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If. 배드엔딩 ~ 피는 다만 피로써 씻으리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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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배드엔딩임미다. 내상 주의.
굉장히 눈살 찌푸려지는 엔딩이기도 하니, 견디기 어렵다 싶으시면 곧바로넘겨주세요.)
1. 죽인다.
윌리엄의 죄는 도를 넘었다.
나의 아가씨, 테레제에게 향할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것을 빼앗긴 나의 연인, 아일린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역겨운 실험에, 빌어먹을 욕심에 희생당한 수많은 아이들의 원한에 향을 올리기 위해서.
또한, 나 역시도 윌리엄 탓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여기서 윌리엄을 죽인다 한들, 잃은 것이 되돌아오진 않는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분명 윌리엄의 죽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너는.
누군가가 묻는다. 너는 어떤데?
“......어때?”
나 스스로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세실리아가 다시 한 번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환도의 띠돈을 돌렸다.
“그건 네 선택이야? 아니면.......”
“제 선택”
“아니, 코넬리아. 그건 내 선택이야. 너는 나의 칼날. 그렇다면, 네 칼끝이 누군가의 심장을 꿰뚫어야만 한다면, 그건 분명 내 의지로 행해지는 거야.”
테레제가 말한다.
그래, 처음부터 그런 계약이었다.
나는 칼날. 테레제가 휘두르는 한낱 검. 나의 죄책감도, 내게 내려지는 저주도, 모두 테레제가 대신 짊어지기로 했었다.
“그렇다면야.”
세실리아가 싱긋 웃었다.
나는 칼집에서 환도를 재빨리 뽑아, 기절한 윌리엄의 목을 베었다.
비명도 뭣도 없다. 피만 조금 솟고 끝났다.
한숨 뱉는 소리. 세실리아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에서 빛줄기가 떨어져 윌리엄의 시체를 발끝부터 조금씩 갉아먹듯이 지우기 시작했다.
윌리엄의 시체를 완전히 지워낼 때까지 계속해서 빛줄기가 떨어진다. 그야말로 존재했었다는 흔적마저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간다.
이 이후에는 신앙교리성의 주도 아래에, 남은 실험의 기록도, 윌리엄을 따랐던 사람들도, 이클리시아의 족보도,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남겼던 그 어떤 작은 흔적마저도, 모조리 윌리엄의 시체가 방금 그랬던 것처럼 차츰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게 옳은 것이겠지.
나는 멍하니 윌리엄이 사라져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짓이야, 세실리아.”
갑작스레,
싸늘한 테레제의 목소리.
나는 윌리엄이 불타 사라진 자리로부터 겨우 고개를 들었다.
정원 가득히, 검은 옷을 입은 성직자들이 보였다.
이단심문관들. 여기엔, 왜.
세실리아는 어느새 황금의 실로 수놓아진 하얀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테레제는 어느새 나타난 이단심문관 둘에게 무기가 겨누어진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물론, 카틀레야나 레라마저도, 그 아무도.
“이단심문관 오를레베트 살해와 물건제공이적을 통한 이적죄 및 성녀 살해미수. 이에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에게 깊은 죄가 있음이라.”
“그런 일 저지른 적 없어.”
“여기에 미상의 누군가가 남긴 보고서가 있습니다.”
세실리아가 서류다발을 소환한다.
끄트머리가 불길에 그을린 서류다발이었다.
“윌리엄의 보고서라면 조작된 거야. 너도 그렇게 말했었잖아?”
“윌리엄?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미상의 누군가가 남긴 보고서입니다. 적극적으로 검토해야겠지요? 그런데 어디보자. 딱히 조작된 것 같진 않네요.”
뻔뻔한 목소리로 말한 세실리아가 테레제에게 미소짓는다.
테레제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제 와서?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애초에 당신이 코넬리아를 저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만 했어도, 그냥 가만히 있었을 거예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당신네 가문이랑 연관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당신이 에드윈에게서부터 절 구해준 걸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더 영문을 모르겠네. 왜 갑자기 내게 칼을 겨눈 거야?”
“제가 언젠가 했던 말, 기억하고 계시나요? 당신이 무섭다고 그랬던 거.”
“물론 기억해.”
“당신이 저를 구해준 날, 당신을 조금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제 친구인 엘자를 죽였고, 윌리엄도 망설임 없이 죽였어요. 그것도 용사와 에드윈까지 동원해서.”
“틀려!”
눈치 채면, 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뒤에서 이단심문관이 다가와 내 등을 후려쳐 넘어트리고, 목을 봉으로 짓눌렀다.
그래도 목소리를 높이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아가씨께선 엘자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어! 에드윈과 호노리아스가 옆에서 봐서 알고 있다고!”
“아, 분명. 오데트라는 사람이 죽였다던가.”
세실리아가 더욱 비릿하게 웃는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권력에 홀렸군. 테레제가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그런 걸로 하고.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죠? 모르시죠? 그럼 제가 테레제가 그 오데트라는 아이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죠? 아니면 제가 신앙교리성 사람들을 시켜서 그 사람을 붙잡아와서 한 번 심문이라도 해볼까요? 죽기 직전까지 한 번 고문해보면, 과연 무슨 대답을 해주려나.”
“결과를 짜두고 증거를 찾겠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기는......!!”
“그러지 마.”
“헤헤. 전 성녀거든요. 이젠 용사와 황제, 그리고 교황님만 제외하면 이 제국에서 제가 제일 강해요. 더이상 떨고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빌어먹을! 헛소리 지껄이고 있어.”
“솔직히 한 번 말해보세요. 엘자가 왜 갑자기 윌리엄과 결혼했죠? 그것도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거의 곧바로 납치되었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선 윌리엄과 결혼했었지요. 이것도 내막이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머리가 좋긴.
“......하.”
"아일린은 난데없이 왜 코넬리아에게 집착하게 된 건가요? 약이라도 쓴 거 아닐지 모르겠네. 분명 저만을 따르던 아이였는데."
아니야. 머리 나빠.
됐어. 멋대로, 생각하라지.
저 여자에겐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남은 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기느냐.
“애초에 그렇게 무기를 팔아서 사람을 죽여놓고, 당신만 처벌 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유가 뭔가요? 이건 단순히 죄의 대가가 겨우내 그쪽을 따라잡은 것뿐이니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우습네. 정의의 수호자 같은 소리를 지껄이기는.”
“저 그거 비슷한 사람인데요. 성녀라니까요?”
“좋아. 내가 졌어. 멋대로 해. 나를 잡아넣던가 말던가 알아서 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나는 어차피 금방 풀려날 거야. 나는 제국의 유지에 필요불가분한 존재니까. 너야말로 그 뒤를 감당할 수 있겠어?”
“펠릭스 심문관님. 협박죄도 추가해주세요. 어차피 이미 지은 죄가 무거워서 별 의미도 없겠지만.”
“예, 성녀님.”
웃기지도 않아.
테레제가 한숨을 뱉었다.
“이번엔 다를 거예요,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 제가 주인공이니까.”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하라니까.”
이단심문관들이 모여 우리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우려 했다.
갑자기 세실리아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후회가 없잖아 있다는 표정. 그러다가 이를 빠득 갈았다. 뭔가 드디어 제대로 결심한 듯, 겨우 짐승처럼 사나운 얼굴을 했다.
“모두 사형장으로 데려가요. 바로 집행합니다.”
그런 말을 했다.
설마 난데없이 그럴 줄은 몰랐는지, 테레제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뭐? 세실리아, 너.......”
“기다리십시오, 성녀님. 아까도 제가 말했지만, 멋대로 처형을 집행했다간 이후에 논란이 생길 겁니다. 추기경들이 성녀님을 탄핵하려 할지도 모르지요.”
“어쩌라고요, 펠릭스 심문관. 제가 제국의 제4인자에요.”
“그래도 우선은 시계탑에 유폐하고, 그 이후에 정식으로 재판을”
“그때는 늦는다고!!”
세실리아가 역정을 내었다.
그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압이 정원 전역을 덮쳤다.
이단심문관들이 우드득, 우드득 소리를 내며 땅에 엎어지고, 오직 세실리아만이 우월한 마력으로 버티고 섰다.
피아를 전혀 가리지 않았는지, 우리 쪽도 나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쓰러졌다. 나는 나를 제압하고 있던 이단심문관을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역시 쓰러진 테레제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무슨....... 중압 마법?”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 당신이 지금 여기서 도망쳐버리면 모든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그대로 도망가려는 순간, 땅에 엎드린 펠릭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 누구 편이야, 펠릭스!!”
“말할 것도 없으니, 당연히 제 주님이신 메흐렌 님의 편이지요!”
세실리아의 측근에 엎어진 펠릭스가 외쳤다.
하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다. 어차피 세실리아는 테레제를 죽이려 했잖아.
여기서 중압이 풀리건 말건, 바뀌는 건 없어.
“그러니 테레제 공녀님! 그냥! 그냥, 이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렇게 서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됩니다! 곧 아리티아 추기경이 제 호출에 응해 찾아올 테”
“닥쳐요, 펠릭스!”
세실리아의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펠릭스를 덮친다.
중압 탓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펠릭스 심문관이 황금빛 섬광에 단숨에 불타 죽어버린다.
세실리아 본인조차도 설마 펠릭스를 죽여버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텅 비어버린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너희 때문에 펠릭스 심문관이 죽었잖아!!!”
세실리아가 괴성과 함께 어마어마한 마력을 발산한다.
무릎을 꿇거나 엎어져 있던 심문관들의 몸에 황금빛 마력이 돌더니, 상당히 멀쩡한 모양새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그다지 원치는 않는다는 얼굴로 우리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난데없는 성녀의 공격에 타 죽고 싶진 않겠지.
그리고 그 앞을 글로리아가 막아섰다.
흠 하나 없이 잘 정돈된 메이드복. 낡디낡은 목제 창 한 자루가 그녀의 손에서 새까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보지도 않고서 말한다.
“가세요.”
“글로리아.......”
“가세요, 코넬리아!”
글로리아가 이단심문관들 사이로 달려들어 단숨에 세 명의 목을 베어내었다.
이단심문관들은 그제야 조금 마음 편한 얼굴이 되어서 글로리아에게 맞선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나는 등을 돌렸다. 더 뒤를 보지 않기로 했다.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테레제를 꼭 붙들고서 내달린다.
어디까지 도망쳐야 할까. 숨을 곳이 과연 있기나 한지.
“테레제 아가씨. 부디, 강녕하시길.”
“이거 놔! 코넬리아! 이거 놓으라고!!”
“안 돼요, 아가씨!!”
계속해서. 계속.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