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약속해
* * *
온천에서 아일린과의 관계를 진일보하고, 기분 나쁜 윌리엄이 다녀간 지도 한 달 정도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데트를 포함한 여러아이들로부터 평소의 감사 인사와 함께 받은 사탕이 커다란 산처럼 한 가득 바구니에 쌓여있었는데, 그게 바닥을 드러내자 겨우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러갔구나하고 뒤늦게 체감할 뿐이었다.
수녀들은 사탕을 안 받았으니, 상대적으로 아일린 쪽으로 들어온 게 많은 셈이었지.
으음.
시간의 무상함보다도 한 달 만에 그 많던 사탕을 거의 다 먹어치운 쪽이 더 대단한 건가.
하여간에, 그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다.
윌리엄도 오지 않았고, 테레제도.
그리고 아일린과의 사이가 진전되는 일도.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냈다.
딱히 바쁜 것도 아니고. 단 둘 만이 있을 시간도 굉장히 많았다...만.
서로간에 조금 쌉싸름한 어색함이 맴도는 것도 같고, 나는 나 나름대로 나의 성별 탓에 아일린에게 부끄러워서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있는 것 같고.
하여튼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프다....”
내가 남자였었더라면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낄 것 하나 없이 해피 러브 라이프를 만끽하며 보냈을 텐데에에에....
"뭐가 슬퍼?"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
때마침 씻고 나온 아일린이 수건으로 기나긴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닦으며 의아하다는 듯 그런 말을 했다.
불편하긴 불편한 몸이다. 아일린은 나와 다르게 마도구조차 쓸 수 없다.
물론 나도 '무척' 자주 망가뜨리고는 하지만, 아일린은 애초에 자기 신체에서 마력 자체가 방출되지 않는 모양이라, 마도구의 시동조차 못 거는 느낌이다.
“이리 와, 아일린.”
“내가 먼저 뭐가 슬픈지 물었잖아.”
“됐어. 별 거 아냐.”
“테레제랑 만나지 못하는 게 슬픈 거야?”
조금 무섭네.
뭐, 그래도.
솔직하게 테레제 생각을 하진 않았으니까.
“그런 거 아냐.”
“그래? 으음. 뭐. 알았어.”
아일린은 순순히 내게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아일린에게서 수건을 받아, 새까만 머리카락을 닦아준다.
“묘하게 익숙한 듯 한게 뭔가 그렇네.”
“좋은 거 배운 거지, 뭐.”
테레제를 섬기기 위해 드라이어기 대용인 온풍마법을 배워놓긴 배워놓았지만,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일린에겐 씨도 먹히지 않았다.
그냥 공기를 열기로 데워서 아일린의 머리에 쏠 뿐인데, 그러니까 데운 공기를 마법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있던 공기를 데웠을 뿐인데, 그런데도 아일린이나 나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온풍은 우리에게 닿기 직전에 열기를 잃고 미지근하게 변해버린다.
그럼 그냥 바람 마법은 어떤가 하면, 피부에 닿기 몇 Cm 위 어느 지점에서 닿은 찰나, 지향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냥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이따위면 차라리 부채질하는 게 낫다.
하긴 그렇지 않더라면 아무리 마법으로 피운 불길이라 하더라도, 그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닐 수는 없었겠지.
호흡하지 못하고 쪄죽던가 했겠지.
오락실 코인으로 레일건을 쓰는 여자애가 자기가 쏘는 레일건의 열기에 녹아버리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인가?
모르겠다. 하여간에 나도 모르는 나의 비밀이 하나씩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나는 나의 이질성을 새삼 깨달을 뿐이다.
“이 세상의 룰로부터 너는 사람이 아니야, 라고 한 마디 들은 듯한 기분.”
“응?”
“아일린은 그런 기분 느껴본 적, 혹시 없어?”
“세상이 네게 레몬을 준다면, 힘껏 쥐어짜서 레모네이드로 만들어버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한 건 아니지만.
으음. 좋은 말이라고 해야하나.
“세상이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하는 것 같다면, 세상이 너를 싫어할 만한 이유를 하나 만들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하하.”
“뭐. 그래도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네. 나도 가끔은 그런 미묘한 기분이 들거든.”
역에서 공간마법진을 사용할 수 없다던가.
회복마법으로 눈을 고칠 수 없다던가.
아일린이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미안해, 아일린.”
“괜찮아. 이젠 익숙하고. 오히려 특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
“특권, 이라.”
“아일린 언니!!”
문을 박차고 류드밀라가 뛰어들어왔다.
아직 늦은 시간인데.
문득 류드밀라가 내게 안마를 해주겠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혹시나 내게 안마를 해주러 온 건가 싶었지만, 그런 태평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류드밀라의 표정이 너무나도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니?”
“괴물이 나타났어!”
“류드밀라. 오데트가 말해주지 않았니? 화장실에는 괴물이 없고, 침대 아래에도 괴물은 없어. 걱정하지 말고 자러 가렴.”
“이익. 그런 건 이제 무섭지도 않다고! 아니, 아니야! 그게 아냐, 언니! 어서 나 따라와!”
무슨 일 일까. 나와 아일린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복도 저 멀리까지 가버린 류드밀라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촛불 몇 개만 켜져 있는 교회 본당.
열셋 아르카디아 신의 석상이 서서 내려보는 가운데, 수녀들이 원을 그리듯 무엇인가를 에워싸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신성 마법이라도 쓰는 듯 그녀들의 몸에서 황금빛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여러 명의 수녀가 합심해서 사용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빛이었다.
“피......?”
뭔가 냄새라도 맡은 듯, 아일린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수녀들은 상처 입은 한 소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왼팔 하나를 남겨놓고, 나머지 사지가 뜯겨나간, 어린 소녀였다.
상처를 붉게 물든 천으로 가리긴 했지만, 복부도 과다하게 홀쭉해서 안쪽이 텅 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커다란 야수가 식사하다 남긴 꼴이다.
하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강화된 육체는 소녀로 하여금 이런 꼴 임에도 죽지 못하고 살아 고통받게 하고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축복이겠지만, 회복마법도 잘 듣지 않는 몸으로 살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설령 살아남더라도 팔다리 없고, 내장까지도 다 파먹힌 몸으로, 어떻게.
“......유리카.”
“오데트 언니가 무기를 들고 나가버렸어. 나는 유리카랑 모르는 사이라서 여태 단 한 번도 대화해본 적 없는데, 오데트 언니는 아닌가봐.”
“류드밀라! 아일린에겐 다른 임무가 있으니까 데려오지 말라고 말했잖니!”
한 수녀가 류드밀라를 타일렀다.
하지만 류드밀라는 엄청 화난 얼굴로 그 수녀에게 반항하듯 외쳤다.
“그랬다가 오데트 언니까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어쩌실 건데요!!”
“류드밀라!!”
“됐어요. 제가 갈게요.”
“괜찮아, 아일린. 성기사 님이 처리해주실 거란다.”
“제가 갈게요.”
아일린은 수녀의 말을 자르고, 본당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발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코넬리아.”
“응?”
그런데, 마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아일린의 왜 그러는지 몰라, 짧게 대답하고 아일린의 말을 기다렸다.
아일린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나름의 결심을 다졌다는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도망가지 않을 거지......?”
어차피 묶여 있어서 어디 가지도 못해라고 장난칠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어 대답이 잠시 늦었더니, 아일린의 오른손이 조용히 다가와 내 오른손의 소매를 붙잡았다.
소매 끝만 살짝 붙잡은 게 미칠 듯이 귀여웠다.
“코넬리아는 나를 좋아하잖아. 도망치지 않을 거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일린. 내가 네게 말도 하지 않고 어디 갈 리가 없잖아.”
“......말로만 하지 말고, 제대로 약속해줘.”
“얘가 왜 이런담.”
아일린이 애달픈 목소리와 함께 왼손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일린의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어차피 물리적으로도 어디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을 걸었다 떼자, 아일린이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서 말하는 것이었다.
“도망가지 않으면 상을 줄게.”
“무슨 상?”
“그러게. 칭찬을 해줄까, 아니면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귀여운 상이네.”
“그렇다면, 동굴 호수에 했던 그거.”
“......윽.”
“이번에는 류드밀라의 방해 없이...... 끝까지.......”
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쁜 의미로 막힌 게 아니라, 새빨갛게 물들어선 말의 마침표도 제대로 찍지 못한 아일린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랬다.
이래서야 대체 누가 누굴 몸으로 묶어놓는다는 건지.
아니, 윌리엄의 명령을 따를 셈으로 따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 그래.......”
나도 말을 더듬고 있었다.
내 얼굴도 아일린 만큼이나 새빨간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아일린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잡으러 가는 마수가 그렇게 강한 마수인가?
그럼 내가 도움이 될 수나 있나...?
그리고 아일린의 새끼손가락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
다음 순간, 아일린의 지팡이에서 칼날이 뽑혀 나와 오랫동안 내 팔목에 묶여 있었던 금속실을 잘라내었다.
번뜩이는 금속실들이 사방으로 마구 흩어졌다.
“어, 아, 아일린?”
“숲은 넓고, 마물 녀석도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놈 같은데, 아무래도 그리 쉬운 녀석이 아닌 것 같아.”
“네가 쉬운 녀석이 아니라고 하면, 나는 그저 곤란할 뿐인데.......”
“강한 게 문제가 아냐. 교활한 게 문제지. 그리고 나는 눈도 멀었고, 수색마법 같은 건 사용할 수 없어. 거기에다 방금 전에 말했듯이 이 숲은 너무 넓어.”
“......그래.”
“나는 코넬리아를 믿어. 오데트를 구해낸다면 분명 내가 아니라 코넬리아가 오데트를 구할 거야. 그러니까 날 도와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면, 힘껏 기대에 응해주는 수밖에 없겠네.
그리고 포상을 받는다.
포상.
......뭔가 아일린도 귀족 아가씨처럼 굴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잘 흉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도.
음.
나는 딱히 목줄 취향이 아니지마는.......
에이.
몰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