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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72화 (72/100)

〈 72화 〉 사랑하는 너에게

* * *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말끔하게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만나게 되면 과연 무슨 말을 제일 먼저 건네야 할 지를 고민하는 사이, 말발굽이 땅을 두들기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오는구나.

아가씨의 얼굴을 마주하면 우선 무릎을 꿇어야할까.

빨리 찾아뵈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야할까.

물론 내가 찾아갈 수 없었던 건 내 일방적인 행동으로 테레제가 교회에 찍히지 않았으면 했기에 그런 거지만..., 하여간에.

"뭘 그리 긴장하고 있는 거야."

아일린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틀 전 밤, 나를 덮치려던 시도가 불발로 돌아간 이후, 줄곧 저런 모습이었다.

언뜻 보면 삐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 모습도 여전히 귀엽긴 하지만.

"그냥. 오래간만에 만나려니 조금 그래서."

"나는 몇 년 만에 다시 너와 만나게 된 줄 알아?"

"그 때 첫 마디로 무슨 말을 했더라. 말 없이 칼부림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거야. 어색함을 날려버리기에 딱 좋겠어."

이 아가씨가.

나는 한숨을 뱉고,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동네에 메이드복 같은 속세의 옷 같은 게 있을리가 없어서, 일단 수녀복을 빌려서 입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재질이나 가격이 크게 차이 나긴 해도, 내가 유르덴 저택에서 출발했을 때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다.

전에 입고 있던 옷, 그리고 무기들은 아직도 교회.

정확히는 펠릭스 심문관이 압수한 채다. 어서 돌려주었으면 하는데.

똑똑.

노크소리가 한 번 울리고, 오데트가 항상 늠름하던 평소와 다르게 조금 주눅이 든 기세로 문을 열었다.

"언니. 손님 오셨어요."

"알려줘서 고마워, 오데트."

"저기,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닫힌 곳인 만큼, 소문은 정말로 잘 퍼진다.

나나 아일린이나 테레제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지만, 테레제가 찾아온다는 일정을 알고 있었던 수녀 가운데 누군가가 소문을 풀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진 오데트를 격려하며 말했다.

"괜찮아, 오데트. 아직 모르는 이야기야."

"부탁이에요. 여기 남아주세요, 언니."

"아직 모른대도."

나는 어쩌면 모두가 다 같이 유르덴 령으로 이사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설령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여기엔 자주 찾아올 생각이었다.

이젠 제 2의 고향. 그런 느낌이니까.

알비노 오우거로부터 구해낸 이후, 묘하게 잘 따르는 느낌이다.

음.

솔직히 말해서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나라도 따르지.

애초에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스스로 도맡아서 하고 있었던 만큼 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고.

딱히 아일린처럼 별 감정이 있는 건 아니리라.

......아니어야만 한다.

"그만 가봐야겠다."

"어디 가?"

"응?"

고개를 돌리니, 아일린이 휠체어를 손으로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한 순간이나마 아일린이 나를 테레제에게 가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하나 고민했었던 내가 바보였다.

"나 이제 멀쩡한 걸."

"아직 수녀님이 말한 만큼 쉬진 못했잖아."

"그거야 내가 회복마법을 쓰지 못하는 줄 알고 하신 말씀­"

"됐어. 앉아. 오데트도 도와줘."

"네, 언니!"

두 소녀가 나를 붙잡았다.

딱히 저항할 생각도 없었으니 얌전히 붙잡혀서 휠체어에 앉아주었다.

"이러는 편이 교섭에 더 도움이 될 거야."

"교섭이라니......."

"괜찮아, 코넬리아. 날 믿어."

"아일린 언니. 그.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물론이야, 오데트. 그럼 네가 코넬리아의 휠체어를 밀어주렴."

"네."

눈이 보이지 않는 여자친구를 옆에 끼고, 팔이 하나 없는 후배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탄 채 옛 주인을 만나러 가는 정상인.

양심 상 상당히 찔린다만, 아무래도 아일린은 휠체어라는 소품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달리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휠체어의 바퀴가 잘만 앞으로 향했다.

원장실 앞에서 휠체어가 멈추고, 오데트가 문을 똑똑 두들겼다.

"들어오세요."

카틀레야의 목소리.

레랴나 테레제의 목소리라면 기쁘겠다 싶었지만, 레랴에겐 모르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금제가 걸려 있는데다가, 종자를 수반한 테레제가 굳이 종자의 일을 자기가 할 리도 없지.

문이 저절로 열리고, 휠체어가 굴러간다.

화사하게 피어난 테레제가 있었다.

6개월하고 다시 2달 정도. 길다면 나름 길긴 길어도 그렇게까지 길지 않은 시간이다만, 성장기가 찾아온 소녀는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코넬리아."

너무나도 아름다워진­, 아니.

본래부터 절세가인의 싹이 보이긴 했지만, 그 결실이 이렇듯 오싹할 정도로 유아하게 피어난 테레제의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서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테레제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인사하려는 순간이었다.

"코넬리아!"

테레제의 눈시울이 순간 새빨갛게 물들더니 마치 뛰듯이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나를 안았다.

이젠 어릴 적의 아가씨도 아닌데, 여전히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신 걸까.

"네, 아가씨. 아가씨의 코넬리아에요."

"아직도, 아직도 '아가씨의 코넬리아'라고 말해주는구나."

"네? 그게 무슨."

"미안해, 코넬리아.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테레제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청초한 아가씨로 자라나셨으면서 여전히 어린애같은 구석이 있었다.

싫진 않다. 오히려 이쪽이 익숙하고. 귀엽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으니까.

나는 그런 아가씨의 어깨를 꼭 안아줄 뿐이었다.

솔직히 왜 이렇게까지 내게 미안해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만나서 반가운 건 이해하는데.

"아가씨. 너무 울면 눈 부어요. 어서 뚝 하세요."

"......흑. 흐으윽."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긴 한데.

그것까진 아무래도 선 넘는 일이겠지.

"나, 네게 너무 심한 일을 맡겼었지?"

"네?"

심한 일?

기억에 없는데.

내가 테레제에게서 마지막으로 받았던 임무가 뭐였더라.

......으음.

윌리엄 때문에 어디 실험실의 호위로 잠시 출타나갔던 거, 였던가?

그때 아일린에게 납치당해서 지금까지 여기 머무르게 되었었지.

내게 그 일을 맡겼던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때 나는 그 일을 테레제가 시킨 일이 아니라 윌리엄이 시킨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그다지 별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테레제는 실험체였던 나를 시설 호위로 보냈던 게 여태 줄곧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다.

잠깐.

좋아.

써먹을 수 있겠어.

"아가씨."

말해두지만, 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다.

"맞아요. 심한 일이었어요."

"......코넬, 리아."

"그래도 괜찮아요. 저는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심한 일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레랴와 카틀레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레랴는 조금 시큰둥한 표정이다만, 카틀레야는 이 일 자체에 관심이 없는지 아무런 생각도 없는 표정이었다.

좋아, 여기서부턴 우리 사이의 비밀로 치자고, 후배님들,

"날, 사랑해?"

"네. 아가씨도 저를 아껴주셨잖아요?"

테레제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내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 라기보단 여자아이앉기의 그 자세. 휠체어에 앉은 나보다도 시선이 낮았다.

그다지 남 보여주기에는 좋은 모습이 아니다만.

"그럼 코넬리아는 나를 계속, ...섬길 거야?"

"......부탁이 있어요."

"부탁?"

"이 교회의 아이들을, 유르덴 가문에서 받아주었으면 해요."

테레제가 내 뒤에 선 아일린과 오데트의 얼굴을 슬쩍 슬쩍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딘가 머리카락 탓에 음영이 짙어진 얼굴이 굉장히 신경쓰였다.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코넬리아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 거야?"

젠장.

너무 어설프게 접근했나.

테레제는 어려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계산에 능한 상인이다.

그걸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설령 지금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나 같은 것보다야­.

"먼저 알려줘. 코넬리아가 나를 위해 앞으로도 일해줄 건지. 아니면 네 뒤에 서있는 그 여자를 위해서 잠시 고개를 숙인 것뿐인지."

"아가씨. 저는 그저­."

"네 충성심이 내게 향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는 걸로 변질되어서, 그저 포장만 그럴싸하게 하고 있는 것뿐인지."

테레제의 황금빛 눈동자 속에, 새까만 응어리가 보였다.

물론, 그림자 탓에 생긴 눈의 착각이겠지만­.

"알려줘. 전혀 모르겠잖아."

"저는 여전히 아가씨를 섬기고 있어요. 단 한 번도 이 마음에 흠집이 새겨진 적은 없다고 단언하겠습니다."

"아일린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 들었어."

"윌리엄 왕자님이 그랬습니까?"

"......출처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거짓말은 아니지?"

입 더럽게 싸네.

게다가 거래였잖아? 나랑 아일린의 관계를 테레제에게 냅다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내가 아일린을 붙잡아놓는, 그런 식의 거래였었잖아?

대체 뭐하자는 거야, 그 자식.

"네. 아일린과 사귀고 있어요."

"......아일린 양."

"네?"

테레제가 아일린을 불렀다,

아일린은 미소를 띠고 테레제의 말을 받아주었다.

"코넬리아가 계속 나를 섬기는 것에 동의해?"

"진심을 말하자면 그다지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저는 코넬리아의 연인으로서 코넬리아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나 때문에 죽을 수도 있어. 심지어 어쩌면 내가 먼저 코넬리아에게 나를 위해 죽어달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고."

"그거 코넬리아가 동의했나요?"

"했어."

"으음. 그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 아프고 슬프지만, 역시 코넬리아를 존중할게요."

애초에 죽지도 않겠지만요.

아일린이 그렇게 덧붙였다.

과대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가씨. 코넬리아가 당신을 그렇게까지 따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뭐...?"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연인을 내버려두고 당신에게로 그렇게 돌아가야겠다고 생떼를 쓰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둘만 어디론가 도망가서 숨어 살면 그만일 텐데."

"그건 안 돼!"

"그러니까 대답을 해주세요. 목숨줄을 그쪽이 쥐고 있어서?"

"아냐."

내가 아일린의 말을 잘랐다.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이 이상으로는 내가 듣고 싶지 않다.

그건 테레제의 나약함을 건드는 일이니까.

테레제의 곁에서 계속 그녀를 지켜보아온 내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해해줄 수 있을 리도 없다.

테레제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테레제를 따르게 된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내 목숨줄과, 내 앞날을 위해서였을지언정,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코 아니다.

어린왕자와 장미처럼, 서로에게 길들여졌다.

"그런 거 아냐, 아일린."

"그럼 뭔데."

"......코넬리아가 날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고개를 숙인 테레제가 내가 끼어들어 말할 새도 없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자신감이 붙은 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더 똑똑하게 외쳤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코넬리아가 날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

"뭐, 그럼 그런 걸로 쳐요."

의외로 아일린도 담백한 반응이었다.

저쪽은 Like, 나는 Love.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과연 어떨는지.

"됐어! 나는 코넬리아를 사랑해! 그리고 사랑은 무상이라던가? 그럼 그것도 그런 걸로 해! 그러니 내가 코넬리아를 사랑하는 만큼, 코넬리아가 사랑하는 너희들도 모두 다 내가 무상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줄 테니까, 전부 다 유르덴 령으로 따라오도록 해!!"

"아가씨."

"됐어, 카틀레야! 내가 아직도 글로리아 말에 순순히 따라야 하는 어린애야?"

테레제는 가쁜 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무기 파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자격지심에 빠진 듯 후회가 서린 눈빛이, 여지껏 없을 정도로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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