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불발
* * *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 일찍도 밤이 내려왔다.
유르덴 저택이나 노른데아셀처럼 광원이 각지에 설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새까만 커튼자락이 하늘과 땅을 다 가리는 것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카틀레야. 글로리아의 현손인가 뭔가 하는 여자의 말 탓에 심란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빌어먹을 글로리아.
그래도, 테레제 얼굴은 볼 거다.
테레제가 기껏 여기까지 찾아와주었는데 내가 말도 없이 도망쳐 떠나간다면, 그 착한 아이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게 되겠지.
......아닌가.
얼굴을 마주하고 '유르덴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면전에서 말하는 쪽이 더욱 잔인한 일이려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하하."
샤워를 마치고, 몸을 씻었어도 여전히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방으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나 보란 듯이 놓아진 낯익은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저걸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망할 년. 왜 이제서야. 나는 침대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는 아일린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으로 글로리아를 향한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책상 서랍을 열어 붉은 팔찌를 서랍 속에 던져넣고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팔찌 아래에 가려져 있던 편지가 한 장.
신화시대 아티팩트라 완전재현은 무리네요.
하루에 2시간 정도 유지되려나요.
"코넬리아?"
아일린이 뜨개질을 멈추고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걱정스러움도 적지 않게 섞여있는 것이, 아무래도 점심부터 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 아일린에게 걸린 모양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사람의 감정에 더욱 민감할테니, 당연하다면 또 당연한가.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아일린은 그 이상 나를 더 캐묻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편지를 몇 번 더 읽고는, 내 침대에 앉았다.
저거, 글로리아가 보낸 것이겠지.
생각할 것도 없이, 그걸 받고, 테레제의 곁으로 돌아올 생각 말고, 아주 떠나라는 전별 선물의 의미리라.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글로리아가 아니라 테레제가 보내준 물건이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착용했겠지.
아일린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아니. 누군가를 위해서, 라는 숭고한 변명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아일린을 품고 싶은 나의 욕망이 우선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에.
"아일린."
"왜?"
"테레제 아가씨가 찾아오기로 했어."
아하. 아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짜고 있던 뜨개질 작품을 침대 옆 책상에 내려놓고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래서 하루 종일 꿍해있던 거야?"
"그렇게 보였구나. 역시 다 들켰었나보네."
"바로 알아봤지. 코넬리아는 옛날부터 꽤 낙천적이라서 웬만하면 신경질 내는 일이 없었거든. 내가 부식으로 나온 간식을 몰래 빌려 먹어도 그러려니 했었잖아?"
"그거야, 뭐......."
"그리고 내가 아는 너는 아가씨가 자길 만나러 찾아온다는 것 때문에 하루 종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역시 날카롭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의 내방이 걱정의 전부인 건 아니지?"
"......."
"전부 말해줘. 그렇지 않고선 내가 도와줄 수 없어."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카틀레야가 찾아왔던 일. 글로리아의 전언. 테레제와 나의 관계. 하나하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부 소상히 아일린에게 밝혔다.
딱 하나, 팔찌에 대해서는 남겨놓고.
"대단하네, 코넬리아."
"대체 또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그야, 귀족집 아가씨를 입맛대로 사육하는 데 성공한 거잖아. 나는 잘 안 되던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세실리아 이야기려나.
아일린은 나를 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세실리아에게 찾아간 적이 없었다.
"사육이라니."
"그럼 조교라고 해."
말이 심해지는 걸.
"그런 거 아니야. 그런 마음 품은 적 없다고."
"결과가 증명하잖아."
"으으......."
"또 보나마나 사지에서 구해내고, 일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친밀하게 대해주고, 투정이나 이야기 잘 받아주고, 하여튼 간에 아가씨를 반하게 만들고 그랬겠지."
부정을 못하겠다.
반하게 만든 건 잘 모르겠지만, 다른 건 정말 그 말 그대로라서.
아니, 아니지. 아가씨를 사지에서 구해낸 건 본래 내 일이 그런 일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일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친밀은, 이것도 역시 아가씨의 최측근이니까 아무리 친밀하게 굴어도 부족했을 테고.
투정이나 이야기 잘 받아주는 것 역시도 내 업무에 포함된 거잖아? 물론 내 업무가 아니라고 한들 내 성격 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물론 이해해. 내가 사랑하는, 이렇게나 멋진 코넬리아인 걸. 여자건 남자건 언젠가는 꼬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높은 평가 고맙네."
"그래서, 코넬리아는 어쩌고 싶어?"
나는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초.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누구 하나 버리고 싶지 않아."
"그거야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 그럼 누구 곁에 있고 싶은데?"
"......욕심쟁이라고 놀리지 마."
"응. 약속할게. 그러니까 네 입으로 말해줘."
"예전처럼 테레제를 모시고 싶어. 뿐만 아니라, 퇴근하거나 휴게시간일 때 방으로 되돌아오게 되면 지금처럼 네가 앉아서 기다려주기를 바라고 있어."
"욕심쟁이네."
"나도 알아. 안다고."
이 말괄량이 아가씨.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더라고.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왜 망설이는 거야."
"......글로리아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아서."
"그렇구나. 하지만, 나라면 있잖아. 내가 너를 찾아갔는데 너는 온데간데 없고, 네가 나를 걱정한다는 같잖은 이유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무척 화가 날 것 같아."
아일린의 말을 들으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푸욱 내어쉬고, 그렇겠지하고 중얼거릴 뿐.
다만 하나 여전히 걱정이 남아있다면, 테레제가 아일린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
아일린이야 내가 곁에 있건 말건 자신의 색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지만, 테레제는 겉보기에만 그럴싸하지 내면은 언제까지고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래. 그 말이 맞아."
역시 테레제를 만나긴 만나야겠지만.
결심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숨겨놓고 있었던 것에 대해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다.
"글로리아가 내게, 내가 테레제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성별변환의 팔찌를 줬어."
"응?"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
그러다가, 성별 변환, 이라고 한 번 중얼거리더니, 어딘가 상당히 무서운 표정이 되어서 내 어깨를 붙잡는 것이었다.
"차 봐."
"응?"
"팔찌 차 보라고."
"어어......."
나는 아일린의 기세에 밀려 팔찌를 가져 와 착용했다.
하루에 2시간이라던가. 육체가 스르르 변화해 남자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시야가 무척이나 높아지고,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두 가슴.
아주 오랫동안 되돌아가지 못해서 몹시도 익숙하지 않고, 거울도 없어서 외견을 확인할 방법도 없지만, 확실히 남자의 모습이었다.
팔랑거리는 잠옷을 입고 있었기에 옷이 폭발해버린다던가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어도, 조금 부끄럽긴 하다.
생각해보니까 여태 너무 당연하다는 듯 입고 있긴 했네...!
"......확실히 냄새부터 달라."
아일린이 다가와 내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탄탄한 근육. 벌어진 어깨.
아일린은 내가 봐도 무척 성장한 내 몸을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만져보더니, 확인을 끝낸 듯 순식간에 새빨갛게 얼굴이 물들었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비, 비겁해. 이제 코넬리아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1725번으로 되돌아간 거야?"
"그거야 내 잘못이 아닌 데다가 이거 하루 2시간 시간 제한이 있다고 글로리아의 편지에"
"뭐, 두 시간?!"
아일린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되묻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무릎을 꿇고 내 잠옷 아랫단을 위로 휙 걷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순식간에 내 아래쪽 속옷에 올리고는 벗기려
"무, 무슨 짓거리야, 아일린! 떨어져!"
"왜 떨어져!? 안 돼! 어서 네 유전자 내놔!!"
"유전자 같은 소리 하네!!"
힘겹게 아일린을 밀쳐내고 뒤로 물러났더니, 아일린이 마치 야수와 같은 얼굴로 눈을 번뜩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시간 없단 말이야!"
"야, 아일린! 정신 차려! 그리고 이런 건 좀 뭐라고 해야하나. 절차란 게 있잖아!"
"절차......."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아일린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선 자기 상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잘 여며둔 앞섶을 풀고,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끌어내렸다.
귀여운 가슴을 드러내어 보이며, 부끄러워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서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거보단 작지만, 이것도 이젠 네 거야. 마음대로 해도 좋아."
"읏, 아일린......."
"저번에 포상 준다고 했는데, 못 줬었으니까."
이런 걸 보고, 어떻게 참아.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아일린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아일린이 툭, 하고 쳐냈다.
또 거절이야.
아일린은 새빨간 얼굴인 채로, 마치 악마처럼 말한다.
"이런 건 절차가 있잖아."
"윽......."
"먼저 키스해줘. 그 다음에."
나는 아일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덩치와 키가 커진 탓인지, 나와 비슷한 키였던 아일린이 품에 다 차지도 않았....
스르르, 시야가 줄어든다.
아일린의 작은 몸이 내 몸에 가득 찼다. 어째선지 내 쓸데없이 커다란 가슴이 아일린을 조금 밀어낼 정도였다.
달그락.
내 팔에서 떨어진 팔찌가 바닥에서 뒹굴었다.
"......이거. 내 탓이야?"
약간의 침묵 후, 아일린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침묵이야말로 대답이었겠지.
아일린의 체질은 마도구마저 부수고 만다.
저번에 팔찌가 아일린의 칼에 맞아 부서졌을 때엔 소녀의 모습으로 고정되었던 반면,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아무래도 그것과 이번의 마도구가 같은 마도구가 아닌 탓이거나, 아니면 바뀌어버린 내게 2차 성징이 온 탓, 둘 중 하나일까.
"조금, 쉴게."
아일린은 상당히 상심한 얼굴로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미안, 하고 짧게 중얼거리고는 자기 침대로 되돌아가, 옷을 여미는 것도 하지 못하고 가느다란 팔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누웠다.
나는 아일린을 위로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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