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선제공격이란 최선의 방어
* * *
깊은 밤.눈이 뜨였다.
나는 조용히 소리를 죽이고, 침대에서 일어나 환도를 찾았다.
칼자루를 손에 쥐자 감각이 넓어지고, 마음이 조금 고요해졌다.
내 방에서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일린은 따로 별실을 받았고, 테레제가 쳐들어오지도 않았다. 이 방에는 나뿐이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날.
나는 머리를 한 번 흔들어 털어낸 다음, 곧바로 문을 박차고 방에서 뛰쳐니욌다.
목적지는 말할 것도 없이 테레제의 방.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목소리.
복도의 어둠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하얀 머리카락. 빨간 눈동자. 망가진 웃음. 붉게 번들거리는 대형 나이프 한 자루.
마체테보다 조금 짧은 정도의 단검이다.
후드가 달린 반재킷. 탱크탑과 핫팬츠.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스물다섯에서 스물일곱 정도. 어딜 봐도 아일린이나 나보다는 확연히 나이가 많아 보였다.
141번인 아일린이나 1725번인 나도 누나, 언니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런 우리들보다도 8년 정도 더 나이가 많다면 분명 초창기 실험체겠지.
"어머. 이제 보니."
그녀가 몇 발자국 더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다.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항상 깨끗하던 복도에 붉게 도장이 찍힌다.
그녀가 걸어나온 뒤쪽으로 나이 지긋한 하우스가 복도 중앙에 쓰러져 작은 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마르타. 테레제에게 항상 엄격하게 굴던 분이었다.
"우리 동생이잖아?"
"너 같은 거에게 동생 소리 듣고 싶진 않은데."
칼을 뽑아들었다.
새까만 칼날은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만, 이런 밤에도 여전히 매섭게 예리했다.
"가족끼리 서로 미워하진 말자. 응?"
"헛소리 지껄이지 마."
그 순간이었다.
내 말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저택 어디에선가 굉음과 폭발이 일었다.
누구인지, 어디서인지 신경쓸 시간은 없었다.
눈앞의 후드 재킷 여자가 쏜살같이 뛰어들어 내게 단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하아아앗!!"
환도를 크게 휘둘러서, 다가오는 단검끝을 쳐낸다.
이런 여자에게 붙잡혀 있을 시간 없어.
어서 테레제에게 가야 해. 다른 암살자가 상대라면 모를까, 이녀석들이라면 분명 테레제의 결계 따위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거다.
"언니를 봐 줘! 다른 생각하지 말고!"
"윽!?"
하지만, 칼날이 쳐내어져 자세가 무너진 여자 암살자는 오히려 웃으며 스스로 자세를 더 크게 무너트려 이어지는 나의 연격까지 피해내었다.
그리고는 마치 거미나 파리 같은 모양새로 내 시야의 사각으로 몸을 숨기더니, 어느새 천장에서 떨어지며 칼날을 휘둘러왔다.
다만 기척이 느껴져서 쳐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환도로 떨어지는 단검을 막고, 칼날과 칼날이 맞닿은 자리에 힘을 실어서 암살자를 당겨내렸다.
지상으로 되돌아온 암살자가 실실 웃으며 몇 발자국 떨어지더니 외친다.
"너, 이름은 있니? 물론 있겠지! 이런 부잣집에서 살고 있으니!"
"코넬리아. 코넬리아 웨블리."
"언니의 이름은 테르나. 테르나 자네트란다. 49번째로 은혜를 받았지. 친구들에겐 본명보다 '말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지만."
파리 아닌가.
그나저나 말벌이라. 사람은 이름을 닮는 말도 있으니, 이 여자, 분명 자기 칼에다가 독을 발라놓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저번에 오우거의 타액 같은 것이라던가.
애초에 암살 임무이기도 하고.
조심하는 편이 좋겠어.
테르나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허리춤에서 다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이도류. 한 자루를 높게 상단으로, 다른 한 자루를 살짝 낮게 가슴 언저리에서 중단으로.
방금 전까지 기상천외한 움직임으로 빈틈을 노리던 모습이 우습게도, 단검 두 자루의 길이가 완전히 똑같다는 것만 제외하면 상당히 오소독스한 모습이다.
"너는 어떤 짐승이려나."
"유감스럽지만 사람이야."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탁, 타타닥. 짧은 보폭과, 순식간에 거리를 지우는 긴 보폭.
눈앞까지 다가온 테르나가 검을 휘둘렀다.
매서운 속도였다. 짧은 칼날은 마치 날개가 달린 듯 공기를 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캉, 짧게 쳐낸다. 테르나의 검은 두 자루였고, 칼날 하나가 짧게 튕겨나간 순간에 다시 다른 한 자루가 다가온다. 다시 짧게 튕겨내는 수밖에.
"네겐 거북이 어울리겠어! 언제까지 계속 막기만 할 테냐!"
빠르다. 무척 빠르다.
이도라면 보통 짧은 한 자루를 방패 대용, 칼날이 긴 나머지 한 자루를 주력 무기로 사용하는 형식일 텐데, 테르나는 마치 폭풍처럼 쌍검을 두 자루를 전부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
그래, 난타.
두들겨지는 야채의 기분을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만.
칼날 길이의 이점을 벌기 위해 간격을 벌려도, 테르나는 끈질기게 덤벼들었다.
역시 파리다. 말벌 같은 게 아니야.
자꾸 가까이에서 웅웅거리며 짜증나게 굴잖아...!
"흐랴앗!!"
테르나가 거친 기합을 내지르며 단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다른 단검 하나는 횡으로. 내 목을 노려온다.
언제까지 휘둘려줄 줄 알고.
환도를 크게 사선으로 그어내렸다.
내 환도를 내려찍고, 그대로 움직임을 막고 있던 단검까지 통째로 쳐내고, 그와 동시에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킥. 테르나의 복부에 돌려차기를 찔러넣는다.
"쿠엑!"
"윽."
걷어차서 거리를 벌리는 데엔 성공했지만, 내 목으로 휘두르던 단검을 어느새 역수로 바꿔 잡았던건지, 내 종아리에 단검이 박혀 있었다.
상처는 어쩔 수 없다. 회복하면 그만이고. 다만 위험한 건 독이다.
그러니 독이 돌기 전에 죽인다.
그래,그거면 되는 거잖아.
"찔렸구나, 코넬리아!"
테르나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내 시야의 사각 쪽으로 크게 뛰었다.
독이 돌 때까지 피해다닐 생각인가?
단검이 박혀있는 오른쪽 다리를 땅에 크게 내딛었다.
말할 것도 없지만, 더럽게 아프다.
그리고 그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크게 한 번 회전하면서 전력을 담아 허공을 베어갈랐다.
쿠르릉, 검이 닿은 자리의 벽이 무너진다. 애꿎은 화분 하나와 조각상 장식 하나도 박살나 흩어진다.
살을 벤 감촉은 있었다, 만.
"쿨럭. 쿠헹헤헤..., 그 상처로 땅을 그렇게나 힘차게 내딛을 수 있을 줄이야! 사각으로 돌아간 게 내 실수였지."
"젠장."
테르나는 양 팔이 칼날 째로 썰려나가고 허리에서 피를 펑펑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은 채로 잘만 나불대었다.
보통이라면 더 이상 싸우지 못할 상처다. 사람은 보통 저런 꼴이라면 금방 죽는다.
"읍, 우으윽.... 콜록, 쿨럭......"
"독 맛은 어떠니, 우리 동생? 아니지, 하하! 피 맛밖에 안 나겠구나!"
속에서 올라오는 피를 잔뜩 뱉었더니, 잠옷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호러 영화에 나오는 귀신 같은 꼬라지지 않을까 싶다.
다리는 완전히 마비되어서 움직여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 이 정도라면 팔이 없어도 밟아 죽일 수 있어. 그럼 전하도 포상을 주시겠지...!"
"......어딜."
어? 하고. 테르나가 물음표를 띄웠다.
그 얼빠진 머리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녀의 목을 베고 날아간 환도가 복도 저 끝까지 날아가서, 또 죄 없는 화분까지 깨트리고 벽에 박혀 대롱대롱대었다.
"게다가 이 독이라면,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고."
무릎을 꿇고 종아리에서 칼을 뽑아낸 뒤에 조용히 해독마법과 회복마법을 병용해서 사용했다.
5분 정도는 움직일 수 없으려나.
"무슨 마음 편한 소리를 하고 앉은, 거야......."
몸을 채찍질해 일으킨다.
내던져버린 환도 대신에 나이프를 들고 움직인다.
지금도 테레제가 괴한에게 공격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움직여야만 했다. 아직은 내 몸에 상처가 새겨지지 않았다만, 그래도 가능한 한 빨리 테레제에게로.
바로 옆 방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다리를 질질 끌며 가자니 너무나 멀었다.
저택이 빌어먹게 큰 탓이다.
"윽?"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등골이 싸늘해서, 발을 멈춰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쿵하고, 피아 구분하지 않고 저택 전체에 중압이 걸렸다.
글로리아의 마법이다. 녀석들에겐 그다지 통하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힘으로 짓누르려는 모양이다.
일반인 고용인들은 아마 온몸이 짜부라지는 듯한 고통에 울고 있겠지.
그래도, 불길함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더욱 나는 발을 옮기려 했다.
잠시 발을 멈춘 건 내 불길한 예감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글로리아의 마법 탓에 더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가 터져 피가 줄줄 새는 다리를 앞으로
"크아아아악!!!"
내딛었다간 죽었다.
쿠르릉, 하고 벽이 크게 무너지고, 눈앞 가득히 뭔가가 튀어나왔다.
예전에 어디 가서 사왔던 거대한 자주포. 보레오가 카르칸. 그것이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기라도 한 것마냥 벽을 부수고 복도를 으깨며, 실시간으로 고철덩어리가 되어가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내 눈앞에서 멈췄다.
방금 전의 비명소리는 그 카르칸에 깔린 채, 그 밑에서 카르칸이 저택을 부수며 고철덩어리가 되어갈 때 함께 갈려나간 한 알비노의 것이었다.
지금은 사람 형상을 한 고깃덩어리다.
운이 좋아서 글로리아의 중압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나도 같은 꼴이 됐을 거다.
"이, 이건."
"......헉, 허억. 허억."
무너진 벽 뒤편에서, 테레제가 보레오가 카르칸 쪽으로 팔을 내민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 아프거나 힘들어서, 혹은 글로리아의 중압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아가씨 방 정도는 제외하는 융통성이 있었는지, 중압이 걸려있진 않았다.
다만 테레제는 지쳐서. 그저 정신적으로 지쳐서 그랬다.
방 한 구석에 레라가 반쯤 파괴된 모습으로 앉아있었고, 카틀레야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처럼 어디선가 발이 묶인 모양이었다만.
"아, 아가씨."
"코넬리아........"
테레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작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항상 두르고 다니던 수 겹의 결계는 죄다 파괴되어 있었고, 옷차림도 반쯤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꼴이 그게 뭐야! 몸은 괜찮아? 피가 이렇게 많이......."
"아가씨야 말로 괜찮으세요. 방금"
문득 떠올랐다.
고깃덩어리의 머리에다가 나이프를 내던져 확실하게 죽였다.
숨을 쉬고는 있었는지.
이미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죽인 걸로 해야만 했다.
"윽."
"아가씨가 죽인 게 아니에요. 제가 죽였어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아가씨."
내 말을 알아들은 테레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보레오가 카르칸에게로 향했던 손을 자신에게로 되돌렸다.
작은 손바닥. 피 하나 묻어있지 않은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천천히.
손바닥의 떨림이 멎어간다.
"괜찮아, 나는."
"아녜요, 아가씨. 제가 죽인 거예요. 아가씨의 코넬리아가."
"응, 알아. 알고 있어, 코넬리아."
테레제가 다가와서 나를 안아주었다.
내 피가 테레제에게도 묻는다. 내게서 흘러내린 피에도 독이 섞였을 지 모르니 테레제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테레제의 따스함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코넬리아가 고생하고 있다는 거. 엄청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죄송해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그런 걸로 자책하지 마. 나는 여기 있고, 너도 내 곁에 있으니까, 그걸로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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