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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85화 (85/100)

〈 85화 〉 얼마나 더

* * *

레라와 아일린은 용사의 섬멸기에 폐허가 되어버린 왕궁 위를 달렸다.

불운하게도 왕궁이 있던 자리에는 잔해 이외의 그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여기서 뭘 찾는 게 의미가 있기나 할까 싶을 즈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곧 지하 비밀 통로의 입구가 나옵니다."

"하아.... 그래."

아일린이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이런 꼴이라서 입구가 남아있다 해도 뭔가 잔해 같은 것에 틀어막혀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레라를 아래에 가세시키고, 내가 용사를 돕는 게 훨씬 나았었을지도 모르겠는걸.

아일린이 지하에서 실바람 같은 게 새어나오지나 않을까 싶어 감각을 동원해 찾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나 빌어먹게도 불편한 몸이다.

마음에 안 들어.

"다행이네."

"네?"

문득 아일린이 중얼거린다.

레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순간에 아일린은 칼을 빠르게 발도하여 모습을 감추고 다가온 하얀 기사의 검을 요격했다.

캉. 커다란 불똥이 튀고, 은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던 하얀 기사가 물러난다. 그가 사용하고 있던 마법은 아일린의 칼끝을 튕겨내는 그 순간에 산산이 찢어져 흩날렸다.

"큭. 뭐가 다행이지?"

"윌리엄이 왕궁이랑 같이 증발해 죽어버렸더라면 정말 허무할 뻔 했잖아."

"큭, 하하, 하하하...."

하얀 기사, 피핀 오르체니는 메마른 웃음을 뱉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언뜻 보면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아일린의 아름다운 미소가 그에겐 너무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일린 양."

"왜 그러시나요?"

"잠시 물러나주십시오."

나타난 하얀 기사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마법을 사용한 레라가 쿼터스태프를 높게 들었다.

그리고 마력을 잔뜩 휘감아서, 땅을 내려찍었다. 쾅.

잔해가 쌓인 바닥이 무너지고, 아직 나름대로 건재한 지하시설의 복도가 드러났다.

"가십시오. 이 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피핀은 그 나름대로 꽤나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있는 남자였다.

윌리엄의 '은혜'를 받기 이전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였고, 받은 이후로는 같은 하얀 기사가 상대가 아니라면 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자존심도 상당히 높았고, 평소라면 적들 중 하나가 자신을 무시하며 가버린다고 하면 둘 다 상대해주마 따위의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기 자존심을 챙겨야 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일린을 보내려는 레라의 행동에는 안도감을 느꼈다.

살짝 뒤늦게 그 안도감에 대해 깨닫고, 또다시 그 안도감이 스스로에 대한 경멸, 한심함과 분노로 바뀌어감을 깨달았어도, 그는 결코 입을 열어 허세를 부리거나 아일린을 붙잡으려 하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아일린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눈을 감은 소녀의 새까만 상복이 마치 사신의 형상처럼 느껴진다.

"고마워, 레라. 그런데 그 전에."

아일린이 레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칼끝을 피핀에게 겨누었다.

피핀은 흠칫 떨었다.

"교회 포격을 지휘한 건 너야?"

"......그, 그건 내가 아냐."

"누구지?"

명령을 내린 건 윌리엄 왕자다.

하지만, 그 현장에서 포격반을 지휘한 건.

"디, 디트리히 마른. 지금 왕자님 곁에 있을 거야."

"입이 싼 걸. 이적행위야, 그거."

"으, 크윽. 닥쳐. 디트리히 경이 너를 처단하리라 믿는 것뿐이다."

"아일린 양. 아무래도 저 자는 항복하진 않겠다는 것 같습니다."

레라가 오른발을 한 번, 땅에 크게 굴렀다.

구우웅, 키이이이잉, 하고, 레라의 가슴팍에서 터보 엔진에 시동이 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금세 그녀의 온 전신으로부터 푸른 번개가 미칠 듯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여우귀와 탐스러운 꼬리마저 푸르게 물들고, 피어올랐다가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는 작은 번개줄기들이 잔해를 붉게 용해시키기까지 했다.

이쪽도 쉽진 않겠어. 피핀이 입술을 깨물었다.

"박력이 넘치는군. 하지만, 마법은 안 통한­."

글쎄요­라고 말하고 싶어지네.

제약 탓에 입을 열지 못하는 레라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마법을 쓰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저택에서의 패배 이후, 레라는 오랫동은 그것만을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건 내 나름의 해답.

레라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한 대로, 번개처럼 움직여 피핀에게 접근하여 스태프를 휘둘렀다.

휘둘러지는 스태프에도 두 겹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피핀의 반대방향으로, 가속의 마법진과 가속의 마법진. 마치 로켓 추진체의 추진기관처럼 시퍼런 마력을 폭산시키며 피핀에게 스태프를 때려넣는다.

"으큭?!"

캉! 피핀은 불안정한 자세로나마 레라의 일격을 막았다.

하지만, 그대로 자세가 무너져 땅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고, 오래 사용해온 명검은 마치 엿가락 부러지듯 단번에 부러졌다.

피핀이 땅을 구르는 그 순간, 레라는 자신의 두 다리에 곧바로 가속 마법을 걸었다.

마법사가 상대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들은 강화마법을 너무나 쉽게 부순다. 그러나 강화마법은 쓰지 않는다. 어차피 육체는 금속이요, 살점 따위 단번에 뼈로부터 발라낼 수 있었다.

번개 탓에 털이 뻣뻣하게 곤두선 꼬리가 흔들리고, 마치 쓰러스터라도 단 듯 가속한 레라가 피핀의 허리에다가 자신의 스태프를 휘둘렀다.

야구공을 전력으로 후려치는 듯한 모습. 다만, 제대로 맞는다면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별해야할 정도의 위력이 너끈히 담겨 있었다.

"우습게, 보기는......!!"

콰드득.

피핀이 마나 실드를 펼쳐 스태프를 막아냈다.

강화마법도 담을 걸 그랬네. 레라가 여우귀를 쫑긋거리며 몸을 빙글 돌렸다.

뒤따라온 여우 꼬리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메이드복의 새까만 스커트가 한 순간 피핀의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창처럼 쏘아진 옆차기가 피핀의 넝마가 된 마나 실드를 깨트리고, 그의 배에 정확하게 꽂힌다.

피핀은 배를 부여잡고 물러나면서 마법을 사용했다.

바닥의 잔해들이 엉겨붙어 창의 형태가 되어 사방을 헤집는다.

레라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정말 괜찮겠어, 레라?"

"가십시오. 이런 자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협공해서 빨리 죽여버리면 그만이잖아?"

"......젠장. 그럴 시간 없을 걸?"

"목숨이 위험하니 정보를 술술 뱉네. 어디 말해봐."

아일린이 비웃듯 물었다.

피핀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 여우 메이드도 난적인데, 저 사신까지 들러붙으면 정말로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자신이 있었다.

"윌리엄 님이 왜 아직도 도망치지 않고 계실까?"

"중점만 말해."

"곧 지하에서 새 실험체들의 점검이 끝난다. 어서 가서 윌리엄 님을 막지 않으면 모두 부질없이 죽게 될 걸?"

아일린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피핀을 쏘아보았다.

뭐, 눈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텅 빈 눈동자라도 뜬 채 시선을 맞추면 거짓을 말하는 건지 아닌지, 반응을 보기가 더 쉬워지니까.

그다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좋아. 믿지. 맡길게, 레라."

"어서 가십시오."

아일린은 검을 수납하고 지하로 향했다.

피핀은 퉤, 하고 피를 뱉곤 부러진 칼을 레라에게 겨누었다.

파지직, 파직. 레라는 다시 한 번 마력을 피워올렸다.

지하로 내려온 아일린은 망설임 없이 걸었다.

마력이 가장 크게 피어오르는 곳. 시끄러운 곳. 일렁이는 곳. 그곳을 향해서 망설임 없이 달렸다.

윌리엄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다. 저번에 왔던 빌헬름이란 놈이 바로 윌리엄이라고 했었지.

가로막는 문 같은 건 죄다 베어버리며 망설임 없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러다가 발걸음이, 보폭이 점차 줄어든다.

"......아이, 들?"

어떤 방.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

실험체로 사용하려 한 걸까. 작은 숨소리. 미약한 마력. 겁에 질린 듯 흔들리는 공기. 그런 기척이 스무 명 정도.

방구석에 숨어서, 내방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왕궁에서도 실험을 계속했나?

"누나는 누구세요?"

한 발자국.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앞서나오더니, 다른 아이들을 자기 뒤로 감추는 듯한 모습으로 팔을 벌리고는 외쳤다.

아일린은 조금 안심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너희를 구하러 온 사람."

"저희를 구해요?"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우리가 너희들을 꼭 바깥으로 데려가줄게."

"정말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꼭 나쁜 녀석들 전부 죽이고 돌아올 테니까. 대신 하나 물어볼게. 왕자라고 불리는 사람, 혹시 못 봤니?"

"저기로 갔어요."

아이가 손짓을 했다.

아일린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팔이 움직이면서 흔들린 공기를 읽었다.

"고마워. 꼭 돌아올게."

"[이런, 아가씨. 그런 인사를 하기엔 아직 이르다네.]"

마도구를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방송되었다.

윌리엄은 아니었다. 들어본 적 없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드르륵, 쿵. 아일린이 들어온 문이 저절로 닫혔다.

"[나는 디트리히 마른이다. 그리고 나는 아가씨를 잘 알고 있지.]"

"나도 너를 알아. 지금 어디 있지? 당장 가서 토막내 줄 테니까."

"[성의는 고맙네만 거절하겠네. 아가씨는 거기서 죽어주면 그만이니.]"

쾅. 콰드득.

한 층 더 지하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데 모였다. 가장 용감했으며, 아일린에게 윌리엄의 위치를 가르쳐주려 손을 뻗었었던 아이도 커다란 진동에 놀란 듯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닥을 부수고 커다랗고 하얀 집게가 솟아올라와 아이의 허리를 붙잡았다.

누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연이어 땅을 부수고 솟아오른 독침이 아이의 배를 찌르고, 집게는 흥미를 잃은 듯 아이를 땅에 내던졌다.

바위바다 전갈이 거대한 덩치를 드러내며 땅에서 솟아오른다.

"[오우거 때보다 훨씬 튼튼하고, 훨씬 흉포하지. 과연 아가씨는 그 불쌍한 아이들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

"이런, 빌어먹을 짓거리 그만해! 기사라면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란 말이야!!!"

아일린이 목놓아 소리쳤다.

전갈이 다시 한 번 아이를 채간다.

아이들이 흩어지고, 독침이 도망치는 아이의 등을 깊숙히 찌른다.

아일린은 이미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지은 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전갈의 다른 집게를 쳐냈다.

"[왜 그래야 하나? 인간이란 도구를 쓰는 법일세.]"

"이, 빌어먹을......!! 너는 죽이고 말겠어. 반드시 토막내 죽이고 말겠어!"

아일린이 울부짖었다.

"[실험체들은 점검이 끝나는 대로 순차적으로 해방될걸세. 과연 아가씨는 언제까지 버틸 것이며, 몇 명의 아이가 살아남을까. 부디 내게 알려주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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