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안부 묻기
* * *
우선, 유르덴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제도 드라킬라이나가 그러했듯, 저택 역시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인간 세계는 벌써 만 년이 넘도록 유지되었으니, 고작 몇 개월로 뭐가 변할 리가 없다.
사람 하나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없고.
나는 메이드복으로 갈아입고, 방에서 나와 테레제에게로 향했다.
"앗. 아일린."
"세실리아?"
세실리아가 유르덴 저택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건 이미 왕자의 입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어색하네.
아일린이 옛 주인이자 친구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사이, 복도 모서리로 글로리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만 내밀고서, 표정으로 따라오라는 듯 말한 뒤에 사라져버렸다.
"잠시 누구 얼굴 좀 보고 올게."
"응? 누구?"
"하우스 키퍼."
그다지 이야기 나누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한 번은 글로리아와 이야기를 해야만 할 테니까.
모서리를 지나치니, 언짢은 얼굴의 글로리아가 서있었다.
"잘도 돌아왔네요. 선물은 어떠셨나요."
"제 체질은 견디는데, 아일린의 체질은 견디지 못하더라고요. 그냥 깨졌어요."
"아하, 그래서 돌아왔다?"
"아뇨. 여기가 제가 있을 자리라서 돌아온 것뿐인데요."
"......하아."
글로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조금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럼에도 어딘가 후련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죽는 그 순간까지, 설령 주름이 자글자글해서 낡은 몸으로 더 이상 거동이 불가능한 날이 오더라도, 항상 아가씨 곁에서 아가씨를 섬기도록 하세요."
"물론이에요."
"저는 당신보다 오래 삽니다. 그러니 당신의 늙음이 제 젊음을 한없이 추월하더라도 이 맹세는 결코 무를 수 없어요."
"오히려 아가씨께서 먼저 맹세하셨어요. 제 팔다리 두 세 개 잘려나간다한들 저를 버릴 리 없다고요. 그러니 저도 늙어 죽을 날이 온다 한들, 아가씨께서 저를 버리지 않는 이상 제가 아가씨를 먼저 버릴 일은 절대 오지 않아요."
글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편한 표정.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말해보았다.
"그, 팔찌... 남은 거 있나요?"
"......욕심도 많아라."
"아, 아니. 이건 욕심이 아니죠! 애초에 졸업하게 되면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그랬잖아요!"
"아가씨께선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성별 고정 건도 애초에 오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게 당신 부주의 탓에 여자로 고정된 것이며, 심지어 방금 아가씨를 영원히 섬기기로 하셨네요. 새 계약이 헌 계약을 덧씌우니 이제 그런 팔찌따위 필요없는 거 아닌가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는 할 말이 전혀 없긴 한데.
아니 그래도 있잖아 아니 아
"아 몰라요! 팔찌 줘요! 팔찌! 급하단 말이에요!"
"남은 거 없어서 못 주네요. 미안해요."
"흐아아앙......."
울고 싶어라.
"연인 때문이라면 아무 상관 없지 않나요? 저희 엘프야 주신 호라티우스 님이 동성애를 꺼리시니 맺어지는 게 어렵지만, 인간의 주신 메흐렌은 꽤나 권장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난데없이 그런 주제를 들이밀지 마세요."
"뭐라더라. 성교란 영혼의 교감이나, 이성과의 성교에선 필연적으로 번식이 주된 목적이 된다. 동성과의 성교는 그 필연적임을 제거하여 오직 영혼의 교감만을 목적으로 하니, 이보다 고결한 교감은 없다. 였던가."
무슨 고대 그리스인 같은 소리 하네.
애초에 이놈의 인류 제국이 1만 년 동안 발전 하나 없이 제자리 걸음하는 게 다 그놈 메흐렌 신 탓이다.
신격이 '영원불멸'과 '운명'인 탓에, 더 발전하지 않으며 옛 것을 영원불멸히 지키는 걸 교리로 삼고 있는데 그딴 종교가 또 국교로 지정되어있다.
정확히는 옛 것이 아예 없었던 것이 될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금하던가 뭐라던가. 잘 모르겠다만 어이가 없어서.
그러니 그 신놈과 신도들이 하는 말은 걸러듣는 게 최선이다.
"됐거든요. 남자가 남자로 되돌아가겠다는데 신이고 종교고 무슨 문제야."
"아. 박히는 것보다 박는 게 좋다는 거네요. 그럼 설마 벌써 박혀 봤나요? 아니면 능동적인 비교가 안 될 텐데."
"죄송합니다. 저희 이야기 그만 하죠. 괜히 팔찌 이야기 꺼낸 것 같아요. 저 그만 가볼게요."
"어머어머. 아직 처녀라면 제 첫경험의 경험담을 기쁘게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바쁘다면야 뭐. 수고하세요."
"아, 예. 그쪽도 고생하던가 말던가."
전혀 듣고 싶지 않다.
그쪽 현손 얼굴까지 봤으니, 어림잡아도 최소 200년, 최대 400년 정도 옛날 이야기에, 하프 엘프 나이까지 생각하면 고무줄처럼 더 죽죽 늘어나겠지.
하여간에 할머니잖아.
"어라?"
"안녕하세요, 코넬리아 언니!"
글로리아에게서 도망쳐 아일린에게 되돌아오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 오데트. 듀오토 경도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좋은 아침이다."
"에히히! 저 이런 큰 집에 취직했어요! 자랑스러워요!"
"그래, 그래."
듀오토와 오래 전에 잃어버린 팔을 드워프틱한 황동제 유압 팔뚝으로 대체한 오데트였다.
취직했다는 오데트는 메이드복 차림일 줄 알았더니, 그녀 바로 옆에 선 듀오토와 비슷한 느낌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는 도끼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철괴를 메고 있다. 오히려 강철로 만든 거대 부채라고 말한다면 더 설득력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기사가 될 생각인가?
그러고 보면 예전에 유르덴 공작이 내게 기사가 되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지.
이제 소원수리를 한 것 같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거야?"
"아냐, 아무것도. 그냥 내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
"그래."
"얼굴 한 번 봤으면 이제 되었겠지. 그만 따라와라, 오데트."
"넷? 네, 듀오토 사부님!!"
오데트가 크게 외치더니 듀오토를 졸졸졸 따라간다.
듀오토도 듀오토 나름대로 유한 표정을 짓고 잇었다.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안 보여준 표정이다.
아니 뭐, 나는 애초에 신원불명의 의심스러운 사람이었었으니까, 듀오토의 반응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질투냐고?
같잖은 소리하네 짜샤 옥상으로 따라와라 마구 두들겨주마
...그냥 그거다.
저 자식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오데트에게 그랬더라면 이판사판으로 개길 생각이었지.
그뿐이다.
그뿐이라고. 더 뭘 바래?
"테레제에게 갈 거죠?"
누군가 했더니 존재감이 옅던 세실리아였다.
에드윈 탓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반쪽이었다.
저러고 있으니 얘를 에드윈에게 데려다주는 게 정말 맞는 건지 모르겠다야.
"저도 같이 갈게요."
"뭐, 그거야 상관 없지만."
복도를 걸어, 테레제의 방으로 향한다.
세실리아는 전혀 말이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던 거야.
힘들 만도 하지만....
잡생각을 떨치고, 문에 조용히 노크했다.
"코넬리아!"
노크 소리만으로 나라는 걸 알았는지, 문 안 쪽에서 테레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열심히 뛰어오는 소리. 문을 열어준 건 테레제였다.
이것만 해도 당황스러운데,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내게 뛰어들어 안겼다.
"으음, 아가씨? 빨리 나오셨네요?"
"역시 코넬리아는 메이드복이 어울려. 진짜 좋아해."
"어어..., 감사합니다?"
뭔가 근성체로 말하게 되네.
테레제가 자기 얼굴을 내게 자꾸 부볐다.
비비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얼굴을 가슴에 파묻으려 드는 거 같은데.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딱 멈췄다
고개를 옆으로. 시선은 고정. 아일린의 얼굴을 보고 있다.
아일린도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테레제와 얼굴을 맞추고는,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뭔가요. 저는 왜 보는 건가요?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이건 내 거야."
"밤엔 꼭 돌려주세요."
아일린이 테레제의 도발을 유연하게 흘렸다.
그래, 잘 했어, 아일린.
본전도 못 건진 테레제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더니, 내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일단 안으로 들어와, 라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레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카틀레야가 방구석의 차 테이블에 총기손질포를 올려놓고 권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메이드 맞냐, 저거.
"......제가 차를 타올게요."
"됐어, 그럴 필요 없어."
"무서워라, 무서워. 선배님, 벌써부터 후배를 갈구려는 건가요?"
쟤 좀 나랑 안 맞네,
하여간에 자리에 앉자, 세실리아가 크흠, 하고 목을 고르는 소리를 냈다.
자기한테 잠시 주목해달라는 신호다.
"잠시 먼저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제가 예전에 에드윈과 오웨인, 그리고 성당기사 몇 분과 실험체의 뒤를 파던 시절에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암살자의 습격이라는 소리에 순간 등골이 시원했지만,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섯 명 정도였는데, 전원이 코넬리아 양이나 오데트 양처럼 마법 저항력을 가진 알비노였었죠."
"아. 누구 말하는 지 알 것 같아. 윌리엄의 정원에서 봤었어. 안 그래, 카틀레야?"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근 윌리엄 심문관의 심문, 으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친구들은 리더 같은 걸 맡고 있는 친구를 두고 '13'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아마 13번 실험체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는데, 혹시 아는 것이 있는지."
"13번?"
모른다.
애초에 내가 아는 실험체 가운데 번호가 가장 빠른 건 아일린이다.
물론 71번이나 102번 같은 숫자가 적힌 관물대를 지나치다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친구들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13번이면......."
"아는 것 있어?"
"나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처음 몇 명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 그것도 기사를 상대로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 같아. 그렇다면 그 13이라는 녀석이 정말로 13번 실험체일 경우에는,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거야. 그런데 우리 시설에는 그렇게 나이 많은 실험체가 한 명도 없었잖아?"
"그랬, 었지."
"음. 그다지 도움 안 되는 정보네."
테레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나와 아일린을 보았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는 듯한 눈이었다.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둘."
"네?"
"왜요."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방금 전까지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곧바로 이상한 직구를 내던져버리네.
테레제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만.
전혀 장난스럽게 보이지가 않네. 그림자라도 좀 지워줬으면 좋겠다.
"키스려나."
"......뭐야, 코넬리아. 겨우 그 정도야?"
"네. 아직은 키스까지만 했습니닷."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네.
테레제는 그런 나와 아일린을 흥미 깊은 눈으로 살펴보다가,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뭔가 이긴 듯한 얼굴을 했다.
얼굴의 암운이 사라져서 다행이긴 한데. 거 좀. 그.
조금 그렇네.
"뭐야! 그 정도면 아직 연인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
기쁜 모양이다.
테레제가 기쁘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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