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84화 (84/100)

〈 84화 〉 그다지 기쁘지 않은

* * *

루카는 성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성검의 핵에 마력을 집어넣어, 자기가 쓰기에 용이한 형태로 바꾸었다.

자기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츠바이핸더. 그것을 두 손으로 쥐고, 어깨보다도 높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인류에게 영광이 있기를.

"성검기록: 제멜 포테라누스."

눈앞에는 이클리시아의 백화궁이 있었다.

하얀 꽃을 닮은 아름다운 궁전. 루카의 적, 윌리엄이 숨어있는 궁전이다.

저 궁전에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앞으로 불행해질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

아무것도 모르는 메이드. 오늘도 일하기 싫다며 투덜대는 하인. 이런저런 인부. 윌리엄과 루카, 정확히는 에드윈과의 관계와는 정말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

"오래된 기억이여, 여기에 인류 영광의 증명을."

츠바이핸더가 백열한다. 태양과도 같은 열량이 성검으로부터 피어오른다.

언젠가의 용사, 제멜 포테라누스가 10만의 마족을 불살랐던 전설과도 같은 옛 기록을 다시 현세에 구현하기 위해서.

물론 이 전투에 영광 따위 없다. 루카 개인의 욕망만이 그득그득할 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반 사람들을 지금 모조리 태워버릴 것이다.

"뭐, 어때."

그는 용사다.

인류의 칼끝. 인간이라는 종의 대변자. 그가 인간이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오래 살지도 못하면서 욕심보만큼은 드래곤들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거운 종족이다.

그러니까 루카는 인간답게, 제멋대로 칼을 휘두르는 거다.

"내게도 영광이 있기를."

츠바이핸더가 휘둘러진다.

칼끝을 따라 하얀 열기가 쏟아져, 지상의 모든 것을 모조리 불사른다.

백화궁. 아름다운 백화궁이 소멸한다. 아아,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단숨에 죽었기를.

용사답게, 사람답게, 위선적인 척 기도하면서.

쾅. 루카의 거대한 츠바이핸더가 땅에 닿는다.

주변에선 이클리시아의 병사들이 루카를 제지하려 몰려오다 말고 겁에 질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물러나고 있었다.

"칭찬받을 수 있으려나."

"하하. 이런 지독한 짓을 하고서 칭찬이라니."

병사들을 밀쳐내며 하얀 기사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하얀 기사네. 루카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하얀 갑옷에, 하얀 머리카락. 눈동자 색깔은 파란색이지만.

초창기 실험체는 실험의 결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진 않는다고 했으니, 하얀 머리카락도 어쩌면 그냥 늙어서 세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베거트 비르덴. 이 병사들의 지휘관이다. 네겐 저주밖에 없을 것이야."

"......저주? 그건 이상한데요."

전 용사거든요.

루카가 시체들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

궁전이라 하면, 보통 비밀통로가 다 있기 마련이다.

나와 오데트, 그리고 에드윈과 호노리아스는 에드윈의 왕자 권한을 이용해, 백화궁 지하 비밀통로의 텔레포트 탈출장치로 역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루카가 지상에서 깽판을 부리는 동안, 지하에서 제압을 시작한다.

이게 기본 골자였다.

아일린은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잘 진입할 것이다.

"엇......!"

텔레포트하는 것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충격파가 지나갔다.

이건 난동을 부리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에드윈과 호노리아스의 얼굴을 보니, 그들도 당황한 얼굴이다.

호노리아스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색이었다.

"뭐, 뭐였죠?"

"아아아가씨,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란 오데트가 묻자, 호노리아스는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고 말까지 더듬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숨기려 했다.

저렇기까지 당황하는 걸 보면 나까지 걱정된다.

지상에 있던 궁전이 통째로 증발했다던가 하면 곤란한데.

아니, 나는 딱히 안 곤란하고, 루카가 용사로서 자질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논란에 휩싸일 것 같아 곤란하지 않을까?

"일단 나가지. 어서 윌리엄을 잡지 않으면 루카가 힘들 거다."

에드윈이 의외로 정상적인 발언을 했다.

우리들은 마법진 플랫폼에서 나와, 문을 열고 작은 대합실로 나왔다.

작다고는 해도, 역시 왕궁 사이즈라고 할까.

상당히 크다.

"당신, 들은......?"

그리고 익숙한 얼굴도 한 명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만삭의 배. 엘자 타레이아.

그리고 엘자의 바로 옆엔, 엘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 배가 불러온 한 하얀 여기사가 포대기에 감싼 아기를 품에 안고서 엘자를 수행하고 있었다.

여기사는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지만, 아무래도 거동이 불편해보였고, 품의 아기 역시도 방해일 뿐이었다.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부, 부탁이야! 아이들에겐 죄가 없잖아!"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엘자도 울먹이며 말했다.

에드윈과 호노리아스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데트는 이미 등에서 도끼를 내렸다. 겨우겨우 참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튀어나가서 둘을 찍어 죽여버릴 기세였다.

"왜?"

오데트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왜 마르티나랑 마리스는 죽은 거야?"

한 발자국 걸어나간다.

도끼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감히 말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드윈과 호노리아스는 오데트의 귀기어린 목소리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고, 나는 아무래도 오데트에게 복수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빼앗긴 만큼 빼앗아라. 그게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를 따지자면 사흘밤낮이 걸리겠지만.

설령 내가 개인적으로 복수가 옳지 않다 여기더라도, 오데트를 말릴 생각은 없다.

나는 그다지 착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죄송합니다."

하얀 기사가 대답한다.

그러더니 검을 버리고 자기 품속의 포대기를 엘자에게 건네더니,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얼떨결에 아기를 받은 엘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기사를 불렀다.

"자, 잠깐. 뭐 하려는 거야."

"엘자 님. 당신에게 받은 소중한 이름을 돌려드릴 때가 왔네요."

하얀 기사가 오데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생아라고는 하나, 이 뱃속의 아이도 윌리엄 저하의 아이. 부디 저와 제 아이 두 목숨으로, 엘자 님을 보내주실 순 없겠습니까."

"미오르티아. 그, 그러지 마! 안 돼!"

"......원한다면."

절그럭. 기계팔이 움직이는 소리.

오데트가 망설이지 않고 하얀 기사의 목을 쳐 날렸다.

엘자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더니, 자기 발치에 굴러온 하얀 기사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미오르티아, 미오르티아, 라고.

어떤 반룡의 이름을 대신 부르면서.

그녀가 죽은 반룡 미오르티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여겼던 걸까.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듯, 오데트는 눈물을 흘리며 다가가 엘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질질 끌었다.

젠장.

나는 오데트를 말리기 위해 한 발자국 나섰지만, 오데트의 피묻은 도끼날이 내 코앞에 멈춰서서 나를 저지했다.

그러면서, 오데트는 비명을 지르며 끌려온 엘자를 텔레포트 플랫폼에다가 내던지듯 밀어넣었다

"가요."

"나는 뭘 잘못했는데!!"

엘자가 소리질렀다.

하지만, 오데트가 아니라 명명백백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주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흐트러진 산발로, 자신의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악귀처럼 외쳤다.

"당장 대답해, 코넬리아!! 너도 염치란 게 있다면, 미오르티아처럼 목이라도 내게 내놓으란 말이야!!"

"......."

다시 절그럭, 하고.

오데트가 도끼를 휘둘렀다.

움직임을 멈춘 어머니의 몸에서 포대기가 떨어진다.

오데트는 도끼를 놓고, 울기 시작한 아이를 품에 안아들었다.

"제가 나쁜 사람이 될게요."

아니다.

도끼를 휘두르는 오데트를 멈추지 못한 건. 아니, 멈추지 않은 건, 아무래도 나 역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엘자의 곁에서 저 아이가 자라면, 언젠가 테레제와 내게 복수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긍정했기 때문이리라.

엘자가 그럴 짓을 할 만큼 심지가 굳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래서야 오데트보다 내가 더 쓰레기네.

"코넬리아 언니랑 아일린 언니는 꼭 행복해지도록 하세요."

"......오데트, 미안해."

"에헤헤. 괜찮아요.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데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플랫폼 위에서 아기와 함께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모습을 지웠다.

나는 끝까지 오데트를 막지 못했다.

"만족스럽나요?"

호노리아스가 물었다.

내게 묻는 건 아니었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질문을 받은 에드윈은 씁쓸한 표정으로 두 시체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음이 꺾일 것 같아. 아무리 동생이라도 세실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깔끔하게 내 손으로 주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안 되지, 청년. 방금 도끼 아가씨가 그러지 않았나. 복수는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하나 둘 놓쳐서 살려놓았다간 자네도 죽어."

호노리아스가 지팡으로 땅을 두들겼다.

식물 넝쿨줄기가 솟아나와 두 시체를 수습했다.

그리고 엘자의 배에서 아직 숨이 붙은 아이를 꺼냈다.

작은 핏덩어리 아기. 호노리아스는 그 아이를 품에 안더니, 에드윈에게 물었다.

"양자로 삼겠나?"

"......그렇게 하지."

"그렇다면야."

호노리아스가 다시 한 번 지팡이를 두들기고, 이번엔 작은 나무를 자라게 했다.

그 나무에 아이를 내려놓자, 줄기가 휘감기며 갓난아기를 감쌌다.

인큐베이터 같은 걸까.

"잊지 말고 데려가게."

"슬픈 이야기는 대충 끝났나?"

목소리가 끼어들고, 하얀 기사 둘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딱히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손 놓고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윌리엄, 어지간히도 인망이 없는 모양인데.

"저하께선 우리에게 엘자 님을 지켜봐 달라고 하셨었지. 명령대로 최후까지 똑똑히 지켜봤다."

"명령대로 했지. 음."

하얀 기사 둘이 무기를 꺼냈다.

옆에서 에드윈이 '제라드 길데, 길베르트 디들턴'이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게 저 둘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자네들도 윌리엄이 싫은 모양인데."

"아, 좀 아는 엘프네. 싫지. 아주 싫지!"

"그런데 3대 2인데, 그냥 물러나지 않겠나?"

"뭐, 불리하긴 하군. 음. 슬프게도 병사들은 비르덴이 다 차출해갔으니."

"근데 왜 3대 2라고 불리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기사 하나가 등에서 창을 내렸다.

다른 기사 하나도 권총을 꺼내고, 등에서 대검을 내렸다.

"좆같고 싫지만, 일단 명령을 따르긴 해야하거든."

"반대겠지. 명령을 따라야 하니 좆같고 싫은 것 아니겠나."

"음."

긴장이 팽팽해졌다.

에드윈이 고개를 한 번 털어내고 말했다.

"저기 권총이랑 대검을 들고 음, 음, 그러고 있는 근육 대머리 녀석이 제라드다. 녀석을 네게 맡기지."

"대머리? 음. 삭발한 거다."

아, 그러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