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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81화 (81/100)

〈 81화 〉 싫은 기분

* * *

"이제 움직일 수 있겠습니다."

자동수복을 끝낸 레라가 자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직 다리는 벗겨진 외피가 아직 재생되지 않아서 날카로운 형태의 금속 프레임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성능 상으로 문제될 건 아니니 괜찮다던가 뭐라던가.

"무력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어. 녀석들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까."

잊기 쉽지만, 레라는 마법사다.

자기 몸과 지팡이에는 마법을 두르고 적에게는 디버프를 걸고 지팡이로 후들겨 패는 타입이다.

아무래도 나나 아일린 같은 체질의 적과는 상성이 안 맞다고 해야겠지.

그 즈음에 글로리아의 광역 중압이 없어졌다.

상황이 정리된 걸까?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문 바깥에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틀레야. 그녀 역시 만신창이로, 피투성이인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도 어딜 보아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 상태로 기절한 실험체 하나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온 모양이었다

"여름 무더위 대책인가요? 방이 훤해졌는데."

"카틀레야! 다행이다."

"아뇨, 아가씨. 이 꼴은 다행인 꼴이 아닌데요. 아무리 봐도 중상 아닌가요?"

"으...."

"사실 아가씨 때문은 아니고, 빌어먹을 우리 '언니' 탓이죠. 언니라고 부르게 하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누가 뇌가 늙은 구닥다리 아니랄까봐 피아 구별은 좀 하란 말이야."

카틀레야는 에휴, 하고 누구 들으라는 듯 한숨을 뱉더니 실험체를 툭 하고 우리 앞으로 내던졌다.

하지만, 이미 죽었다.

죽을 만한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집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팔다리의 관절만 노려 총탄을 박아넣은 탓에 무력화된 것뿐이다.

출혈량도 실험체로서는 죽을 만한 정도가 아니고.

그저 입에 피거품을 물고 있었다.

정신이 있을 때 어금니에 숨겨둔 약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

"왜 저렇게 목숨을 쉽게 내던지는 걸까."

카틀레야가 한숨을 쉬더니 너털너털 걸어가, 보레오가 카르칸이 떨어질 때 뒤집어진 소파 하나를 발로 걷어차 제대로 세우고 거기 반쯤 눕듯이 앉았다.

그리고 메이드 머리띠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말한다.

"좀 쉴게요, 아가씨. 죽진 않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요."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그와 동시에 회복마법이 카틀레야의 몸을 감쌌다.

조금 무례하긴 해도, 낫는 데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숨소리가 고르다.

카틀레야의 마이페이스로부터 벗어나자마자, 레라가 나를 빤히 보았다.

"선배님."

"응? 왜 그래, 레라."

"카틀레야가 있다면, 어느 정도 습격은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중상이라잖아."

"괜찮습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겠지요."

얘는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조용히 듣고 있자니 레라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여우 귀를 살짝 힘 없이 늘어뜨리고서 말했다.

"아일린 양이 걱정되고 있는 것 아니십니까?"

"응? 아니. 나는 아일린을 믿고 있으니까."

"제 눈에는 안절부절 못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코넬리아."

침대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상황이 끝나는 것만 기다리고 있던 테레제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분명 나보다도 더욱 핼쓱한 표정일 텐데도, 테레제는 나름 밝은 안색을 보이려 노력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가 보렴."

"아가씨의 곁에서 아가씨를 지키는 게 제 일이에요."

"그럼 알지.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는 모습으로, 믿고 있으니까 도우러 가지 않는다고 말하니 내가 더 걱정되어서 그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내가 위험에 빠져도,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들면 내 옆에 있는 것보다도 위험의 근원을 잘라내러 가는 편이잖아?"

아니, 뭐.

그러기야 그랬었지.

"난 그런 거 싫어해. 걔를 너무 믿어주지 말고, 그냥 걔 옆에 있어줘. 그리고 또 내게 같은 상황이 오면, 내 옆에 있어주면 되잖아."

"하지만."

"레라. 네 선배가 너랑 네 후배가 못미덥다는데."

"아니야, 레라. 그건 아니야."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짧은 고민. 그리고 테레제 앞에 나아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다녀와, 코넬리아."

몸을 돌려, 뻥 뚫린 벽을 넘어 복도로 향한다.

상처와 독은 이제 거의 다 나았다. 몸엔 여전히 둔한 감각이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만족스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글로리아의 중압도 멈췄고, 인근에선 적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달린다.

여기저기 메이드나 기사가 하얀 실험체들과 엉켜서 쓰러져 있었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 여기저기 보였다. 몇몇은 오랫동안 보아온 얼굴이라서 가슴이 쓰라렸다.

일을 크게 벌여주는구나, 윌리엄.

"윽......."

힘껏 내달려 금방 별실에 도착했지만, 아일린은 방에 없었다.

오히려 테레제 때와 비슷하게, 방과 복도를 나누는 벽이 무너져 있었다.

무너지긴 했는데, 따로 폭발물 같은 것에 당한 게 아니라 예리한 날붙이에 베여나간 듯 벽의 잔해 단면이 무척 매끄러웠다.

잔해 아래에 펼쳐진 카펫은 꽤 예전에 흐른 피로 굳어있었다.

아무래도 산산조각난 시체가 잔해 틈에 깔려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잔해를 들추어 볼 용기는 없다.

"어디로 간 거야, 아일린."

"쿨럭. 쿨럭. 거기, 누구냐!"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일까.

여긴 나름 오래된 보금자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게 당연한 곳이다.

그런데 겨우 한 번. 그것도 피가 목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었는데 다행으로 여기게 될 줄은.

"코넬리아에요, 레오날 경."

"하하. 무사했구만! 쿨럭. 그럼 성녀 후보님도 거기 계신가?"

갑옷이 죄다 박살나고, 피칠갑을 한 레오날이 아직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녀 후보. 세실리아.

세실리아도 별실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아일린의 옆 방.

나는 거동이 불편한 레오날보다 빠르게 세실리아의 방으로 가 문을 열었다.

이미 반쯤 열려 있었다. 노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해주었으면 하지만.

"윽."

세실리아는 죽어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후를 잡히고, 날카로운 걸로 목이 그어졌다.

그리고 베여버린 자기 목을 부여잡고 놀란 얼굴로 몇 걸음 물러나는 걸 뒤쫓겨 배를 몇 번 더 찔렸다.

그렇게 즉사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뒤늦게 찾아온 아일린이 감겨주고 간 것이 아닐까.

......이렇게 허망하게 죽기는.

나는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절뚝대며 겨우 다가온 레오날이 방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아."

레오날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갑작스레 레오날이 내게 무릎을 꿇었다.

뭐야. 뭔데.

내가 아니라 내 뒤겠지.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방금 전까지 죽어있던 세실리아가 멀쩡히 서있었다.

심지어 내가 어, 어, 하고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에 손을 뻗어서 레오날을 가리키고, 그것만으로 심한 꼴을 하고 있던 레오날을 완치시켰다.

"메흐레니아의 성녀가 여기 오셨도다! 이 유르체피아에 신실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넘어 인간 세계에 되돌아오셨도다!"

"그렇게까지 추켜세울 필요는 없는데...."

세실리아가 중얼거린다.

뼈가 보일 만큼 깊게 베였던 목은 어느새 핏자국만 남기고 멀쩡히 나아 있었다.

텅 비어있던 눈은 다시 빛을 담고 있었고, 찔린 배 역시도 칼자국이 난 잠옷 구멍 안쪽으로 하얀 살색을 보이며 멀쩡하다는 걸 알렸다.

"아무래도 진짜 성녀가 된 모양이네요, 세실리아 아가씨."

"그냥 죽기 싫어서 노력했던 게 결실을 맺은 것뿐이에요. 책에서 발견한 반쪽짜리 부활 기적, 어떻게 일단 구축은 해놨었지만, 이렇게 금방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반쪽짜리?"

"죽은 뒤에 발동하는 거래요. 발동 안 되면 죽는 거고. 심지어 출전 문헌 자체도 무척 옛날 거라 별 기대 안 했었는데."

세실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 이상으로 기쁨이 숨겨지지 않고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일린 찾고 있죠?"

"아. 네."

"제가 부를게요."

어떻게, 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세실리아가 손에 들고 있던 성서를 펼치고 기도문을 읊자, 온 저택에 치유의 파동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나야 어차피 타인의 회복마법을 받지 못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레오날은 무척 놀라 꿇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너머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다시 꿇더니, 오오오, 하는 경탄의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두 손을 꾹 쥐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뭐야. 뭔데.

나도 따라가 하늘을 보았다.

새벽 하늘 가득히 황금빛의 마법진이 펼쳐져 어둠을 지워내고 있었다.

"대단하죠, 저? 이래 보여도 주인공이거든요."

그러고 보면, 마력 보유량이 SSS급이라던가.

세실리아가 주인공이니 뭐니 무슨 소리를 한 것 같긴 한데, 하늘에 펼쳐진 걸 보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 저택에서 저 멀리 마을 변두리까지 닿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의 세부 형태가 그다지 정교하진 않아도, 거대함이란 그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을 압도하기 마련이다.

"세­실­리­아!!"

"봐요. 왔죠?

바깥에서 창문을 깨트리며 아일린이 뛰어들어왔다.

그러더니 유리를 툭툭 털면서 달려가 세실리아를 품에 안았다.

말해둘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여긴 3층이다.

"흐윽, 흐아앙. 죽은 줄 알았잖아, 세실리아."

"아, 으응. 응. 미안해, 아일린. 이젠 괜찮아."

아니, 뭐. 친구 사이니까.

세실리아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세실리아는 천상 여자아이잖아?

나랑은, 다르다..., 이거, 야아아....

다른 게 없잖...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일린."

"흐아앙, 코넬리아아아...."

아일린의 이름을 살짝 불러보았더니, 세실리아에게서 떨어져 내게로 비틀비틀 걸어와 눈물을 쏟으며 나를 안았다.

그래, 별 거 아니라 그냥 감격해서 그런 것뿐이라니까.

에히히.

"성, 녀님이다."

다른 사람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데트. 많이 다치진 않았지만, 기계팔이 망가진 채였다.

그녀 세실리아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만, 살아만 있어도 고마워서­

"성녀님! 스승님이! 제 스승님이!!"

비통으로 가득 찬 목소리.

"......듀오토가?"

"스승님을 구해주세요!"

"어, 으응? 지금 갈게. 어디­"

나는 오데트에게서 구해달라는 소리가 나오기도 이전부터 이미 아일린에게서 떨어져, 수색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유르덴의 공작부인이 있는 방. 그 앞.

정말로 희미하고 미약한 반응이 돌아왔다.

망설이지 않고 내달렸다. 혹시나 싶어서 글로리아의 위치도 수색했는데, 그녀 역시도 듀오토의 옆에 있었다.

"......듀오토."

"늦었어요, 코넬리아."

듀오토는 유르덴 공작부인의 방, 그 커다란 문 앞에 선 채로 죽어 있었다.

상처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문은 굳건히 닫힌 채로, 밤이 내려 문이 한 번 닫힌 이래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걸 쉬이 알 수 있었다.

사방에 하얀 암살자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12명 정도일까.

이 모든 적을 혼자 상대한 걸까. 아니면 오데트가 함께 했을까. 저 멀리 짜부라진 육편 덩어리만큼은 글로리아가 처리한 것이겠지만.

글로리아는 검에 몸을 지탱한 채 만족스레 눈을 감은 듀오토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차고선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듀오토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요?"

연기를 뱉어낸 글로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나는 서서 죽은 듀오토를 복도에 눕히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상처가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게요."

언제나 싫은 녀석이었지만.

지금 기분이 제일 더럽고 싫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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