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네게 고하다
* * *
옷을 벗고 가지런히 정리해 아일린의 옷 옆에 놓았다.
나름 실험의 부작용이나 여기저기 새겨졌던 흉터들을 상당히 회복했다지만,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여러 흉터 탓에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은 몸이다.
흠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어깨는 운동 열심히 한 것 치고는 여전히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냘픈 어깨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일린이 낸 흉터가 엄청 크게 남아 있어서 아쉽다는 느낌이려나.
아니, 아일린 잘못이 아니라 시설 잘못이라고.
머리카락도 하얗기만 해서 특색은 없고, 눈동자는 핏빛으로 아주 새빨개서 거울로 아주 가끔 들여다보면 나 스스로도 가끔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코넬리아.”
“으으으음.”
물론 귀여운 기색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봐도, 객관적으로 보아도, 심지어 내 몸에 새겨진 흠집들을 빼고 보더라도, 나, 즉 코넬리아는 결코 테레제 같은 절세가인이 아니다.
테레제뿐만 아니라, 아일린이나 세실리아 정도로 빼어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본판이 본판인지라 부족한 점을 애교로 채우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적당히 미소녀라고 하면 그 범주에는 들어갈 정도라고 생각하고는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정도로도 만족한다.
만족 정도가 아니라 감사하지.
이 모습으로 평생 살 마음도 없고, 내 외견이 아름다워 봐야 다른 사람꽃은 모여 꽃밭이니 여자애들이라면 또 모르지만, 남정네 놈들은 좀 아니지들 좋으라고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내가 만족하면 그만 아닐까?
지금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닌 내 입장에선 이 이상은 부담스러울지도.
“코넬리아?”
헛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일린이 내 이름을 불렀다.
속옷을 입고 있어야하나 속옷까지 다 벗어야하나 하고 고민하던 게 사고의 흐름을 타고 대체 어디까지 흘러간 건지.
“응? 으응. 미안해. 조금 생각하느라.”
“그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일린이 순식간에 다가와 내 왼팔에 안겼다.
뭐, 뭐야.
안겼다곤 했지만, 너무 빠른 탓에 거의 낚아채인 기분이다.
“아, 아일린 양?”
“지팡이가 필요해서 그래. 물에 들어갈 때까지 지팡이를 들고 갈 순 없잖아.”
제 팔을 낚아챈 속도와 정확성을 보면 지팡이 없이도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말이지.
“가슴이 닿는 것 같은데에에요.”
“좀 닿는 게 어때서?”
닿는 게 아니라 꾹 누르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큰 건 아니라지만, 의외로 볼륨감이 무진장 훌륭하잖아.
살갗과 살갗 사이에 수건이 하나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옷가지 하나 없는 부드러운 맨살에 그대로 닿았더라면 정말.
정말?
정말 좋았을 텐데?
솔직히 좋기야?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일단 솔직? 한? 사람이니까?
“아, 뭐. 응. 으응. 그렇지, 뭐. 음. 일단은, 하여간에 일단은 같은 여자끼리니까.”
“......그래.”
왜 또 귀엽게 삐진 표정을 짓는 건데.
버틸 자신 없다. 진짜 위험하다니까.
아일린과 함께 천천히 걸어 호숫가로 갔다.
아이들은 이미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듯 호수 안쪽에서 무척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준비운동은 했으려나. 안쪽은 꽤 깊어 보이는데.
쥐 나면 위험해.
“어라. 따뜻해?”
발끝을 살짝 뻗어 호숫물에 담그어 보았더니, 물 온도가 꽤나 따뜻했다.
의외의 느낌이었다.
지하호수라고 말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면 아무래도 온천이나 다름 없을지도.
아마 동굴 지하에서 솟아난 뜨거운 온천물과 동굴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빗물 등이 섞여 이런 기묘한 호수를 이룬 게 아닐까.
지하라서 햇빛이 잘 드는 것도 아니니까 위는 미지근한 물이더라도 아래는 아주 차가운 물이 아닐까 생각했더니만 그냥 따뜻하다니. 뭔가 조금 뒤통수를 후려맞은 기분이네.
하긴 동굴 내부 기온이 그렇게 춥지 않았을 무렵부터 깨달았어야 하는 거려나.
물론.
내 팔에 딱 붙어 매달린 아일린의 귀여운 무게감과 비교하자면 지하호수의 조금 같잖은 절경 따위야 아무래도 좋지만.
“아일린. 도착했어.”
“알았어. 도와줘서 고마워.”
계속 볼을 부풀리고 있던 아일린이 한 순간 아쉽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풀어주고 호숫가로 가, 발을 뻗어서 수면을 살짝 찔러보았다.
그 사이에 나는 앉기 좋아 보이는 물가의 넙데데한 바위에 살짝 앉아 다리를 뻗었다.
따스한 물에 허벅지까지 담가, 눈을 감고 온천물을 만끽했다.
나름 괜찮네.
지금은 몸이 멀쩡해서 나름 괜찮네로 끝나지만, 격한 노동이나 운동이라도 하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이 물에 몸을 담그면 정말 최고겠는걸.
풍류려나
“어때?”
“엄청 좋아.”
“네가 좋다고 하니까 엄청 보람차네. 찾은 보람이 있어.”
갑자기 보람이 있다길래, 순간 나는 설마 이 동굴을 아일린이 만든 건가하는 헛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니, 당연히 인간적으로 이런 동굴을 사람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내가 나도 모르게 '설마'하고 생각한 이유는, 그만큼 아일린이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니려나.
검을 휘둘러서 산에 구멍을 뚫는다던가.
에이. 역시 너무 과한 믿음이다. 몸도 성치 않은 애가 어떻게 동굴을 만들어.
굴착기도 아니고.
“아일린 언니! 웨블리 언니! 같이 놀자~~!!”
아일린이 쪼그려 앉아 다리를 뻗으려는 참에 호수 저 안쪽에서 아이들 중 누군가가 불렀다.
류드밀라였다.
아일린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내 손을 붙잡았다.
나도?
놀자고는 했지만, 애들의 이상한 신체능력을 생각하면 거의 모의전 같은 느낌이겠지?
나는 다리 쭉 펴고 그냥 쉬고 싶은데.
물론 요즘 매일매일 쉬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도망가자.”
“응? 도망?”
아일린이 나를 일으켰다.
내가 당황한 사이, 오데트가 류드밀라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올리고 물에 푹 담갔다.
텀벙텀벙. 류드밀라의 아직 짧은 팔다리가 수면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체벌? 물고문?
물장구를 치며 노는 것 치고는 좀 과격하지 않아?
그 사이에 아일린은 내 손목을 붙잡고 종유석들 사이로 뛰었다.
아까는 지팡이가 필요하다면서 꽉 달라붙고 있더니, 이번엔 잘만 뛰네.
그리고 오데트, 오른손으로는 류드밀라의 정수리를 물속에다 세게 짓누르고 있고, 왼손으로는 우리 쪽으로 엄지를 치켜들고 있던데.
정확히는 아일린인가.
......이거.
조금 곤란, 하네.
석주와 석수가 대나무처럼 자라난 틈새를 얼마 걷지 않아 호수에서 떨어져나온 듯한 연못이라 말해야 하나, 하여간에 작은 소택이 나타났다.
이쪽 물은 아무래도 저쪽보다 조금 더 따뜻한지 작게 모락모락 김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쪽은 그냥 온천이라는 느낌이다.
빽빽하게 자라난 석순과 종유석 탓에 아이들이 있는 큰 호수 쪽과는 시야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여기라면 조용하겠지.”
아일린은 내 손을 놓아주고, 먼저 온천에 들어갔다.
찰박, 찰박. 엉덩이 위까지 물에 담근 아일린이 몸을 돌려 내게 손을 뻗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아일린의 가느다란 허리가 자라난 듯한 모양새.
물의 요정이라도 보는 느낌이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아일린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에잇.”
“앗, 아일”
그 연분홍 장밋빛 손가락을 붙잡자마자, 아일린이 장난스러운 소리를 내며 나를 끌어당겼다.
시야가 빙글 돌아가고, 아일린의 부드러운 품속에 파묻혔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첨벙하고 따뜻한 온천 속에 빠져버렸다.
물속에서 잠시 허우적대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일린! 위험하잖아!”
“에헤헤.”
뒤늦게 물속에서 가슴 위로만 쏙 내민 아일린이 혀를 짧게 빼어 내밀고 웃었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일린은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아일린!”
“응. 역시 나는 코넬리아가 제일 좋아.”
“읏.”
“역시 네가 제일 좋아.”
아일린이 두 손을 천천히 뻗어왔다.
그리고 내 양 볼에 손가락을 천천히 올렸다.
더듬더듬. 턱, 코, 눈썹, 볼. 자기 손가락에 내 얼굴형태를 각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천천히 쓰다듬고 매만졌다.
“그다지 싫진 않지만, 사실 아직도 그리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젠 뭐. 대충 괜찮으려나.”
“내 얼굴이 어때서.......”
“얼굴뿐만이겠어?”
“굳이 그런 말을 해야해? 가슴이 아픈데.”
“흥이야. 됐어.”
아일린은 내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쇄골 위로만 수면 위로 내밀고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직까지도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풀어헤쳐서, 자기 새까만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수건 안에 넣고 양 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물 속에 담근 몸을 푸욱 늘어뜨렸다.
눈도 안 보이고, 의지하는 사람도 많고, 나도 신경 쓰일 테고.
꽤 힘들었겠지.
“고마워.”
“뭐야, 갑자기.”
양머리 수건 위를 쓱쓱 쓰다듬듯이 어루만져주었다.
아일린은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손을 휘둘러 내 손을 쳐낸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일린처럼 몸을 온천 속에 푸욱 담갔다.
그리고, 갑작스레 떠오른 한 마디를.
“아일린.”
“왜애, 코넬리아?”
“여기 아이들 다 데리고, 유르덴으로 오지 않을래?”
욕심쟁이라고 놀려도 상관 없어. 욕해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그치만, 아일린과 테레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니.
너무 가혹하잖아.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아일린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