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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75화 (75/100)

〈 75화 〉 상처 핥아주기

* * *

아이들을 모으니, 그럭저럭 30명 정도가 무사했다.

중상자까지 더하면 그 두 배 정도.

200명 정도 되던 아이들 가운데 4분의 1 조금 더 되는 아이들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호수 옆의 마을 쪽은 습격자의 기습을 받아 전멸.

겨우 가정을 꾸린 아이들이 모두 죽었다.

아일린은 무덤을 파고 아이들을 묻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일린의 옆에서 조용히 손을 보탤 뿐이다.

"언니. 뭐가 오고 있어요."

눈에 붕대를 두른 아이가 와서 말한다.

나는 아일린에게 조금 쉬어두는 게 좋겠다고 말한 뒤에, 붕대를 두른 아이의 뒤를 따라 교회의 입구로 향했다.

이클리시아의 문양을 내건 커다란 두돈반 트럭이 몇 대 굴러오고 있었다.

네 대. 대부분이 어리고 작은 아이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테레제는 아이들이 100명 정도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장 첫번째 차량에서 듀오토와 유르덴을 따르는 기사 다섯이 내렸다.

나머지 차량의 조수석과 운전석에서도 기사가 내려, 기사가 총 11명이다.

병사 하나 없이 기사만 11명. 무척이나 훌륭한 전력이지만, 이 사태에서도 큰 도움이 될는지는 장담하기 힘드네.

안 그래도 차량에서 내린 그들은 아주 쑥밭이 되어버린 교회의 참상에 놀라 기사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오래간만이군, 코넬리아. 여태 여기 있었나."

"아가씨가 보내신 건가요?"

"그래."

듀오토는 더 말하지 않고 기사들을 불렀다.

1반은 구조반과 장례반으로 나눈다. 2반은 의무반, 3반은 취사를 준비하라. 아무래도 오늘 하루 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그의 간결한 명령 아래 기사들은 일사불란히 흩어져 불쌍한 아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듀오토는 부하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게 말했다.

"이쪽은 우리가 맡지. 아이들은 구할 수 있는 만큼 모두 구해내어서 유르덴 령까지 확실하게 이송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너는 네 할 일을 하러 가라."

"당연히 제가 하겠지만, 하나만 물어볼게요."

"뭐냐."

"그 개자식의 목을 치는 건 듀오토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아마 저보다도 더 잘할 거예요. 근데 왜 저죠?"

"기사가 공공연히 움직이면 전쟁이 된다. 굳이 네게 맡긴 이유가 그것 이외에 또 있겠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 시대의 기사는, 내가 아는 시대의 전술핵무기나 다름없다.

마법사는 파괴마법을 전문으로 삼지 않는 이상 꼭 전투요원이라 말하기는 어렵고, 설령 전투요원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어릴 적부터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스스로를 단련한 전쟁병기들보다는 일반적으로 아래일 수밖에 없다.

그런 게 움직이면 확실히 전쟁이 난다.

"하지만, 제가 움직여도 유르덴의 일이라는 걸 다 알 텐데요. 테레제 아가씨께선 전쟁을 각오하시고 제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닌가요?"

"무슨 소리를. 너는 네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뿐이다. 이 교회에서 살아가던 아이들은 모두 네 가족이 아니었던가?"

"......맞아요."

"나는 네 보신적인 성격을 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그 소리가 왜 나오냐 이 말이지.

"보나마나 도마뱀 꼬리 같은 역할이네­따위의 생각이나 하고 있었겠지."

"아뇨. ...네."

나는 그다지 착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솔직한 편이긴 하다.

"걱정 마라. 아가씨가 너를 잘라낼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거야 제가 그쪽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걸요."

"어련하겠나."

"전 가볼게요. 준비해야할 게 있어서."

듀오토로부터 고개를 돌리니, 등 뒤에 아일린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하고 입을 열려고 하기도 전에, 아일린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끌려갔다. 무너진 교회 한 구석,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야 아일린이 겨우 손을 놓아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아일린."

"저 남자 뭐야."

아일린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순간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만, 그, 무어냐.

나도 아일린에게서부터 스승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적에, 그 스승이 남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조금 기뻐했었지.

아일린에겐 뭐라고 못하겠네.

안 그래도 지금 아일린은, 그다지 마음 상태가 정상이지도 않을 테고.

...일단 대답부터 할까.

"스승?"

"대체 왜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그다지 존경하지도 않고, 그다지 마음에도 안 들고."

"아."

아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으로 옅은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생각해보면 아일린도 자기 스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었으니까

이렇게 보면 비슷한 면이 있나.

"그래서, 스승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맞아. 이야기가 늦었네. 조금 따라와줘."

"응. 으응."

나는 무너져내린 교회 터로 가, 무너진 벽으로 입구가 딱 틀어막힌 지하실 앞에 섰다.

아일린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 거기 가까이 온 것만으로 검을 뽑아서 지하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잔해를 베어갈랐다.

쿠르릉. 무거운 소리와 함께 잔해가 계단을 구르며 안쪽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법적인 잠금이 되어 있던 문마저 질량으로 밀어버렸다.

조금 편하게 와이너리 아래로 내려와, 무기를 챙겼다.

환도. 아레이유. 권총.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뭔데?"

"윌리엄을 죽일 거야."

"그걸로는 부족해."

아일린이 짙게 적의를 드러내었다.

테레제랑 같은 생각인가. 나는 죽이건 말건 몰락시킬 수만 있다면야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하고 아일린의 적의를 담담히 받아주고 말했다.

"테레제 아가씨도 생포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죽이는 게 나을 거라고 봐."

"방식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 해. 그것보단 왕자잖아. 정말 괜찮겠어?"

"맞아. 걱정 돼?"

"솔직히 기뻐서 그래­라고 대답하긴 힘들겠네. 예전엔 잃을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둘이서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거야."

테레제의 명령이니, 셋이서 함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 순간 들었지만.

그걸 굳이 입에 담아 봐야 좋을 건 없겠네.

"그 녀석이 어디 있는 줄 알고? 나도 윌리엄 왕자를 한참 찾아다녔지만, 기회가 좀처럼 나질 않았어."

"그 방법은 이제부터 생각해보자. 나는 우선 네게 따라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었던 거니까."

"왜 안 따라가겠어? 어차피 이제 내겐 너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그거 살아남아준 아이들이 들으면 섭섭해 할 거야."

"그래..., 실언이었어."

아일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얼마나 울고 싶었을까.

얼마나 소리치고 싶었을까.

아일린의 마음을 위로해줄 방법은 없을까.

...지금은.

지음은 아니야. 안 돼.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아일린이 나를 불렀다.

나도 아마 아일린 만큼이나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코넬리아. 우리 가기 전에, 향 한 번 올리고 가자."

아일린이 쓴 목소리로 말했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아일린과 나의 방으로 향했다.

여기고 저기고 죄다 엉망진창이 된 가운데, 아일린의 방 만큼은 어째서일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

물론 제 모습을 간직했다고는 해도, 사방에서 쾅쾅 터져댄 탓에 가구는 죄다 넘어져 있고, 샤워실은 무너져 있었다.

아일린은 방의 문을 닫고 입고 있던 먼지 투성이의 옷을 벗었다.

쓰러진 옷장에서 새까만 상복을 꺼내어, 그것을 새하얀 나신 위에 걸치려다 말고 끝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무릎을 꿇은 채 목 놓아 울었다.

나는 그런 아일린에게 무슨 말 한 마디조차 꺼내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주는 것.

알몸으로 주저앉은 아일린의 체온이 너무나도 외롭게 느껴져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그제야 나도 아일린과 같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흑, 흐극. 으아아아. 아아아아아...."

"흑, 아으으으. 아일린. 으아아아아아앙...."

어느새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울고 있었다.

가슴을 칼로 찢어발기는 듯한 아픔이라는 것을 늦게도 깨달았다.

힘들 때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이 날카로운 고통을 견딜 수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아이처럼 얼마나 울었을까.

언제부터 잡고 있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서로의 손을 꾹 붙잡은 채, 침대를 등받이 삼고 방바닥을 의자 삼아 지쳐버린 몸을 반쯤 뉘이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진다.

달리 방 안에는 빛도 없어서 방 내부는 보랏빛과 석양의 붉은 빛이 기름과 물처럼 공존하며 물들어 있었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언니. 주무세요?"

아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데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방문 앞에서 이리저리 몇 바퀴 걸어다니다가, 끝내 다시 어디론가 가버렸다.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까마귀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 기사들이 죽은 아이들을 무사히 잘 수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코넬리아."

문득, 아일린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석양 탓에 더 붉어 보이는 아일린의 얼굴이 보였다.

"저번에 준다고 한 포상, 아직도 못 줬었잖아."

"응? 으응. 내가 아직 덜 나았으니까 기다리라고 했었지."

"이제 상복을 입으면, 나는 복수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벗지 않을 셈이야."

"......응."

"주지 못했던 포상, 지금 네게 줘도 괜찮을까."

윽, 하고. 신음소리가 새었다.

포상이라면, 저번에 하지 못했던 걸 끝까지 하자고 했었지.

지금은. 역시 조금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다시 아일린의 표정을 보았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보다도 더 창백한 얼굴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위안하고 싶다는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리라.

"나도 이런 내가 파렴치하다는 걸 알아."

아일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잠시 메말랐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방울지며 흘렀다.

너무 아프다는 듯. 아일린이 외쳤다.

"하지만, 나. 더 이상은 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아이들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아. 더 이상 내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 나는......!"

"괜찮아, 아일린."

아일린을 안았다.

소녀다운 가녀린 어깨에서 점점 떨림이 잦아들어간다.

"나는 네 곁에서 떠나지 않아."

"코넬리아......."

"그리고 포상은 네 복수가 끝나는 날 받을게."

"......후회할 거야."

"둘 다 멀쩡히 살아남을 거야. 함께라면 모든 게 잘 될 거야. 후회할 일 없어."

아일린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렇겠네­라고 말을 흘렸다.

"그럼에도 포상을 꼭 주겠다면 받기야 받겠지만, 나는 사랑을 나누고 싶은 거니...까...."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위안해봐야 별로 그렇게 기쁘지 않을 것 같다는 요지로 뱉은 말이지만, 조금 뭐라고 할까.

부끄럽네, 이거.

"풋."

"왜 비웃는 거야."

"아니. 코넬리아가 조금 로맨티스트처럼 보여서."

"그게 비웃을 건 아니잖아."

웃어주네.

그래도 다행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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