻으리라 (2)

* * *

(이어지는 배드엔딩이에요. 내상 주의.)

성녀 세실리아는 용사 그레트헨과 여행을 떠나, 55년 전에 마왕 루프덴을 쓰러트리고 금의환향했답니다.이후, 성녀의 직을 후대에 반납하고 교의를 공부하여 제국 추기경의 자리에 올라 50년을 더 제국에 봉사하고 있지요.

그녀는 무려 10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싶은 인재였었지요. 그런 그녀가 항상 젊은 모습으로 남아, 영원히 제국의 발전에 헌신하리라는 제국 신민들의 믿음은 분명 틀림없을 것이랍니다.

설령 그녀에게 60년 전 이클리시아 왕국의 멸망, 몇몇 추기경 및 이단심문관의 사망 사건, 그리고 용사 루카의 사망 사건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더라도요.

애초에, 총명한 제국 신민이라면 그런 명예훼손식 헛소문을 믿을 리가 없지만요.

보세요. 오늘도 거리에 나와 회복 마법을 베풀고 계시네요.

그녀가 성녀의 직을 내려놓은 지 50년, 비록 더이상 성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 찬란한 황금의 소녀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녀가 아닐까요?

“......괜찮네. 됐어.”

레라가 건넨 교회신문의 초고를 읽은 세실리아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프로파간다 같은 느낌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이 세계에선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제목만 어떻게 조금 바꿔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나는 씻으러 갈 테니까, 아무도 들이지 마.”

다녀오십시오. 레라가 고개를 숙였다.

세실리아는 기지개를 한 번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교회, 치첼리아나 교회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든 교회로, 제국 제일의 온천을 보유한 교회였다.

그냥 평범한 성직자로도 충분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굳이 추기경이 된 것도 이 교회를 짓기 위해서였다.

여태 큰 욕심 부린 적 없으니 이 정도는 용서받으리라 생각하고 강제로 추진해 지었는데, 갑자기 온천에서 성수가 흐른다는 소문이 돌더니 제국 제일의 온천이 되어버려선 엄청난 세수를 걷어들이는 중이었다.

용서는 무슨, 여러모로 그냥 추앙받는 중이다.

안 되는 일이 없었다. 뭐든지 잘 되었다.

테레제를 놓치고, 에드윈과 루카를 쌍으로 독살해야만 했을 적에는 정말로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운명은, 아니, 운명의 신 메흐렌은 성녀의 편이었다.

결국 모두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하아.......”

옷을 벗고 나체가 된 세실리아가 천천히 온천에 몸을 담근다.

벽 하나 옆엔 제국 신민들에게 개방된 주 온천이 있었고, 여긴 그 온천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온천을 세실리아가 개인적으로 자기 몫으로 남겨놓아 따로 개조한 온천이었다.

오직 세실리아의 지인들에게만 개방되는 최고의 온천이다.

쭉 뻗은 다리와 가느다란 는은 여전히 희고 주름 하나 없었으며, 비단 팔다리뿐만이 아니라 발끝부터 머리털끝에 이르기까지 전신이 70년 넘도록 늙지 않고 생생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왕조차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마력 덕분이지. 몸이 풀어지는 기분에 세실리아가 신음소리를 흘렸다.

만약 그녀를 연모하는 수많은 교회의 부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들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절정해버릴, 천상의 목소리였다.

“정말 꿈만 같네. 전생엔 이런 거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눈을 감았다.

이젠 옛 기억이 다 풍화되어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지금이 너무 행복한 덕분이겠지.

천천히 눈을 떴다.

첨벙.

천장에서 뭔가 떨어져 온천의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뭐야. 세실리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쥐인가?

이 온천은 개발되기 이전엔 깊은 동굴 내부에 위치했다.

지금은 천장을 다 들어내고 인공적으로 새 천장과 대들보를 세웠지만, 여전히 쥐나 박쥐 같은 게 어디서 새어들어오는지 가끔 보이곤 했다.

“......어.”

쥐가 아니다.

뭔가가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른다.

눈.

눈이다. 뜬 눈과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다.

사람 머리다.

“흡?!”

세실리아가 숨을 들이쉬고, 수호결계를 크게 펼쳤다.

그리고 머리를 자세히 봤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머리. 막 사춘기를 맞이한 소녀의 것으로 보이는데, 어딘가 자신의 얼굴과 닮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첨벙, 첨벙, 첨벙. 머리가 세 개 정도 더 떨어진다.

“......올리비아. 마리아. 루리, 카.”

세 손녀들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결혼하진 않았다. 여전히 처녀로 알려져있다.

그 편이 이미지 관리에 좋으니까.

그래도.

비록 수정되자마자 인공자궁으로 옮겼기에 자기 배로 낳은 자식도 아니며, 친자로 인정해줄 수도 없으나,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다시 결혼하여 낳은, 정말로 끔찍하게도 사랑스러운 손녀들의 머리였다.

“누, 누구냐!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모습을 보여!!”

풍덩, 풍덩, 풍덩.

머리가 또 떨어진다.

이번인 아들과 딸들의 머리였다. 이제 제 어미보다 2배는 더 늙은 아들딸들과 그 배필들의 머리가 둥둥 떠오른다.

악몽인가?

세실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대들보에 빛줄기를 쏘았다.

쾅, 쿠르릉.

교회가 비명을 지른다. 먼지가 가시자, 반쯤 무너진 대들보에 사람 두 명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마치 교수형이라도 당한 것처럼 세실리아의 비공식 남편과 3년 정도 전에 몸만 보고 몰래 사귀기 시작한 애인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아, 아아아아아......!”

“오래간만이야, 세실리아.”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몇 십 겹이나 되는 마나 실드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뚫고, 톡, 하고.

“나를 알아보겠어?”

“......코넬리, 아.”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세실리아와는 다르게,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받아낸 모습이다.

그녀가 왜 여기 있는가.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 순간, 고개를 돌린 세실리아의 목을 뚫고, 칼끝이 삐져나왔다.

컥. 세실리아가 숨을 멈춘다. 회복마법이 듣지 않아.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려보면, 언젠가의 하얀 소년과 똑 닮았으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찬란한 금발을 포니테일로 자랑스레 묶은 청년이 자신의 목에 환도를 꽂아넣고 있었다.

“끄, 으으윽.”

“어차피 죽일 거지만, 하나만 물어보자.”

코넬리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59년 전에 반룡들을 보낸 건 너야?”

“왜..., 왜 이제 와서.......”

“목이 뚫려서 바람 소리밖에 안 나네.”

“미안해, 할머니. 깊게 생각하지 못했네.”

“괜찮아. 듣지 않아도 어차피 얘가 보낸 건 확실할 테니까.”

코넬리아가 눈을 감았다.

그러면 항상 떠오른다. 불길이 일던 날이.

그렇게 겨우 도망쳐, 테레제와 1년의 나름 달콤한 신혼살이를 지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될 무렵에 힘들게 만든 오두막집에 반룡이 쳐들어왔었다.

테레제를 노려서 찾아온 건지, 원한 깊은 눈동자를 증오로 이글이글 불태우는 반룡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했었다.

“내 손으로 테레제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끄, 륵.”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테레제가 부탁했었다. 내가 범해지지 않도록 지금 죽여줘, 라고.

너는 도망가. 네 뱃속의 아이만이라도 살 수 있게. 라고.

딸아이는 금세 어른이 되었다.

그 즈음엔 이미 지쳐버려서 복수는 포기했었지.

하지만 손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 아이는 테레제보다는 나나 딸아이의 남편 쪽을 더 닮았다.

“만족스러웠어?”

“.......”

대답이 돌아오진 않는다.

물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겠지만.

“이미 죽었어.”

소년이 칼날을 뽑아 피를 털었다.

주르륵. 순식간에 늙어버린 세실리아가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온천물에 빠져 가라앉는다.

“웃자, 할머니. 바라고 바라던 날이잖아.”

“......아니. 역시 썩 기분이 좋진 않아.”

코넬리아가 중얼거린다.

그 때, 갑작스레 굳게 닫혀있던 온천의 문이 열렸다.

증원군인가 했더니 레라였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코넬리아와 세실리아의 시체를 한 번 보고는, 다시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한 모습으로 스커트 양 끝단을 살짝 들어 그녀들에게 작별인사를 보내었다.

그리고는 말 없이 커다란 대리석 문을 다시 닫았다.

“못본 체 하려는 모양이야. 그러니 그만 돌아가자, 할머니.”

“아니, 에일레드. 나는 여기에 남으련다.”

“할머니.”

“여기가 좋아. 너는 그만 가거라.”

코넬리아가 손자의 손을 피해, 세실리아의 시체 옆에 앉았다.

이 온천은 기억에 있다. 그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온천물이지.

눈을 또 감으면, 류드밀라가 놀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만 같다.

새빨간 얼굴의 아일린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포상, 결국 못 받았나.

아일린도 오데트도, 결국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까.

.....이런, 실수.

테레제가..., 또, 삐지겠어.......

“......할머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소년, 에일레드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품속에서 점화장치를 꺼내 눌렀다.

교회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일었다.

에일레드는 할머니를 남겨놓고 모습을 감추었다.

빠져나가기 직전에, 그가 허리에 맨 환도의 칼집에서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올라 무너지는 건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었으니, 아마 이제야 겨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떠나는 것이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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