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88화 (88/100)

〈 88화 〉 이제 모든 것을 네 손에

* * *

윌리엄은 뒷골목에 숨었다.자신의 화려한 망토를 거지에게 주고 그에게서 거적을 받아 스스로를 가렸다.

희망이라면 아직 있어.

모든 메흐레니아 교단이 성녀의 편을 들진 않을 것이다.

그녀를 따르지 않는, 그게 아니라도 그녀를 모르는 교회를 찾는다면, 테레제와 코넬리아의 부정을 교단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젠장...."

윌리엄이 쓰디쓴 신음소리를 뱉었다.

이미 그는 망했다. 왕족이기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더라도, 최소한 시계탑에 유폐되어 평생을 거기서 사는 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는 왕이 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승산이 없진 않았다.

그 빌어먹을 길베르트 놈이 성녀를 죽이지만 않았어도. 최소한 성녀를 확인사살하기만 했었더라도, 이렇게까지 판이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테레제는 몰락시켜야만 해......!"

이대로라면 이클리시아는 언젠가 유르덴에게 잡아먹혀 소멸하게 되리라.

딱히 윌리엄이 애국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내가 왕이 될 수 없는 이클리시아라면 차라리 사라져 버리라지, 라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제가 몰락하지 않으면, 윌리엄의 아들딸들, 그리고 그의 부인들이 테레제의 사적 심판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다.

테레제는 윌리엄이 시계탑에 유폐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다.

복수.

그래, 복수.

우선적으로 자신의 복수를 실현할 겸, 후에 아버지의 복수를 갚겠다면서 찾아올지도 모를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예방하기 위해, 윌리엄의 남은 아이들을 처리하러 들겠지.

그리고 시계탑에 유폐된 윌리엄은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니, 아직 힘을 쓸 수 있을 때, 테레제를......!

툭, 툭.

데구르르르.

머리 두 개가 골목 입구에서,

빛이 닿지 않아 그림자가 깊게 진 윌리엄의 발치로 굴러온다.

"엘..., 자? 마가렛......"

윌리엄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소녀가 한 명.

새까만 까마귀 빛 머리카락을 석양 바람에 흔들리며, 피투성이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직도 계속 도망갈 생각이야?"

"......리처드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연한 목소리로.

아일린은 그런 윌리엄의 얼굴을 보며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억지를 부려서라도 두 불행한 머리를 받아왔던 것이니까.

"살아있을 것 같아?"

"이 개년이!!"

윌리엄이 운디네를 소환했다.

이미 이단심문관에게 짓이겨지고 다져져서 평소 모습과 비교하면 그 절반의 절반조차도 되지 않는 크기이건만, 아직도 제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움직였다.

아일린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운디네가 갈갈이 찢겨나가 사방에 흩날렸다.

"너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잖아?"

아일린이 더 이상 정령계로 돌아갈 기력조차 없어진 운디네의 잔해를 넘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윌리엄의 가슴을 걷어찼다.

윌리엄이 뒤로 벌러덩 넘어져,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에드바드는, 칼리스토는?!"

"네 아들과 딸이라면 다 죽였어. 오히려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다는게 놀라울 지경이야."

아일린이 자신의 발목에 달라붙으려 하는 윌리엄의 얼굴을 걷어찼다.

이빨이 부러져 튀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윌리엄은 아일린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요. 아직, 아직 한 명은 살아있는 거잖아요. 설마 정말로 다 죽이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어이가 없어서."

아일린이 윌리엄의 머리를 짓밟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윌리엄이 주먹으로 땅을 몇 번 씩이고 후려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네 아들딸들은 그렇게 소중하면서, 실험실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볼 때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끄윽, 끄으윽. 리처드. 리처드으으으으........"

"대답하라고!"

아일린이 윌리엄의 머리에서 발을 떼어, 그대로 다시 한 번 윌리엄의 얼굴을 걷어찼다.

윌리엄이 데굴데굴 뒷골목을 구른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뒷골목 구석 그림자 속에서, 윌리엄이 비틀비틀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았을 리가 없잖아요! 그 아이들에겐 항상 미안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죄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올 때면, 언제나 비통하다고 여겼어요. 저도 사람이에요! 아직 작은 아이들이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죽을 때면, 당연히 가슴이 아프지!"

"......."

"그래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저의 이클리시아를 위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것뿐이에요. 그러니 용서해줘요.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 윌리엄이 속죄를 바랍니다. 정녕 당신이 그럴 수 없겠더라면, 하다못해 이 윌리엄의 불쌍한 아이들만이라도 동정해주시기를 빌게요. 부디 메흐렌 신이시여, 운명이 그 아이들에게 잔인하시지 않기를......!"

"이봐, 윌리엄."

아일린이 피투성이가 된 윌리엄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만 둬."

"아니야, 저는, 진심으로."

"네 아들과 저 여자들의 뱃속에 있던 아이들. 이미 모두 죽었어. 그러니 그 아이들 목숨값 벌어보려고 헛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

"다시 진심을 말해보시지."

윌리엄이 아일린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웃었다.

"거짓, 말 마세요. 내 아이는 안 죽었을 거예요."

"죽었어. 그리고 테레제와 세실리아는 유르덴 저택에서 티 파티 중이야. 네 변명따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믿기지 않는다면, 자."

아일린이 윌리엄의 멱살을 풀어주고, 허리를 걷어차서 밀어냈다.

그리고는 말한다.

"탐지나 수색마법이라도 써보던가. 어디 듣는 귀가 따로 있는지."

"끄, 으윽."

"넌 이제 아무 것도 아니야. 테레제와 세실리아는 네가 안중에도 없다고. 네가 어디서 뭘 하건, 감시 같은 거라도 할 것 같아?"

윌리엄이 마법을 사용했다.

확실히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저택의 티파티보다도 관심 없는 인간이 되었다.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럴 수는 없다고!!"

"너는 시계탑에 유폐되지 않아. 죽을 거야."

"주, 죽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죽어선 안 돼요. 세상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쓸쓸하잖아. 저, 저기. 조금만 시간을 줘요. 마을 아가씨, 아니. 너라도 좋아. 어디서 내 피를, 내 씨앗을 남길 시간을 줘요. 그런 다음이라면 얼마든지 내 목을 네게 줄 테니까, 부탁이야! 부탁할게요! 제발, 이 윌리엄이 한때 이 유르체피아에 살았었다는 증거를 남기게 해주세요!"

"헛소리 하지 마.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하는데?"

한 순간, 아일린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웃었다.

마치 아이처럼. 잃어버린 유년 시기에 놓고 온 미소를 이제 와서 겨우 지어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른다.

윌리엄의 하반신으로부터 피가 치솟았다.

윌리엄은 사타구니로부터 짓찔러오는 고통에 놀라 손을 뻗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피를 막으려 두 손으로 샅을 붙잡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식기관이 아예 잘려나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으, 으아, 아아아아아아아!!"

"어차피 죽을 건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안 돼, 안 돼! 안 돼!!!"

윌리엄이 회복 마법을 사용한다.

사용하려 했지만, 아일린이 칼을 내질러 그 팔뚝을 칼로 꿰었다.

윌리엄은 자신의 팔에 꽂힌 칼의 아픔은 느끼지도 못한 듯 다른 팔로 자기 사타구니에 회복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아일린의 칼이 꽂혀있어서, 마법이 아예 발동되려 하지도 않는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마법을 연사하려 하지만, 역시 마법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왜, 왜, 왜...!"

"한심하게 그러지 마, 윌리엄."

"나는, 으아, 아으으윽. 헤그으으으윽......."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줄게. 왕국에서 네 이름이 지워질 거야. 물론 신앙교리성 주도로 이루어지겠지만, 그 전에 네 아버지 이클리시아 왕이 불똥이 튀기 전에 먼저 신앙교리성에다 기록말살처분에 대한 소를 올리겠지. 그런 다음엔 네 형 에드윈이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를 거고, 너와 네 일가는 아무런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 거야."

"그, 그러지 말아줘. 제발. 제발! 너무 잔인하잖아...."

"......아, 그래. 조금 잔인하긴 하네."

"그, 그럼."

"그래서 나 지금 너무 기뻐, 윌리엄. 지금 저기 웃는 소리 안 들려? 네게, 네 빌어먹을 욕심 탓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이 웃는 소리 말이야!"

윌리엄이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물을 쏟아쥐며 말한다.

"드, 들려. 들리고 있어요. 제가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목숨만ㅇ­"

순간, 윌리엄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는 포기했는지, 반항심이라도 생겼는지 이빨을 빠득 갈고는, 핏물에 절어버린 목소리로 말한다.

"하나도 안 들려, 이 개년아."

"그냥 계속 목숨을 구걸하지 그랬어. 보기 좋았는데."

아일린이 검을 휘두른다.

윌리엄이 목에거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쓰러진다.

아일린은 피를 털지 않고, 창포검을 천천히 칼집에 수납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은 그녀에게도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들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더라.

무척 슬프게도.

"끝났어?"

세실리아가 골목 입구에서 나타난다.

분명 저택에서 티 파티 중이었는데.

세실리아는 윌리엄의 품속에서 서류 다발을 주웠다.

그리고 서류에 곧장 섬광을 붙여 불태우려다­, 그만두었다.

서류 끝자락에 붙은 불길이 지워지는 모습을 본 아일린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세실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웃고는, 공간 마법을 사용해 서류를 공간 틈새로 지워버렸다.

테레제의 것보다는 완성도가 확연히 떨어지지만, 서류 다발 정도는 얼마든지 보관할 수 있었다.

"윽......."

윌리엄이 꿈틀거렸다.

아직 안 죽었나. 아일린이 칼을 뽑아들려하자, 세실리아가 그를 회복시켰다.

잘려나간 성기를 제외하고, 발에 걷어차여 망가진 얼굴이나 어깨에 꽂힌 칼자국 같은 걸 전부.

"세실리아. 지금 뭐하는 거야?"

"다른 친구에게도 물어보려고."

그리고는 뒷골목에 나타났을 때처럼 빛이 되어 모습을 지운다.

이번에는 윌리엄까지 모습을 지웠다.

뒷골목에 혼자 남겨진 아일린은 한 순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불길함을 느끼고 유르덴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골목 밖에는 언젠가 코넬리아가 타는 법을 가르쳐 준 강철의 말­오웨인의 오토바이다­이 있었다만, 공간이동을 사용할 수 없는 아일린은 초조하기만 했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그리고 같은 시각, 유르덴 저택. 정원.

모여드는 빛무리를 보며, 테레제가 어딜 다녀온 건가요­라고 물으려 했지만, 빛무리는 세실리아가 아니라 윌리엄의 모습이 되었다.

세실리아는 다른 곳에서 나타나 아까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었던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무슨 생각이신가요?"

"글쎄. 음. 코넬리아."

저 멀찍이서 다기를 준비하던 코넬리아가 세실리아의 부름에 다가온다.

코넬리아는 아름다운 티 파티를 망가트린 윌리엄의 모습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부르셨습니까, 세실리아 님."

"이 사람, 죽일까?"

코넬리아가 굳는다. 난처한 얼굴로 웃는다.

무슨 소리신지. 그런 말을 흘리며 테레제를 본다.

테레제도 당황한 얼굴. 그러는 사이, 세실리아가 나른한 얼굴로 손을 뻗어, 검지손가락 끝으로 정확하게 엎어져 기절한 윌리엄을 가리키며 다시 말한다.

"생사여탈권을 네게 맡기겠단 소리야. 이걸 죽일까, 아니면 살려둘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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