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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69화 (69/100)

〈 69화 〉 자각

* * *

“무슨 일인가요?”

왕자 윌리엄이 약속도 없이 쳐들어온 불청객을 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유르덴의 공녀 테레제.

외견만 보면 한없이 아름다운 황금색 소녀가 여우귀 수인 메이드를 대동하고서 잘 꾸며진 정원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정원의 주인이 등장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을 건네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갑고 무심하게 말할 뿐이었다.

“코넬리아 어디 있나요.”

“메흐레니아 교단에서 데려갔다고, 그래서 저도 모른다고, 분명 6개월도 더 이전에 말했을 텐데요.”

“그래서. 6개월 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테레제가 조용히 찻잔를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윌리엄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테레제에게 말했다.

“메흐레니아 교단에게 손대는 건 멍청한 짓이잖아요. 안 그래요?”

“마르가리타 수녀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아하. 그 여자를 묻은 게 당신이었군요?”

“안 죽였어요. 시골로 도망가서 살고 싶다기에 도와주었을 뿐이지.”

“정말인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코넬리아 양의 위치를 알까요?”

윌리엄은 테레제를 슬쩍 보았다.

온연히 피어난 황금의 꽃. 지금의 그녀는 절대로 꺾이지 않겠지.

그래. 그녀의 옆모습은 그저 아름다웠다.

윌리엄은 머리가 굵은 이래 여태 매일같이 온갖 여자와 인연을 나눠왔으며, 또한 타레이아의 엘자와 정식 혼약을 맺은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테레제의 얼굴을 보게 되면 어느새인가 첫사랑에 빠져버린 순박한 소년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테레제의 외모에 물이 올라서 가슴 뛰는 게 더 심해지고 있었다만, 윌리엄은 결코 그 원초적인 감정에 오래 빠져있지 않았다.

그 훈련으로써, 많은 여자를 품어오지 않았던가.

애초에 저 아름답기 그지없는 외모 안쪽에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것이 유르덴의 테레제라는 여자라는 걸 다시 상기하기만 해도 팍 식어버리지만.

“유르바덴의 빌헬름 경.”

“오. 그 이름은.”

“말해주시겠어요?”

위장신분이 다 까발려진 윌리엄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 이거. 내 손발을 얼마나 잘라먹은 건가요?”

“아마 소식 끊긴 친구들 전부 제 탓일 거예요.”

“그거 제 앞에서 말해도 되는 건가요?”

윌리엄은 한숨을 뱉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느긋한 분위기였지만 그를 지키는 운디네는 이미 경계 태세를 취하고 무시무시한 모양새로 변해 있어서, 그의 속이 결코 평온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가를 치르면 알려드릴게요.”“제가 제 걸 돌려받겠다는데 왜 대가를 지불해야하죠?”

“그것도 그렇네요. 물론 그렇긴 한데, 그래서 안 낼 건가요?”

테레제가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말했다.

“뭐 갖고 싶으신데요.”

“글쎄요. 당신의 처녀라면 값이 맞으려나.”

휙.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윌리엄의 코앞에 쿼터스태프가 겨누어졌다.

운디네가 그 쿼터스태프를 휘감아 막아내고 있었고, 어느새 어디서 나타난지 모를 하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그리고 제복 차림의 소년소녀들이 레랴를 에워싸고 그녀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어때요? 인생의 절반을 헛살았다며 애달픈 교성을 뱉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 재미난 헛소리같네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덮쳐드릴까요? 손도 발도 못 내밀 처지면서....”

“......어디 한 번 해보시던가.”

윌리엄은 테레제를 살폈다.

그는 테레제가 심각한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호위가 없으면 자기 저택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만큼 겁쟁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해야 정상일 터인데, 그녀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모습이였다.

손을 떨긴커녕 식은땀조차 나지 않았다.

아직 믿는 패가 있는 건가?

“흥이 식었습니다. 그쪽 메이드의 몸으로 대금을 치를 수 있게 양보해드리지요. 개인적으로 수인을 안는 건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그쪽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야, 뭐....”

“윌리엄? 테레...제?”

윌리엄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의 비?, 타레이아의 엘자가 갓난 아들 리처드를 안은 유모, 그리고 하프 엘프 메이드 한 명을 대동한 채 정원 입구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자가 왜 여기에 있지? 하프엘프 메이드?

저런 좋은 메이드가 내 저택에 있었던가?

있었더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윌리엄의 의문에 답을 해주듯, 하프엘프 메이드가 공간마법으로 문을 열더니, 허공에서 두 자루의 권총을 꺼냈다.

윌리엄이 그 흉흉한 물건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인식하기도 전에, 두 자루 권총의 총구는 이미 각각 둘째 아이를 품은 엘자의 배와 유모의 품속에서 잠든 아이의 이마에 겨누어졌다.

“......뭐, 뭐야, 너!”

“쉬잇. 아드님 머리 날아가요. 움직이지 마세요.”

놀란 엘자를 하프엘프가 타이른다.

윌리엄이 얼빠진 모습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산같은 얼굴이 되어 다시 테레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테레제! 이 빌어먹을 창부가!!”

“험악한 말 쓰지 마세요. 육아와 태교에 무척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아드님과 왕자비님이 걱정되시면, 어서 빨리 왕자님의 하얀 친구들을 치우고 코넬리아를 숨긴 위치에 대해서나 말해주었으면 해요.”

“감히. 감히......!!”

“솔직히 그 아이가 제겐 소중하지만, 왕자님에게 있어서 대체 뭐라고 이렇게 숨기려 드는 건가요? 저도 처음엔 이렇게까지 과격한 수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윌리엄이 이를 갈았다.

레랴마저 무기를 내리자, 하얀 기사들은 윌리엄의 눈치를 보며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럼에도 하프엘프 메이드는 여전히 권총을 겨눈 채였다.

“......바란테아 숲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 거기 감금되어 있더군.”

윌리엄이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요. 처음부터 이렇게 알려주시면 될 것을 굳이 이상한 소리를 하셔선.”

“입닥쳐. 프라비의 비늘을 다 찢어발겨도 시원찮을.”

“육아에 안 좋다니까요.”

테레제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랴도 쿼터스태프를 다시 작게 만들어 허리춤에 걸고, 테레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직도 엘자와 갓난아기에게 총을 겨눈 하프엘프 메이드와 합류해, 그제야 그녀로 하여금 총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엘자를 윌리엄 쪽으로 밀어 보내주었다.

“이번 메이드도 상당히 개성적이네요.”

떠나려는 테레제를 윌리엄이 불러 붙잡았다.

윌리엄은 엘자를 돌려받아서 조금 상태가 나아졌는지, 평소처럼 존댓말이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테레제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윌리엄을 보았다.

“뭐. 코넬리아의 빈자리를 메꾸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네요. 자아, 자기소개하렴, 카틀레야.”

“귀찮습니다.”

“그렇대요, 윌리엄 왕자님.”

윌리엄은 속으로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잡종 따위가. 그것도 한낱 하녀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뭐. 귀찮아?

그래도 삭혀야만 한다.

“하하. 그럼 테레제 양도 잘못했네요. 다시 만나더라도 너무 코넬리아 양을 미워하지 않길 빌게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테레제 양의 눈에서 벗어난 사이, 코넬리아 양에겐 사랑스러운 연인이 생겼거든요. 하하하. 어쩌겠습니까? 주인님이 잘 돌보지 못한 탓인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음?”

“코넬리아는 제 곁에서 저와 함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답니다. 쉬는 시간에 연인이 생겨서 남자와 사귀건 말건, 제가 굳이 신경써야할 필요가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몸은 솔직하잖아.

윌리엄은 오늘 처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떨리는 손가락. 식은땀. 하얀 병사들 사이에서도 안 그랬으면서, 코넬리아의 소식을 들으니 바로 강한 척하려는 것 좀 보라지.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쪽이 뭔데 제게 왈가왈부­”

“저는 엘자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벌써 아들까지 가졌습니다. 그 전까지 여자를 품은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고, 미소년도 나름 건드려봤지요. 그리고 이런 제가 그쪽보다야 조금 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한 번 말해보자면, 한 번 육체적인 정을 나누면 마음의 근간이란 게 바뀝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네요. 그만 가볼게요.”

“어쩌면, 그 소녀가 당신을 더 이상 섬기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겠네요.”

“코넬리아가 그럴 리가 없잖아......!!”

믿음이 투철하시군.

윌리엄은 마음에도 없는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실수했군요.”

“알았으면 그만 닥쳐요.”

“아뇨. 당신이 너무 안쓰러워서 끝까지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테레제 당신은 코넬리아를 무척이나 아끼는 것 같은데, 혹시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자각은 하고 계셨습니까?”

테레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짜잔. 당신은 뭘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빼앗긴 겁니다. 불쌍하게도.”

내가 깐 판 위에서­라고. 굳이 말을 하진 않아도, 전해지겠지.

윌리엄이 신난 듯 웃었다.

“아일린입니다. 아일린에게 빼앗겼어요. 증거 보여드릴까요?”

“그만.”

“제 운디네가 보았죠. 아아, 사실 당신을 지키려고 코넬리아의 위치를 숨기고 있던 건데. 그야 나아가겠다면야 축복하며 응원하겠습니다!”

운디네가 두 소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얽히고섥히며, 끝내 테레제의 마력 간섭에 형태를 잃고 무너져내린다.

테레제는 마력 간섭을 위해 팔을 뻗은 채 고요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어허, 무섭군. 윌리엄은 더 이상 테레제의 신경을 건들지 않기로 했다.

테레제는 무표정으로 말했다.

“말했지만. 그 아이가 내 곁에 있기만 하면 그만이야. 누구랑 어울리건 간에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이 어찌나 지고하신지.”

“......됐어. 오늘은 실례했어, 윌리엄. 그리고 미안해, 엘자. 다음 번에 올 때엔 과자라도 가지고 올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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