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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61화 (61/100)

〈 61화 〉 동굴길

* * *

“오늘따라 마물이 조금 많네.”

벌써 여덟 마리 째 고블린을 베어죽인 아일린이 칼에 묻은 피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고블린들이 살의 가득한 초록색 눈으로 어디서 주운 녹슨 검을 휘두르거나 짱돌, 뗀석기 창, 화살 같은 걸 던져왔는데도, 아이들은 겁먹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못생기고 더럽다고 징그러워하긴 했지만.

물론 우리 아일린이 믿음직스럽긴 하지.

설령 꼬맹이 때의 내가 저기 끼어있었더라도 겁먹을 일이 없었을 거다.

거기다가 여기 꼬맹이들은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 포크 한 자루 나뭇가지 한 자루 가지고도 고블린은커녕 일반인 성인 정도까지 변사체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일 테니까.

"돌아가는 게 좋으려나."

"뭐? 안 돼! 벌써 여기까지 왔잖아!"

"고블린 따위 아무리 많아도 무섭지 않아!"

아이들이 힘껏 소리쳤다.

상대하는 건 아일린이지만, 뭐.

이 친구들도 고블린 정도는 정말로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애초에 처음 고블린이 나왔을 때에도 이 꼬맹이들이 '우리가 잡을게'라고 말을 꺼냈었다.

아일린의 검이 더 빨라서 문제지.

하여간에, 아일린은 한숨을 한 번 뱉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나아갔다.

아이들 말대로 정말 얼마 걷지 않아, 야트막한 바위산 틈으로 마치 그림 같은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비늘 대신 이끼를 쓰고 여기저기 낮은 수풀이 자라난 커다란 뱀이 아가리를 쫘악 벌리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의 동굴 말이야.

아이들은 망설이지 않고 들어간다. 나도 반신반의하며 뒤를 따랐다.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자연동굴이 나타났다.

의외로 바깥 빛이 여기저기서 새어들고 있어서, 그렇게 크게 어둡진 않았다.

“놀랐어. 엄청 어두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초롱이 없으면 발밑이 잘 안 보일 거예요!”

내가 중얼거리자, 초롱을 들고 있던 가장 작은 아이가 그걸 용케 듣고 크게 소리쳤다.

마치 자기가 초롱을 들고 있는 게 자랑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아이들이 다들 그렇지.

“그래, 그래. 악.”

“멋대로 남의 머리에 손 대지 말란 것이에요.”

대견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더니 초롱을 들지 않은 다른 고사리손에 손목을 붙잡혔다.

그리고 비틀렸다. 이거 놔. 악. 악.

“우후후후. 언니들도 다 별 거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기술은 제대로 들어간 거 같은데 하나도 안 아프다.

아프긴 한가. 그냥 참을 만 하다.

솔직히 힘을 조금만 줘도 그냥 풀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관절기라도 압도적인 힘 차이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

나는 그냥 놀아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내 근력이 상당히 비정상적인 걸 생각하면, 평범한 어른은 정말로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한 번은 놔주도록 하겠는 거예요. 앞으로 조심하라는 거예요.”

“그래그래, 고맙다.”

“말투가 개판인 거예요. 제가 언니에게 자비를 준 거예요. 그러니까 언니는 저를 존대해야하는 거예요.”

“오데트.”

아일린이 조용히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초롱을 들고 마음껏 으스대고 있던 작은 꼬맹이가 부르르 떨었다.

저 아이, 오데트라는 이름­

“응, 언니.”

“류드밀라 말이야, 며칠 안 본 사이에 엄청 귀여워졌네.”

아일린에게 오데트라고 불린 아이는 다른 아이였다.

“미안해, 언니.”

“미안하긴? 누가 들으면 내가 우리 오데트에게 '네가 류드밀라를 잘못 가르쳐서 저렇게 예의없게 구는 거야'라고 한 마디 하는 줄 알겠어.”

“으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놀고싶었나봐.”

“활발하니까 좋네.”

그리고 오데트는 아일린에게 한 소리 듣더니 마치 매의 눈초리로 류드밀라를 쏘아보는데, 우리 작디작은 류드밀라는 초롱을 두 손으로 겨우 말아쥐고나 있을 뿐, 두 다리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덜덜덜덜 떨고 있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러는 거야.

“난 내리갈굼 안 좋아하는데.”

솔직하게 말했다.

류드밀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일린은 내 말을 듣더니, 후훗, 하고 웃었다.

“그리고 아일린. 내가 류드밀라랑 조금 놀아주는 게 어때서.”

“그렇네. 내가 조금 심했으려나.”

아일린이 순순히 인정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사시나무 떨듯이 파르르 떨고 있잖아.”

“파르르 떤다고?”

무슨 공포의 대마왕이라도 눈앞에 둔 모습인걸.

하지만 아일린은 내 말을 듣더니, 자기도 의아하다는 듯 다시 오데트를 불렀다.

“오데트?”

“응. 언니.”

“혹시 류드밀라를 또 때렸니?”

이번엔 오데트가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 차례였다.

아무래도 아일린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좀 험하게 아이들을 훈육한 모양이다.

“으응..., 하, 하지만, 언니! 얘들이 말을 안 듣는 걸!”

“오데트. 말했잖아. 시설 사람들이랑 같은 사람이 되진 말자고. 설마 이번에도 회초리로 종아리가 터질 때까지 때린 거니?”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종아리에 붉은 선이 죽죽 그어져 있을 거다.

터졌다는 말이랑 우리 실험체 친구들의 괴력을 생각하면 붉은 선이 아니라 푸르딩딩한 피멍이 가득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지금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알 방도가 없다 해도, 씻기 위해 옷을 벗으면 바로 들키게 되리라.

그 탓인지 오데트는 별 변명하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어, 언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나, 회초리로 때리는 법 말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 걸......!”

“그렇구나. 으음. 그렇네. 어려워라.”

배운 대로 하는 법.

시설에서도 맞았고, 여기 수녀들도 작은 악행이 큰 악행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이라며, 아이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회초리로 때리고 무릎을 꿇리고 팔을 들게 한다던가, 벌 세우는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아이를 훈육하는 건 고행자들이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과는 다른 데도 말이야.

뭐어. 수녀들도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하는 것뿐이겠지.

하물며 옛 신을 끌어내리고 새 신을 올리겠다는 이단 집단에서 구출된 아이들이니까 제대로 훈육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손속을 두기도 힘들고.

음음음. 어렵긴 하네.

훈육이고자시고 어쨌거나 폭력이라면, 아이들에게 그다지 좋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나지만.

그럼 네가 한 번 가르쳐보던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또 그다지 자신이 있진 않단 말이지.

“아니에요! 죄, 죄송해요, 언니. 제가 너무 예의 없게 군 거예요.......”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에게만 그러지 않으면 되는 거야.”

“정말 죄송한 거예요.”

“그래. 그래. 그리고 원래 낯설고 모르는 사람이 나처럼 신체접촉을 시도하려 한다면 너처럼 반응하는 게 옳은 거야. 그러니까 류드밀라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해.”

“언니이이이.”

갑자기 류드밀라가 애달픈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갑자기 쪼르르 달려와서 내 뒤에 숨었다.

‘언니이이이’가 아니라 ‘오빠아아아아’ 그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오호통재라.

“저는 류드밀라에요.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코넬리아. 코넬리아 웨블리.”

“예쁜 이름이다아.”

“칭찬 고마워, 류드밀라.”

“웨블리 언니, 저 있잖아요. 안마를 엄청 잘해요! 수녀님들도 모두 아주 좋아하시고, 성기사 할아버지도 가끔 사탕을 주시면서 어깨안마를 부탁하시곤 하거든요.”

“대단하네.”

“씻는 동안, 제가 언니의 어깨를 안마해드릴게요!”

마사지라.

나쁘진 않으려나.

“좋아. 고마워.”

“이히히.”

류드밀라는 내 소맷자락을 붙잡은 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그림자 뒤에서 숨은 채, 조용히 열내고 있는 오데트를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이거.

류드밀라가 오데트에게 맞은 게 아무래도 류드밀라가 오데트를 먼저 도발해서 자꾸 화나게 한 탓인 게 아닐까.

인과응보라던가.

물론 애들이라지만 보통 애들도 아니고.

괜히 도와줬나?

“도착했어, 코넬리아.”

선두로 앞서가던 아일린이 내게 말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싱긋 웃었다.

다만 길이 쭉 이어지고 있던 눈앞은 어느새 막혀있었다.

대신 길이 수직 위로 이어지는 커다란 공동??이 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막다른 길이지 않아?

삿된 의심을 품은 모습이 모두에게 다 보였는지, 초행인 내 모습이 그리도 우스웠는지, 여러 아이들이 입가를 소맷자락으로 가리고서 쿡쿡, 하고 웃었다.

바람은 들어오는데. 길이 대체 어디로 이어지고 있을까.

설마 이 위를 암벽타기 하는 건 아니겠지­하고 육안으로 슬쩍슬쩍 살펴보는 사이에, 아일린이 살포시 위로 도약했다.

그제야 수직동굴에 자라난 석주??들 사이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작은 틈이 보였다.

아일린은 소리 없이 살짝 틈새에 내려앉아, 조용히 안쪽으로 사라졌다.

“거기구나.”

그리고 아이들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했다.

나처럼 알비노화가 꽤 진행된 아이들은 한 번이나 두 번 만에 도약해 열심히 암벽타기를 시작한 작은 아이들을 끌어 올려주었고, 그다지 알비노화가 진행되지 않았었더라도 어렵지 않게 암벽을 올랐다.

그렇게 높진 않았으니까.

혹시나 날카로운 돌조각에 손이나 베이지 않으면 좋겠네.

나는 아이들이 다 오른 뒤에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아일린과 나를 잇는 실이 살짝 팽팽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조바심을 내며 나를 부른다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읏챠. ......엇.”

“.......왔어?”

틈 안쪽으로 아주 짧은 통로가 있었고, 그 안쪽에는 역시 상당히 넓고 커다란 공동과 더불어 잔잔히 깔린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이미 신나게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차가워 보이는 호숫물에 뛰어들고 있었다.

물론 그쪽에는 눈도 가지 않았다.

통로 쪽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가 한 명.

옷을 벗고 수건을 걸친 채로.

오래 실험을 받았지만, 누구와는 다르게 전혀 상하지 않고 여전히 백옥같은 피부.

평소에 여미는 옷을 입어 잘 보이지 않던 봉긋한 가슴도, 가느다랗게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허리도, 허리 아래 귀여운 엉덩이를 따라 내려가는 허벅지, 종아리까지­

곡선을 그려내는 실루엣을 따라, 나이의 차오름에 발맞추어서 여기저기에서 터질 듯이 잔뜩 피어오르는 짙고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여성의 향기.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얇은 수건 위로 명명백백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이런 걸 고작 수건 따위로 막을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수건이 얇은 데다 광원이 옆에 있어서 수건 너머로 실루엣이 다 보인다고.

사실 그런 거 전부 다 없어도 뇌내망상만으로도 숨겨진 걸 완벽하게 상상해낼 수 있을 만큼 데이터가 달콤하잖아.......!!

결국.

나는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일린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미, 미안해.”

“코넬리아도 어서 벗어. 들어가야지.”

아일린이 부끄러운 듯 복숭아처럼 새빨간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이성, 유지할 수 있으려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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