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제라드
* * *
개전의 신호는 호노리아스가.
그가 지팡이를 땅에 내려치자, 사방에서 넝쿨이 솟아올라와 길베르트에게로 쏘아졌다.
길베르트는 자신에게 쏘아지는 식물을 보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마법따위,’라고 한 마디 내뱉었지만, 다시 한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당황한 얼굴이 되어 창을 휘둘러서 넝쿨을 쳐내고 베어냈다.
넝쿨은 길베르트의 창에 닿는 것만으로도 거기서 성장을 멈추고 잘려나가거나 했지만, 창이 맞닿은 자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다시 성장해서 길베르트를 위협했다.
“귀찮게 하기는!!”
길베르트가 다가오던 넝쿨 하나에 재빨리 창끝으로 마법진을 새겼다.
3획 안으로 그려지는 극히 간단한 종류의 마법진. 그런 간단한 마법진을 넝쿨을 쳐낼 때마다 새겨넣었다.
“하아아아아!!”
“핫! 이쪽 왕자님은 우리 왕자님 보다는 기개가 있구만!!”
에드윈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길베르트를 압박했다.
하지만 길베르트는 유연하게 에드윈과의 합을 치렀다. 심지어는 에드윈과 넝쿨의 압박에 밀려나면서도 마법진 새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딜 보나?”
탕.
탄환이 내 마나 실드에 걸려 어깨 언저리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충격이 퍼져나간다. 내가 사용하는 9mm 구경보다 확연하게 커다란 매그넘 탄이었다.
“네 적은 음. 나다만.”
제라드가 씩 웃더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빨리 도약했다.
그리고 용사의 츠바이핸더보다도 훨씬 거대한 참마도를 한 손으로 내게 휘둘러왔다.
저딴 거 막아줄 필요도 없어.
몇 걸음 빠져 참마도를 피해내고, 곧장 두 발자국 앞으로.
제라드의 목젖을 겨누고, 날선 환도를 재빨리 휘둘렀다.
탕, 탕, 탕.
재빠른 연사. 탄환이 날아와 환도의 칼날을 요격한다.
같잖은 기교를 부리기는. 나는 곧바로 검에서 왼손을 떼었다.
그리고 칼을 쥔 오른손을 비틀었다.
한 번 비틀어진 검로를 더욱 비틀어, 다시 짧게 반 보.
놈의 배를 찌른다.
"흐랴아아아앗!!"
"윽!!"
제라드가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뱉으며 칼끝이 땅에 박힌 참마도를 휘둘렀다.
검에서 뗀 왼손으로 재빨리 허리춤의 아레이유를 뽑아 칼날을 차단했지만, 무게와 더불어 실려있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몸이 흔들렸다. 제라드의 배를 향해 내지른 칼날은 엇나갔다.
“으리이이야아아아앗!!!”
“젠장, 무식하긴......!”
그 순간, 등 뒤에서 폭염이 일었다.
연쇄적으로 불길과 폭연이 무수히 피어오른다.
타오르며 흔들리는 넝쿨들. 길베르트가 새긴 마법진에 화염의 마법을 엮어 단숨에 발동시킨 모양이었다.
그것뿐이라면 모르겠는데, 건물이 견디질 못했다.
제라드의 무식한 힘이 나를, 내가 밟고 있는 땅을 짓누르고, 쩍쩍 갈라지더니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나는 몸을 숙이며 나와 똑같이 자세가 무너진 제라드의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짧은 부유감. 아래층으로 함께 떨어져간다.
제라드가 땅을 구르고, 나도 크게 물러선다. 떨어지면서, 서로의 거리가 벌어진다.
“으음! 선물이다!!”
제라드가 참마도를 허공에 휘둘렀다.
그냥 허공에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무너져 함께 떨어지던 방의 잔해 일부를 마치 골프공을 치듯 칼배로 휘둘러 때려, 내게 쏘아냈다.
허공에선 피할 방법도 없다. 철골이 달린 돌조각이 나의 마나 실드를 깨트리고 함께 박살난다.
지상에 닿는다. 아니, 지상이 아니라, 지하 몇 층이지.
하여간에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어딘가.
어느새 도약한 제라드가 나의 시야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거대한 참마도를 두 손으로 높게 들어올리고서, 내 정수리를 노려 그 위에 칼날을 정확하게 떨어트리려 한다.
슬프지만.
무너진 잔해가 사방에 깔려 진로를 방해하고 있어, 스텝만으로는 제라드의 일격을 피해낼 수 없다.
아이세아를 다시 허리춤에 수납하고, 환도를 양손으로 들었다.
환도로 참마도를 받아낼 수밖에.
쿵. 둔중한 충격이 온몸에 내달린다.
무릎은 꿇지 않았지만, 그뿐.
사지가 무섭게 후들거리고, 어깨도 몇 센티미터 아래로 짓눌려지고, 팔목이 비명을 지른다. 악문 이빨이 부서질 것만 같다.
놈은 나를 짓누른 채, 참마도와 환도가 맞닿아있는 한 점에 힘을 집중하며 자기 왼쪽 팔목을 비틀어 올렸다. 마치 힘을 주어서 시소의 한쪽 끝을 들어 올리면 다른 한쪽이 내려가듯, 참마도의 칼끝이 내 어깨를 찢고 부수기 위해 떨어진다.
“읏, 크윽...으으아, 아아아앗!!!”
“음?! 으으으음!!! 내 힘에 맞먹는다고!”
미안하지만, 나도 힘으로는 지지 않아.
억지로 끌어낸 힘으로, 참마도를 아예 밀어쳐 옆으로 흘렸다.
흘려져 칼끝이 땅에 박혀버린 참마도. 제라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왼손을 떼어, 힘껏 말아쥐고는 곧장 내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내 얼굴이 크게 돌아간다. 입술 찢어졌겠네. 누구 따귀랑은 격이 다르잖아.
그래도 검을 되돌리는 속도는 내가 아득히 빠르다.
되돌리면서, 쿵. 오른발을 크게 구르며 내딛었다. 뭔가 잔해가 발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짓밟아서 부수고, 자세를 취할 자리를 만든다.
“기개가, 크흠. 있, 구나!!”
제라드가 깊은 호흡을 삼키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뭔가 하기 전에 베어가른다.
“뭣.”
“하지만, 이 제라드를 넘어설 순 없지!!”
환도가 제라드의 옆구리에 박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배를 절반쯤 가르고, 내장을 찢었다. 하지만, 척추를 부수기 직전에 잔뜩 힘이 담긴 근육에 붙잡혔다.
사람이 무슨, 마수도 아니고...!
“흐리야아앗!!”
참마도가 다가온다. 내가 제라드의 배를 가른 것과 같은 검로.
똑같이 흘려졌으니, 똑같이 되돌아온다.
베이면 죽는다. 죽는 수준이 아니라 두 토막이 되어버린다.
환도는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아. 아레이유? 늦었어. 뽑을 새가 없다.
환도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재빨리 뛰어들어 제라드의 허리에 매달렸다.
클린치. 참마도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른다.
두 토막이 되지 않았을 뿐. 제라드의 왼팔 팔꿈치가 정수리에 내려꽂힌다.
머리가 울린다. 아레이유를 뽑아들던 손과 손가락이 힘을 잃어버리고, 겨우 반쯤 뽑혀나왔던 아레이유가 딸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으음!! 달라붙으면 무슨 수가 있을 성 싶었!!”
“......있지.”
제라드의 움직임이 굳는다.
남자에겐 약점이 하나 있지. 절대 단련할 수 없는 천연의 약점이.
무릎으로 고간을 올려찍었다. 나는 키가 작은데, 제라드의 덩치는 거인이나 마찬가지.
그야말로 힘껏 올려 찍기에 딱 좋은 위치다.
피도 눈물도 없냐고? 사는 게 먼저야...!
“끄으으윽, 내장이 베이는 것도, 견뎠, 다. 이 쯤....이야.......!”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둔해졌는걸.
내장은 몰라도, 그 근처 근육은 얼마든지 단련할 수 있지만, 거긴 아니잖아?
떨어트린 아레이유에 대한 미련을 깔끔히 놓고, 스커트를 크게 들추어서 허벅지의 홀스터로부터 권총을 꺼내었다. 그리고 즉시 제라드의 가슴팍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타당. 피가 튀고, 제라드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다.
“너야말로 거리를 두진 말았어야지!!”
박혀있는 환도의 손잡이를 아래서 위로 걷어찼다.
우드득, 근육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명치까지 찢고 올라간다.
제라드가 언어가 되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러덩
넘어지지 않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피, 땀. 무너지지 않고, 거한이 제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악을 쓰며 외친다.
“으음! 으으으음! 우리는 고작 이 정도로는 죽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피투성이. 멈출 생각 없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핏물.
꼿꼿이 선 제라드가 참마도를 높게 들어 올렸다.
“나는 이클리시아 기마병대의 차석 기사, 제라드 길데! 죽어 스러지는 그 날까지, 아니!!”
“큭.”
“죽어 널브러진다 한들, 나는 이클리시아의 창끝이다!!”
탕. 방아쇠를 당긴다. 슬라이드가 튀어나와 걸린다.
탄창이 비고, 제라드의 눈에서 핏물이 튀었다. 피눈물이 흐른다. 역시 쓰러지지 않아.
탄창을 교체할 시간은 없다. 제라드는 땅을 거칠게 짓밟았다.
“나는, 코넬리아. 코넬리아 웨블리.”
“좋다! 으으으음! 이 순간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가 가장 총애하는 칼날이자, 네 주인을 꿰뚫을 칼끝이다!”
살인 예고는 진즉에 끝났다. 피하지 않는다. 피하면 이기겠지만.
한 호흡.
제라드의 두 팔이 크게 부풀어오르고, 참마도가 마치 단두대처럼 떨어진다.
떨어진다.
그리고 으드득, 하고 부풀어오른 근육이 다 찢겨나가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참마도의 검로가 수직으로 비틀린다.
보고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야. 말이 안 되는 진로 변경이다.
이젠 좌에서 우. 그 거대한 대검의 날이 공기를 가르며 횡으로 휘둘러진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휩쓸면서
“읽혔, 군.”
참마도가 맹렬하게 허공을 갈랐다.
수직을 그리는 순간에, 이미 나는 크게 도약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눈도 하나 보이지 않는 게, 정직하게 수직으로 내려그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옆으로 피한다면 추적해 베어낼 생각이었겠지만.
제라드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빙글 원을 그리며 어깨에서 떨어지며, 내 환도를 뽑아내었다.
피를 많이 쏟은 탓인지, 근육이 걸레짝이 된 탓인지, 쉽게 뽑혀나왔다.
말없이 제라드의 발목을 후려쳐 쓰러트리고, 목을 베었다.
피를 털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