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여우 사냥
* * *
전갈을 선두로, 거대 말벌. 뱀. 거미. 바실리스크까지, 모조리 베었다.
그 즈음에 만신창이가 된 아일린은 깨닫는다.
실험체의 투입 속도가 느려졌어. 모두 소모시킨 걸까.
아이들은 대부분 살렸어. 다행이야.
하얀 짐승들이 죽어가면서 사방에 흩뿌린 독 탓에 죽어버린 아이가 몇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살려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덤벼드는 지네의 독니를 피해, 그 흔들거리는 몸통에 올라탔다.
그리고 창포검을 내려찍어, 지네의 머리통을 쪼갰다.
지네는 이미 깔린 친구들의 피웅덩이에서 꿈틀거리며 난동을 피우며 뒹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하아.... 하아.... 하아...."
침묵. 지친 아일린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구석에 숨어 덜덜 떨던 아이들이 눈을 뜬다.
커다란 괴물이 모두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처음부터 눈을 뜬 채로, 용감하게 아일린의 싸움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벌써 동경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제 끝난 걸까?"
"[놀랍군요. 모두 쓰러트렸을 뿐만 아니라 절반 넘게 구하시다니.]"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진심으로 감탄한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모든 수를 다해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 나오시지? 네 목만 남았으니까."
"[어쩔 수 없군요. 이쯤 되면 나 본연의 힘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아가씨를 꺾어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덜컹. 닫혔던 문이 열렸다.
구석의 아이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도망가도 괜찮은 걸까.
아일린도 장담할 수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뚜벅, 뚜벅, 하고. 구두가 복도를 걷는 소리가 다가온다.
멋드러진 연미복을 입은 노기사.
하얀 카이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깊은 주름에 대비되어 인자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인상은 언뜻 무해할 것 같다는 인상까지 남기고 있었다.
물론 속지 않는다. 그가 이 아이들을 이 방에 몰아넣고 짐승을 풀었으니.
"다시 소개하지요. 나는 이클리시아 전직 필두 근위기사이자, 현재 백화궁 궁정백 겸 왕실 집사를 맡고 있는 디트리히 마른이라 합니다. 아가씨의 이름을, 아가씨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만."
"네까짓 것에게 알려줄 이름 따윈 없어."
아일린이 싸늘하게 대꾸하자, 디트리히는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넥타이를 풀고, 연미복의 단추를 풀어 벗어던지고는 말한다.
"항상 명예롭게 있으라. 명예를 알지 못하면, 한낱 들개일 뿐."
"그래. 나는 들개야. 그리고 너희는 주인님이 던져주는 사람 시체에서 살을 발라먹으면서 '이는 명예롭다'고 자위할 뿐인 애완견이지."
"나는 그 애완견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위계에 순종하고, 질서에 따르며, 법과 왕실의 준엄함에 복종하여 명예롭게 나의 이클리시아를 섬깁니다. 나에겐 있고, 아가씨에겐 없는 것이지요. 나의 살인은 정당하지만, 아가씨의 살인은 결코 정당하다 여겨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야."
아일린이 창포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칼집에 검을 수납하고, 발도의 자세를 잡았다.
디트리히는 등에서 대형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짧은 긴장감.
먼저 움직인 것은 아일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마치 총의 방아쇠를 당겼을 때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발도되어 쏘아지는 창포검에 레이피어를 내지른다.
캉. 칼끝과 칼끝이 얽힌다. 아일린은 힘싸움을 포기하고 순식간에 자기 검을 다시 납도한다.
디트리히는 내지른 레이피어를 좌측 대각으로 그어내린다.
아일린은 검을 납도한 그대로 몸을 굴리고, 무릎을 꿇어 거의 앉은 것이나 다름 없는 낮은 자세에서 다시 발도한다.
검을 휘두른 자세에서, 디트리히는 레이피어를 회수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니 회수하지 않는다. 짧게 팔꿈치를 당겨, 찌르기의 자세로.
늦어. 잡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디트리히가 왼손으로 새 칼날을 뽑아든다.
망고슈. 칼날 빼곡히 서 있는 소드 브레이커가 아일린의 창포검을 붙들고, 얇은 칼날을 단번에 부러트린다.
팔꿈치와 함께 짧게 당겼던 레이피어를 다시 짧게 내지른다.
칼날이 아일린의 배를 관통하고, 고통에 겨운 표정. 비틀거리는 여검사.
디트리히의 입가에 아련히 떠오르는 희열. 그 표정을 조금 더 보여다오.
아일린이 부러진 창포검을 디트리히에게 휘두르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저 그녀의 배를 관통한 레이피어를 위로 그어올릴 뿐이다.
뱃속의 창자, 갈비뼈, 폐, 쇄골, 모조리 부수고 마지막으로 가녀린 어깨를 찢어 올린다. 아일린의 눈에서 빛이 천천히 사라져가고, 힘을 잃은 몸이 땅을 구른다.....
"달콤, 하겠어."
디트리히가 중얼거리며 잠시 감았던 눈을 뜬다.
네 움직임은 이미 다 읽었다. 네가 야수를 몇이나 도륙할 동안, 나는 계속해서 네 움직임을 보고 있었지.
머릿속의 계산이 끝난 디트리히의 눈앞에, 창포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둘러 투명한 마수의 피를 털어내는 아일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예측했던 대로, 칼집에 검을 수납하고 발도의 자세를 잡았다.
디트리히도 등에서 대형 레이피어를 꺼내들었다.
짧은 긴장감.
먼저 움직인 것은, 당연하지만 아일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마치 총의 방아쇠를 당겼을 때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발도되어 쏘아지는 창포검에, 디트리히가 레이피어를 내지른다.
캉. 칼끝과 칼끝이 얽힌다. 아일린은 힘싸움을 포기하고
"윽?!"
달라.
내달린 탓에 가속이 붙은 채로, 아일린이 몸을 낮추었다.
아일린은 디트리히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랐다.
카가가각.
숙인 자세로, 레이피어의 칼날을 창포검의 칼날으로 긁어내며, 디트리히의 리치 안쪽으로 파고들어가, 아예 위로 튕겨올려버린다.
디트리히는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왼손으로 허리춤의 망고슈를 뽑아들어, 품속에 파고들어오는 아일린의 목을 찌르려 했다.
아일린이 옆으로 미끄러진다.
아니, 미끄러진 것처럼 빠르게, 옆으로 빠져나가며 레이피어를 튕겨올린 창포검을 양손으로 붙잡아 끌어내려서 디트리히를 크게 베었다.
망고슈마저 허공을 베고, 아일린은 어느새 디트리히의 등 뒤.
창포검을 힘껏 내지른다.
척추와 갈비뼈 사이,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고, 칼끝이 디트리히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다.
"커흑!!"
"역시, 잘 안 죽네."
아일린이 힘을 주어 창포검을 그어올린다.
심장. 폐, 쇄골, 모조리 부수고 찢어발기며 어깨를 통해 빠져나와, 디트리히의 목과 얼굴마저 가른다.
쿵. 기사가 무릎을 꿇는다.
"내가 말했었지. 너는 토막내겠다고."
아일린이 검을 휘두른다.
피가 튀고, 디트리히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는 모습으로 죽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윌리엄은 처음부터 백화궁에 없었다.
"젠장. 엘자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윌리엄이 안절부절 못하며 접견실 안쪽을 계속 서성였다.
엘자와 아들을 백화궁에 남겨두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관련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인질만 되지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다 싶어서 비밀의 방에 숨겨놓았더니 용사라는 놈이 백화궁을 박살내고 대학살을 해버렸다.
그래서 비밀의 방에서 나와 긴급 전송장치로 가겠다는 보고를 들은 지 이제 5분. 여태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젠장! 젠장! 젠장!!"
"조금 침착하시지요, 왕자님."
오웨인이 지친 목소리로 윌리엄에게 말했다.
그는 이클리시아의 기사였다. 그도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기에, 코넬리아와 아일린에게 에드윈의 위치를 알려준 직후 윌리엄에게 충성 맹세를 했었다.
죗값을 씻을 생각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 자신만이 알겠지만.
"그리고 온다는 이단심문관 놈은 왜 이렇게 늦어!?"
윌리엄도 여태 손놓고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우선, 코넬리아의 성녀 습격사건. 세실리아가 코넬리아를 용서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었지만, 그 세실리아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이제야 교회에 고발했다.
...이미 죽은 성녀를 위해 교회가 큰 힘을 써줄 것 같진 않으니, 이건 그야말로 포석일 뿐이다.
두번째는, 코넬리아의 이단심문관 오를레베트 살해에 대한 건.
이 증거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윌리엄이 아니라, 윌리엄의 부하들이.
결국 모든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고, 윌리엄은 결국 타레이아 가문과 연합해 그 증거를 찾아내었다.
이거라면 확실히 유르덴을 몰락시킬 수 있다.
유르덴이 안된다면, 최소한 코넬리아와 그 종자의 주인은 단두대로 끌어낼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지금 거의 생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유르덴 공작까지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뭐해! 가서 문이나 열어!"
노크 소리가 났다.
오웨인이 가서 문을 열자, 이단심문관들이 하나 둘 접견실로 들어온다.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지. 윌리엄이 의문을 가진 건 이단심문관의 숫자가 다섯을 넘겼을 즈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성녀 세실리아가, 황금의 예복을 입고 들어온다.
"어, 어떻게......!!"
"안녕하세요, 윌리엄 씨."
저하, 라고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세실리아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가짜 신 제조 계획에, 성녀 살해 미수까지. 죄가 깊으시네요, 형제님."
"너는 죽었다고...!"
"죽다뇨.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시성까지 되었는데."
세실리아가 하얀 후드를 벗었다.
황금색 성인의 증표를 마치 머리핀처럼 머리카락에 붙이고 있었다.
"......왕자님. 가십시오."
오웨인이 칼을 뽑았다.
이단심문관들도 일제히 칼을 뽑았다.
윌리엄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이단심문관들에게 말한다.
"기, 기다려라! 내게 죄가 있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 그녀에게도 분명 죄가 있다! 그 서류가 지금 내게!"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윌리엄 저하!!"
"그거 가짜 서류잖아요?"
"뭐? 아니다, 이건 확실하게 조사가 끝난"
"가짜라니까 그러네."
이단심문관들이 세실리아의 말에, 일제히 오웨인에게 덤벼든다.
윌리엄의 운디네도 제멋대로 튀어나와 이단심문관을 막는다. 윌리엄은 아연한 얼굴로 칼부림의 현장을 바라보다가, 이를 한 번 빠득, 갈고는 창문을 깨고 건물 바깥으로 도주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