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쏘아진 화살처럼
* * *
오우거를 잡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내 체감으로는 아직 2개월. 하지만, 아일린이 말하기를, 6개월.
반년.
2개월 전, 나는 훌쩍 자라버린 몸으로 병상에서 눈을 떴다.
오우거의 침샘에서 분비된 마취약에 당해 기절한 뒤로 꼬박 4개월 동안 잠들어 있었다더라.
물론 듣자 하니 오우거에게 얻어맞아서 몸이 굉장히 망가져버린 상태였던 게 크다는 듯했다.
대강 비유하자면 전력으로 달리는 트럭에 치이고 배를 바퀴로 지그시 누른 정도가 아닐까?
거기에 마취약 성분이 뇌에 추가타를 가해서 .etc
수녀들 말로는 회복 마법도 듣지 않았는데 깨어난 게 기적이라는 것 같았다.
그 꼴에서 하여간에 죽지 못한 몸뚱아리가 4개월간 어떻게 버티면서 자연치유라도 해낸 모양이다.
“나는 코넬리아를 믿고 있었어.”
믿고 있었다면서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아일린을 달래는 것도 일이었다.
이게 벌써 2개월 전의 일.
4개월간 누워서 회복했다지만, 아직도 요양이 필요해서 방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수녀들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지.
일반인이면 얄짤없이 죽었을 부상이긴 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하여튼 간에 4개월 간 잘 자고 일어나 보니.
마음 편히 잠들어 있던 사이에 자의 반 무의식 반으로 억제하고 있었던 생리 현상과 신체의 성장 등이 꾹 눌러두고 있었던 만큼 반작용을 일으키기라도 했는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진행된 상태였다.
일어나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엔 너무 어색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무심코 거울을 향해 누구세요, 라고 말해버렸을 정도였었지.
머리카락이나 키가 자란 것은 물론,
“......이래서 검을 휘두를 수는 있을까 몰라.”
고개를 살짝 내려만 봐도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융기가 둘.
현실부정할 수도 없이, 온연한 내 몸이다.
살짝.
아니, 아주 많이 부담스럽다.
예전부터 훌륭하게 자라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흘러가는 말로 몇 번 듣긴 들은 것 같은데, 정말로 무진장 훌륭하게 자라나고 말았네.
이걸 자라게 하는 데 쓰인 영양분이랑 에너지를 몸 회복하는 데 썼다면 훨씬 일찍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심지어 그렇게 자라기를 바란 키는 그다지 많이 자라지도 않았다.
아직 자 같은 걸로 재본 건 아니지만, 160을 조금 더 넘으면 다행.
솔직히 못 넘을 거 같다.
내가 보기에도 신체 비율이 여러모로 이상적일 정도로, 아니.
이상할 정도로 좋아서 다행이지, 만약 아니었더라면 그냥 짜리몽땅한 가슴괴물이 될 뻔 했다.
내 한탄을 들은 아일린은 자랑하는 거냐고 따졌지만, 나는 진심이다.
“괜찮을거야. 내 스승님도 너 못지 않았거든.”
“그래...?”
“키는 훨씬 컸지만.”
“그래.......”
기왕이면 가슴이 크는 것보다는 키가 컸으면 했다.
키 크고 멋있고 쿨한 언니. 좋잖아.
차라리 되어야만 한다면 그런 쪽의 여성이 되고 싶었다만, 키도 작고, 얼굴 인상도 새빨간 눈만 빼고 생각한다면 동글동글하고 유순하기 그지없어서 쿨함과는 무진장 거리가 있었다.
물론 귀여운 건 좋지만. 내 몸이건 아니건 싫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런데, 대체 왜...?
나는 아일린처럼 분위기 넘치는 미소녀가 되고 싶었단 말이야.
가슴이 작은 게 어때서?
답 없이 크기만 한 것보다는 아일린처럼 손바닥에 딱 들어오는 만큼의 아담한 사이즈가 차라리 귀엽고 옷매무새도 완벽을 그려내니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좋잖아.
그리고 가슴이니 엉덩이니, 하나하나의 수치만 보는 것보다는 비율과 조화가 중요하지.
무릇 인체의 미美란.
잠깐.
아, 아니. 그러니까.
앞서 말한 건 전부 '여자의 몸으로 있어야만 한다면', 을 전제로 두고 뱉은 영혼의 외침이야.
되돌아갈 수 있다면 반드시 되돌아가야만 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아일린을 위해서라도.
아일린의 말이 나와서인데, 아일린은 그다지 성장하지 않았다.
외모가 조금 더 꽃처럼 피긴했지만, 그 정도.
여자아이의 성장은 본래 빨리 오는 편이지. 그냥 나의 성장이 과하게 늦게 온 것뿐이다.
응. 맞아.
나의 귀여운 아일린은 여전히 앳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워.
에헤헤.
“왜 그래, 코넬리아?”
“응? 아무것도 아니야.”
화제를 옮기자.
이대로 가면 행복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무척 부끄러워지겠다.
“그나저나, 스승이라.”
“왜?”
“아일린의 이야기는 그다지 듣지 못한 것 같아서.”
“내 스승님은 그다지 변변찮은 사람이 아니었거든.”
“그래? 그런 말을 들으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아일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다지 자기 스승에 대해서 말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검선?인가 뭔가 하는 여자야.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자기가 무척 유명한 사람이라고 으스댔었거든.”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일린이 자신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나저나 여자...인가
조금 음습해서 낯부끄러워지지만, 한순간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네.
“아니, 미안. 들어본 적 없어.”
“미안할 것 까지야. 사실 나도 언젠가 다시 만나서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싶어서, 여태 몇 번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었는데,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 그쯤 되면 오히려 신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래?”
검선. 거창한 이름이긴 한데.
굳이 신선을 자칭하고 있는 걸 보면, 속세와 연을 끊으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걸지도 모르지.
...근데 그러면 아일린에게 유명한 사람이라며 으스대어서도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신기할 정도라니?”
“실력만큼은 진짜배기였거든. 고작 7달 정도 숙식을 같이하며 수학한 게 전부지만, 그 7개월 동안 유의미한 타격을 입힌 게 단 두 번뿐이었어. 그런데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정보가 없다는 게 이상해서.”
“말도 안 돼. 너를 갖고 놀았다고?”
“그때는 막 시설에서 나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이야. 내가 미숙했었다는 걸 감안해줘.”
“그래도 그렇지.......”
나나 아일린이나, 141번과 1725번일 시절에도 웬만한 기사에 버금갈 수 있을 정도의 검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굉장한 실력자인 모양이네.
아일린에게 검을 가르쳤을 정도라면 실력자가 아닌 편이 더 이상하겠지만.
“됐어. 그 여자 이야기는 그만하자.”
“은인이라면서, 그다지 좋은 추억이 없나봐?”
“공격에 성공한 게 단 두 번이라고 했잖아? 첫번째는 처음 만났을 때. 두번째는 헤어지기 바로 전 날. 7개월간 그렇게 부려먹고 괴롭혀놓고선 이제 공방이 어느 정도 성립되니까 바로 도망가버렸어.”
용서 안 해. 아일린이 조용히 덧붙였다.
다만 아일린의 가슴 속에서 소리 없이 끓는 듯한 분노가 보이는 듯했다.
“복수는 좋지 않아, 아일린. 모두 불행해진다고.”
“누가 복수한대? 은인을 대접하는 것뿐이야. 그 여자는 칼로 노는 걸 좋아했으니까.”
문득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긴 했는데, 방금.
나. 복수는 좋지 않아라고 그랬지.
윌리엄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다 알면서도, 그를 향한 복수심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해 나나 아일린이 그 개자식이 벌인 짓거리 탓에 당한 것과 비교하면, 그를 향한 복수심이 옅다 못해서 아예 없는 수준이다.
용서하진 않았지만 복수는 꺼리고 있다. 일방적으로 빼앗겼는데도, 미워서 눈앞에 있다면 언제나 베어 죽이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건 나의 천성인걸까.
단순히 내가 현실적인 성격이라서 그 녀석을 죽여 얻을 만족감과 추후에 뒤쫓아올 잔혹한 대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뿐이기를.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팔이 잘려나가고 다리가 부러진 오데트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아버렸다.
그 얼굴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이 조금은, 무서울 수밖에.
“코넬리아. 혹시 떨고 있어?”
“응? 아냐. 갑자기 무슨 소리래.”
“거짓말.”
아일린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붙잡고 상반신을 기울이게 해, 자기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게 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냥. 내 머리 속에 든 건 뭘까. 멀쩡하긴 한 걸까. 우리들은 대체 뭘까, 싶어서.”
“우리? 연인이지.”
젠장.
졌다.
나는 몸의 힘을 쭉 빼고, 편안하게 아일린에게 기대었다.
그렇게 있었다.
/
“옛날에.”
달이 차고 해가 지나, 마침내 어엿하게 피어난 소녀가 말했다.
너무나도 달콤한 미성美?이 귓가에서 녹아내린다.
“숙부님에게서 들은 말이 있어.”
실바람에 흩날리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더없이 찬란한 소녀였다.
소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담긴 태양빛 금색은 새파란 여름 하늘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리골드조차도 스스로를 부끄럽다 여기어 꽃잎을 떨어뜨릴 만큼 고귀하였으며, 또한 매력적이다 못해 마력적이었다.
하얀 복숭아색 살결과, 그려낸 듯 완벽한 이목구비.
연한 붉음과 함께 피어난 자그마한 입술이 다시금 움직여 목소리를 흘렸다.
“‘총알값은 누가 대신 내주지 않으며, 중고품은 반값부터 시작이다. 아무렴 네가 첫 방아쇠를 당겨서 네 상품의 처녀를 네 손으로 꺾을 필요도, 총알값을 네 지갑으로 부담할 필요도 없다. 사소한 원한 같은 건 전쟁꾼에게 맡겨라. 어차피 방아쇠 당기는 건 전쟁터에서 금화 몇 푼 받으려고 진흙탕을 구르고 있는 돼지 새끼들이 자기네들 물렁자지 좆대가리로 당겨도 차라리 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당기는 것보다야 훨씬 더 잘 당길 거다....’라고.”
“......아가씨.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언어를 조금 순화하는 것이 어떨까요?”
“레랴. 나도 천박한 거 알아. 하지만, 방금 건 우리 숙부님 어록이야. 순화하면 오히려 숙부님을 모욕하는 일이 되지 않겠어?”
“그러시다면 더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하여튼 간에.”
황금의 소녀, 테레제가 의자에 묶여 있는 중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손수 피와 타액으로 범벅진 그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래, 유르덴 공녀님.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당신께서 나를....... 윌리엄 왕자님이 이런 행패를 가만 두고 보진 않을 텐데.......”
“됐고, 코넬리아 어디 있어.”
“뭐?”
“코넬리아 어디 숨겼냐고.”
“코르넬리어...? 뭔데, 그게. 새로운 병기의 코드네임 같은 건가?”
중년이 킥킥 웃었다.
테레제는 한숨을 푹 쉬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레랴에게 신호했다.
레랴가 앞서 나와 중년의 오른손 엄지손가락만을 정확히 노리고서 쿼터스태프를 휘둘렀다. 우두둑.
비명. 그리고 넘어갈 듯한 숨과 함께, 미친 듯 터트리는 웃음.
“다음은 왼손 엄지입니다.”
“카하하하학!! 몰라, 모른다고!”
다시 휙, 하고.
비명소리.
“마르가리타 수녀는 손가락 8개까지 버티더라. 손가락으로 담배를 필 수 없어질 것 같으니까 네 이름을 불긴 불더라고.”
“메흐레니아 교단도 건들었다니. 배가 카하학. 간 밖으로 튀어나왔군. 아가씨이이이.”
“걔는 내 거야. 그리고 내가 내 걸 돌려받겠다는데, 알 바야?”
테레제가 잔혹하게 웃었다.
숙부님 말대로 5개월간 뒤에서 뒷공작이나 하며 상황만 지켜보았었다.
하지만 너무 늦잖아, 코넬리아.
“게다가 메흐레니아 교단에 비하면 그쪽 이클리시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왕자님께선 이 사태를 결코”
또다시 한숨.
휘둘러지는 스태프. 박살나버리는 손등.
비명 소리.
“실수. 잘못 때렸네요.”
“이런 개 시발!! 나는 하라는 대로 한 것 밖에 없다고! 뭘 알기나 할 것 같아?!”
중년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러는 사이로, 지하실의 문이 덜컹, 하고 열렸다.
근심 탓에 꽤 상하긴 했어도 여전히 미려한 세실리아가 이젠 질린다는 표정으로 테레제와 고문 현장을 내려보았다.
“안녕, 세실리아.”
“또 꼭두새벽부터 고문하고 있는 건가요.”
“뭘 그렇게 점잔 떠는 거야? 이건 네가 날 도와주겠다면서 종용한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세실리아가 죄책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이게 맞아.
내가 살아남으려면, 이 여자에게 붙는 게 맞아.
“아뇨.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어요.”
“아냐아냐. 나도 이해해, 우리 성녀 후보님.”
테레제가 싱긋 웃었다.
다시 쿼터스태프가 휘둘러지고, 중년의 두 손이 모두 불구가 되었다.
“케흑. 케흐으윽....... 내 손! 와하하! 내 손이 다 박살났잖아! 그래케흐흑. 켈륵. 이젠, 쿨럭. 어딜 부술거냐? 발가락? 다리? 다 좆까 이 씨발년아! 이 애미 뒤진 전쟁의 암캐년아!!”
“세실리아. 부탁할게.”
목청이 찢어져 피를 뱉는 중년에게, 세실리아가 다가간다.
그리고 다 망가진 표정으로 그의 손에 회복마법을 사용했다.
“죄송해요.”
“......어?”
놀란 중년의 눈을 한 순간 가리며, 다시 쿼터 스태프가 휘둘러진다.
“이런 옘병, 프라비의 비늘을 다 찢어발길”
회복한 손가락 두 개가 하늘을 날았다.
“마르가리타 수녀. 손가락 8개가 아니라 회복마법을 8번 받았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