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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77화 (77/100)

〈 77화 〉 설득

* * *

"......그럴 순 없어."

우리 이야기를 들은 에드윈은 씁쓸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뭐.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아무리 테레제가 무기를 판다고 비난하고,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인체 실험을 저지해보겠다고 노력한 에드윈이었지만, 정이 많은 자라는 것 역시 그다지 잘못된 설명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가 정이 없는 성격이었더라면, 정말로 정의에 미친 사내였더라면, 테레제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에 군을 끌고와서 유르덴을 선제 타격하려 했겠지.

왕위계승권을 버릴 일도 없었을 거고.

"그 녀석이 아무리 잘못된 짓을 저질렀어도, 아무리 인간 같지 않아도, 설령 너희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수라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내 동생이다. 물론 너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을 죽이는 데 동참하라니. 그게 어디 형이 된 자로서 할 짓인가."

"이대로 가면 그 동생에게 숙청당할지도 모를 인물이 태평하게 늘어놓는 소리 치고는 너무 정론입니다만."

아일린이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에드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옅는 미소를 지은 채 말하는 것이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라 본다. 그를 위해서 용사의 동료가 된 것도 있으니."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오웨인이 걱정할 만 하네요. 그런데 윌리엄도 왕자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글쎄. 부덕한 형이라서 내 아우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모르겠군."

"테레제도 윌리엄을 대뜸 죽이려 하진 않을 거예요. 나쁜 짓을 했다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요? 그러니 동생 개과천선 시킨다고 생각하고 한 번만 도와주시죠."

내 말에 에드윈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한숨을 뱉으며 말한다.

"설령 그렇다 한들 유르덴이 아닌 이클리시아의 법령 아래에 다뤄져야겠지. 아무래도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군."

"......정 도울 수 없다면, 나는 입막음을 해야해."

"잠깐, 아일린."

에드윈의 답을 들은 아일린이 흉흉한 분위기로 말했다.

칼을 뽑아들기 일보직전. 나는 아일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길드 안에서 칼부림을 벌였다간, 그것도 제국 수도의 모험가 길드 안에서 함부러 일을 키웠다간, 윌리엄에게 닿긴커녕 여기서 수감되고 사형으로 끝나지 않을까 싶다.

"테레제에겐 큰 아픔을 줬었지."

"잘 알고 계시네요."

"네게도 빚이 있고 하니, 나도 굳이 이번 일에 대해서 입 밖으로 꺼내진 않겠다. 잊어버리도록 하지. 다만 부탁 하나만 들어다오."

"뭔데요."

"윌리엄을 죽이지만 말아다오. 나는 어차피 왕위계승권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이클리시아의 왕자가 아니라, 한심한 동생을 가진 한낱 형으로서 그대에게 하는 부탁이니, 한 번만 들어주게나."

일이 점점 복잡해지네.

그냥 목을 따는 게 편할 텐데, 테레제도 에드윈도 진짜....

"그렇게 되면, 아마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울 거예요."

아일린이 말했다.

에드윈은 아일린의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즉답했다.

"삶이 원래 그렇지 않나."

"왕자님. 뭐 테레제랑 헤어지고 사람이 바뀐 거 같은데요."

"그냥 뭐. 그거다. 용사놈 좀 질척거리긴 해도, 여행을 다녀보니 조금 뭔가 알겠다는 느낌이 들더구나."

아, 그러세요.

그러신 사람이 아직도 세실리아를 못 잊고 용사 옆에서 저러고 있을까.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여행 재밌게 다니세요."

"그래. 너희 앞길에도 여신 페리에 릴리의 보살핌이 있기를."

별 소득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층을 내려갔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에드윈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이클리시아 궁정이나 윌리엄의 별궁에 침입하는 건 아무래도 상당히 다사다난한 일이 될 것이었다.

"......."

"......안 돼."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등을 노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마법으로 가릴 만큼 가린 것 같지만, 나나 아일린에겐 통하지 않는다.

다만, 익숙하진 않아도 알고 있는 기척이었기에, 또 대뜸 칼부터 뽑으려 드는 아일린의 손목을 또 붙잡아서 막아야만 했다.

"쉿. 조용히 움직여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단검의 칼끝이 등에 닿고 있었다.

"알았어. 어디로 갈까."

"우선 길드에서 나가죠."

나는 얌전히 등 뒤의 소년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일린이 아니라 나를 노리다니. 물론 아일린을 노리는 것보다야 나를 노리는 게 쉽겠지만, 그게 눈에 다 보일 정도인가?

"저 주점 옆의 뒷골목으로."

"알았어. 그나저나 페르디온 군. 나는 어차피 네 말 다 들을 건데, 그만 그 흉흉한 칼 좀 치워주지 그래?"

"시끄러워요, 성녀 후보."

아?

성녀 후보?

아아아앙?!

뭐야, 이 자식. 지금 나랑 세실리아를 착각하고 있는 거야?

대체 왜? 아니, 왜......앗.

지금 내가 수녀복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에드윈이 성녀 후보인 세실리아를 연모하고 있으니, 수녀복을 입은 사람이 에드윈과 접촉한다면 그 사람이 세실리아겠구나­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나?

"드디어 나타났군요. 제 왕자님에게 꼬리치는 암캐년."

"......코넬리아?"

"그래, 아일린. 이제 됐어. 이 녀석 제압하자."

"너 언제 에드윈에게 꼬리쳤어?"

얘는 또 왜 이래.

"코넬리아?"

아일린의 목소리를 들은 용사 루카가 단검을 내 등에서 떼었다.

살짝 떨어져 고개를 돌리니, 루카가 무척이나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코넬리아? 누구지? 성녀 후보는 분명 세실리아라고. 그럼 이 여자는 누구야? 코넬리아? 어차피 왕자님에게 접근했으니까 똑같은 암캐 아냐? 성녀 후보건 코넬리아건 알 바 아니지 않아...?"

"쟤 좀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것 같은데."

"야, 아일린."

"어떻게 세실리아와 코넬리아를 착각할 수 있어? 우리 코넬리아가 훨씬 더 사랑스럽고 이쁘고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내가 물론 세실리아랑도 절친한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이건 똑똑히 흑백을 가려야지."

쌍으로 제 정신이 아니다.

칭찬? 어. 음. 칭찬이라고 생각하면? 으음?

고맙긴...? 한가?

기왕이면 멋지다던가. 남자답다던가...?

사랑스럽다? 어으으. 아일린에게 한정한다면 사랑스럽게 보여도 괜찮은...가?

"됐어, 몰라. 어차피 둘 다 왕자님께 꼬리친 암캐들이야. 죽이자."

"하아."

루카가 칼을 뽑자, 아일린도 한숨을 쉬며 칼을 뽑았다.

나도 칼을 뽑긴 했지만, 그다지 싸울 필요 없지 않나 싶단 말이지.

"피요! 피요요! 피요르 피요!"

"응?"

긴장감을 지우는 새 울음소리.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루카에게 겨누었던 칼끝의 높이가 살짝 내려갈 정도였다.

루카가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작은 새장이 저절로 열리더니, 안에서 샛노란 색의 빛이 튀어나와 루카의 어깨에 앉아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 세상의 사람이 새가 지저귀는 걸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난 정상이니까.

"정령인가?"

"......맞아, 프레이. 네 말이 맞아."

자기 어깨에 앉은 빛나는 새랑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루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조금 적의가 빠진 듯한 얼굴로 우리에게 물었다.

"아까 몰래 들었는데, 제 왕자님의 목숨을 왕자님의 동생이신 윌리엄 왕자가 노리고 있다는 건 사실인가요?"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윌리엄 왕자라면 에드윈 왕자가 왕위계승권을 놓던가 말던가, 가만두진 않겠지."

"......왕자님은 저를 위해서 왕위계승권을 내려놓았어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실리아를 위해서지 적어도 너를 위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탓에 윌리엄 왕자가 제 왕자님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저는 기필코 윌리엄 왕자를 막아야만 해요."

아니.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에드윈이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윌리엄이 어떻게든 에드윈을 끌어내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의 예언을 믿겠어요. 제가 윌리엄 왕자를 처리하는 걸 도와드릴게요."

"용사가 그래도 돼?"

"듣자하니 그 왕자님이 나쁜 일을 많이 했다면서요? 용사의 일은 사악을 처단하는 것. 그러니 지금 제가 당신들을 돕는 것 역시 모두 사악을 물리치고 정의가 바로 서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전혀 문제 없어요."

루카가 주먹을 꾹 말아쥐고 말했다.

상당히 긴, 짙푸른 머리카락. 오른쪽에 사이드 업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별빛이 들어찬 듯한 검은 눈동자. 긴 속눈썹.

호리호리한 몸집. 반바지에 매끈한 다리.

아무리 봐도 여자 그려놓고 남자라고 우기기 그 자체가 현실로 튀어나온 모습이다만, 일단 가슴은 없다.

어두워서 그렇지, 자세히 보니 울대도 멀쩡히 튀어나와 있네.

"바로 그 자식 죽이러 가요."

호전적이네, 이 녀석.

아일린은 의외로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옅은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으로 루카를 제지하고 입을 열었다.

"아직 하나가 부족해."

"뭔가요?"

"성녀 후보 세실리아. 루카 네가 세실리아를 명실상부한 성녀로 옹립시켜줘야겠어. 그녀 없이는 아무리 네가 용사라고 하더라도 이클리시아 왕국을 상대하긴 힘들어."

"......제가요? 잠깐만요."

루카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그 년이 제 파티에 들어오면 제 왕자님을 NTR 당할 게 뻔한 데, 왜 제가 그래야하는데요?"

"......네 매력이라면 세실리아를 이길 수 있어."

"아, 아니. 헛소리 하지 마요! 그냥 라이벌을 안 만드는 게 제일이거든요?!"

"하지만,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왕자가 죽을 텐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에드윈 님 옆에 365일 머무르면서 호위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 같기도 해요. 우리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죠?"

아, 거 곤란하게 진짜 왜 이러실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세실리아는 에드윈 안 좋아해."

아일린의 말이었다.

하지만 루카는 얼토당토 않다는 듯 버럭 외쳤다.

"에드윈 왕자님과 오래 계시다 보면 그분의 매력에 빠지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안 돼!! 맞아. 그리고 그쪽도 제 왕자님에게 쉽게쉽게 접근하지 마세요! 반해버렸다간 모조리 베어죽여버릴 테니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루카가 그렇게 버럭 외치더니 사라져버렸다.

"이거 곤란하네."

"괜찮아. 내게 수가 있어."

아일린은 곧바로 다시 길드로 발을 옮겼다.

에드윈은 왕자답지 않게 골아떨어진 엘프를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바빴다.

"또 뭐야."

"용사가 그쪽에게 세실리아를 붙이지 않으려고 악을 쓰던데요."

"......그럴 거 같더라."

"우리 좀 도와줘요. 에드윈 왕자님. 아니면 세실리아가 그쪽 파티에 들어갈 일은 영영 없을 거 같으니까."

"뭐, 라고?"

음.

효과적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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