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최우선 명령
* * *
"적이다!!"
"비켜!!"
병사 둘을 날려버린다.
교회의 병사다. 죽이는 건 상책이 아니야.
칼 옆으로 갑옷만을 노려 후드려패면서 전진한다.
어디 하나 부러지고, 내장이 망가져서 죽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대한 죽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전진했다.
나는 몰라도, 테레제에 대한 감형이 될 수 있다면.
"놈을 붙잡아라!!"
"잔챙이는 빠져!!"
감형.
솔직히 말하자면, 테레제가 교회에게, 이단심문관 펠릭스에게 노려진 시점부터 이미 상황이 글러먹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이 테레제의 주도로 일어난 일이 아닐지언정 테레제가 여태까지 쌓은 업보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녀의 뒤를 쫓아와, 오늘에 이르러서 드디어 옷자락을 붙잡은 셈이겠지.
"정면으로 붙지 마! 지치게 해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테레제가 겁먹지 않게 하는 것.
그 아이의 지지대가 되어주는 것. 곁에 있어주는 것.
항상 당당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꽤 몸놀림이 좋군."
병사들 사이에서 제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걸어나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그녀는 좌우의 병사들을 물리며, 허리춤에서 전형적인 십자가 형태의 기사 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프레아네 수도기사단의 기사, 푸른 매 지제벨이다. 그대는 대체 무엇이기에 주님의 신성한 의지 아래 수행되는 교단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인가?"
"......코넬리아.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의 총애를 받는 레이디스 메이드. 그분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만 해."
"호오. 한낱 메이드 답지 않은 칼솜씨였거늘."
한 마디를 툭.
그리고 매서운 눈을 번뜩 뜬 지제벨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캉, 캉, 카앙. 칼날과 칼날이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한 순간에 몇 번. 다음 순간에 다시 십 수 번.
칼날이 경쾌한 비명을 내지른다. 계속, 계속. 쉬지 않고.
겹쳐졌다, 그렇게 여겼다. 빨라.
이내 카가가가각,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내 코앞에서 힘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승부수를 걸어온 것은 지제벨이었다.
밀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무척이나 완강한 여인이다.
"큭!"
크로스가드와 크로스가드를 얽힌 순간, 지제벨이 손목을 비틀었다. 내 크로스가드를 축으로 삼아, 검을 휘감으며 칼끝으로 내 목을 찌르려 들었다.
숙달된 검술. 비록 마력을 쾅쾅 터트린다던가 하는 화려함은 없지만, 검이 맞닿고 크로스가드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으랴아아앗!!"
"놀라운 힘이다!"
그냥 힘으로 검을 들어올렸다.
지제벨이 위에서 내려찍는 자세였으니 무겁긴 했지만, 그래도 힘으로 떨쳐낼 수 있었다.
지제벨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캉, 카강. 세 번의 불똥이 튀고, 서로간에 미묘한 간격이 생겼다.
지제벨이 검을 내렸다. 뭐야,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박수를 쳤다.
"빠르고 강인할 뿐만 아니라, 긍지를 아는구나!"
"뭐라는 거야......."
"바란다면 기사 추천장을 써주겠다! 연좌에 굴레에 고통받기 전에 프리아네 수도 기사단에 합류하라! 내가 보기에 그대에겐 한낱 공녀를 섬기다 억울하게 죽는 삶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더 어울릴 듯 싶구나!"
"시끄러워. 그보다 거기서 비킬 거 아니면 칼 내리지 마."
지제벨이 웃었다.
인심 좋은 할머니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전신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거칠게 피어올랐다.
"지금, 주님 영광을 위해 사는 삶 더러 '시끄럽다'고 일축하였느냐?"
"윽. 되, 되새기는 색은 잿빛......."
"신전을 장식하는 색은 황금. 무심자주를알기회가없던자신실하지못한자배교자이단자모두주님을배우지못하여그리하나니불운한그대들에게죄없도다단지내가그대들을가엾게여기어그대들을단칼에천상의주님곁으로보내어주님의은혜를배울수있도록길을열고자하나니그대들은너무심려치말라."
널 죽이겠다는 말을 더럽게 길게도 하네.
그것도 마치 랩이라도 하는 것처럼 빨리도 말했다.
지제벨의 몸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황금의 형태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주변의 병사들은 '지제벨 님이 또 이성을 잃었어'라고 소리치며 사분오열되었고, 그 이상할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마주한 나 역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아 정도는 아니지만, 그 아랫급은 충분히 된다.
이쪽도 사람 모습을 한 괴물이다.
지제벨이 검을 들었다.
치솟는 마력이 하늘을 꿰뚫을 듯하고, 주름이 잔뜩 새겨져 있던 얼굴은 무슨 조화로 회춘이라도 했는지 소싯적 소녀의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착각인가 싶었더니 진짜 마력에 뭔가 힘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광신도도 정도가 있지......!
"그래도 못 받아칠 정도는 아니겠는데."
어쨌거나 마력이고 마법이다.
저 정도로 거대하다면 아예 체질만으로 지워버리는 건 힘들겠지만, 나도 손 놓고 구경만 하진 않을 테니까.
차라리 방금 전 속검을 휘두를 때가 더 무섭다.
사방을 황금빛 불길로 살라버리는 지제벨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만!!"
목소리.
지제벨의 뒤에, 펠릭스 심문관이 나와 있었다.
지제벨은 그의 얼굴을 보더니, 눈썹을 크게 찌푸리고선 마력을 지웠다.
단아했던 용모에 오랜 주름과 함께 고아한 늙음이 되돌아온다.
"싸울 필요 없다. 테레제는 자수했다. 더 피를 볼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건 당신 생각이지요, 펠릭스 심문관."
"광신은 자유다. 다만 강요하지 말라. 그토록 그대에게 강조했거늘!"
"예전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이리 말하지요. 그대도 제게 미지근한 신앙자들을 못본 체 하도록 강요하지 말았으면 합니다만."
"일반인 앞에서 어려운 신앙교리에 대해서 대화하는 건 그만하세요. 머리 아프니까."
펠릭스 심문관의 뒤에서 테레제도 걸어나왔다.
나는 테레제에게 달려가려다가, 테레제의 손목, 그리고 레랴와 카틀레야의 손목에 걸린 수갑을 보고 발을 멈추고 말았다.
"아니야. 이건 적어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떄문에 수갑을 찬 건 아니야."
"네. 아가씨를 믿고 있어요. 절대 이런 데다가 포격을 할 사람이 아닌데다가, 설령 항하사 분의 하나로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 해도, 이곳에 아가씨가 나타날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래, 믿어줘서 고맙네. 이건 단순히 업보가 따라붙은 것뿐이야."
"지금 하는 말도 다 기록되고 있습니다."
펠릭스 심문관이 테레제에게 말했다.
테레제는 펠릭스를 한 번 찌릿 노려보더니, 한숨을 뱉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치 아일린처럼 내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리 귀여운 청개구리 코넬리아. 얼굴이 그렇게까지 죽상이 아닌 걸 보니 네 사랑하는 연인 만큼은 잘 구해낸 모양이구나."
"......혼자서 잘 버텼더라고요."
"그래. 그럴 것 같더라고."
"죄송해요, 아가씨."
"심문관님. 이 여자도 구속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 여자는 계속 이 수도원에 요양하고 있었어. 적어도 이 사건에는 연관이 없다."
"알겠습니다."
테레제가 외야는 조용히 좀 하지라는 표정으로 옆을 한 번 더 노려보고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더니 내 가슴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는지 시선이 그쪽에 고정되었다.
"......왜 이렇게 커?"
"네?"
"으으. 교회 밥이 우리 집밥보다 더 좋았던 건가? 뭘 먹으면 이렇게 커다랗게 변하는데? 내게 절반만 나눠달란 말이야!"
"아, 아니, 아가씨. 잠깐."
"대체 뭐야. 응? 유전자 차이야 뭐야?"
테레제가 수갑을 찬 손을 뻗어서 내 가슴을 붙잡았다.
헤응.
아니, 이게 아니라.
테레제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우악스럽게 내 가슴을 주물렀다.
나도 이게 내 가슴이라지만 나조차 저렇게까지 즐겁게 주물러본 적은 아직 없는데...!
그야, 좀 부끄럽잖아....
"아, 아으. 아가시이...."
"누가 멋대로 혀 풀리래? 안 되겠다, 코넬리아. 벌을 받아야겠는걸?"
"와오. 선배님 겁나 민감하신가 보네. 거기 병사들, 시선 치워! 뭘 보는 거야!!"
카틀레야가 헛소리를 하더니 몰려든 시선들을 물리쳤다.
병사들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리고, 나는 가쁜 숨을 뱉으며 테레제의 희롱하는 손에 내 몸을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안해, 코넬리아."
"괘, 괜차나여."
"......으, 으응. 안 미안해도 될 것 같아."
테레제의 마법을 금제하던 수갑이 내 몸에 닿아 파괴되었다.
그리고 테레제는 그 직후 내 가슴을 주무르면서도 은밀하게 마법을 사용해, 자신에게 걸려 있던 여러가지 도청 마법 등을 죄다 해체하고, 해체되었다는 것이 걸리기 전에 모조리 다른 마법으로 변질시켰다.
마력 조작력 하나 만큼은 희대의 천재라고 하니.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는 결계와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결계평소에 사용하고 다니던 그거까지 전부 사용하고, 내게 명령했다.
"윌리엄을 죽여."
"괜찮나요? 정말 그래도 괜찮나요?"
너무나도 바라는 바다.
그렇기에 되물었다.
"......뭐야. 혀 하나도 안 풀렸잖아. 연기였어?"
"아, 아니, 그게 중요한가요? 대답이나 해주세요. 이클리시아의 제 2왕자. 윌리엄 이클리시아의 목을 은쟁반에 담아 아가씨가 계실 깜빵에 사식으로 넣어드리면 되는 건가요?"
"잠깐. 난 감옥에서 금방 나갈 거야. 그 전까지 네가 사랑하는 아일린이랑 같이 가서 윌리엄을 죽 아니. 아니지. 죽이지 말고, 산 채로 끌고 와. 이건 명령이야. 결코 번복되지 않을 명령이야."
"테레제 아가씨.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펠릭스가 끼어들었다.
그에게는 우리 말이 들리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뭔가 꾸미고 있군요. 다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편...인가?
"응, 고마워, 펠릭스 심문관."
"작별인사는 해두십시오. 아마 오래 못 보게 될 테니."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
테레제가 내게 윙크를 보냈다.
그리고 지제벨의 뒤를 따라 한 마차에 탑승했다.
지제벨에게 테레제를 인도한 펠릭스는 끝까지 남아있다가 내게 얼굴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메이드 아가씨의 무기는 이 교회 와이너리에 대충 던져놓았었습니다. 무너진 것 같아 보이는데, 아무래도 회수하기 힘들겠군요."
거기 있었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