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길들이기
* * *
마르티나의 집에서 경사로운 일이 있었던지도 이틀이 더 지났다.
아기의 이름은 마리스로 정해졌다.
마르티나의 '마'와 파리스의 '리스'를 더한 단순한 이름인 모양이었다.
아일린은 평소처럼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할 것이 없어서 의자에 앉아 바깥 아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쳐다볼 뿐이었다.
슬슬 테레제의 분노가 두려워질 즈음이기도 했다만, 아일린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
“응? 뭐가.”
“......아냐.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아서.”
나와 아일린을 잇는 금속의 실도 여전히 묶여있었고, 전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검이라도 되돌려주면, 하다못해 날붙이라도 어디서 구할 수 있다면 밤중에 몰래 잘라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것...같지도 않다.
자르려고 실에 날붙이를 대려는 그 순간에 곧바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질 것 같아서 무섭다.
게다가 내가 정말로 메흐레니아 교회의 감시를 받고 있다면, 여기서 얌전히 있는 게 테레제의 신변에도 좋지 않을까?
“아.”
아일린이 갑작스레 뭔가 생각난 듯 외마디 탄성을 내뱉더니, 열심히 뜨고 있던 옷과 바늘을 내려놓았다.
내가 무슨 일이야라고 묻자, 아일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씻으러 가자.”
“다녀오면 되잖아. 실은 충분히 기니까.”
20m 정도 되니까. 아일린이 씻으러 가건 말건, 나는 이 자리에 그냥 앉아있어도 그만이다.
내가 씻을 때도 아일린은 바깥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아일린의 방은 특실인지 방에 샤워실이 붙어있었다.
나를 맡은 데다가 이 수도원의 아이들의 대다수를 구해낸 인물이니까, 이 정도 대우는 해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아냐아냐. 호수에 갈 거야. 같이 가자.”
“......호수? 나도?”
“응. 그럼 같이 가야지.”
뭔가 느낌이 좋진 않은데.
아무래도 나랑 같이 호수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으으으으음.
“호수 옆에 사는 친구들이 다 볼 텐데.”
“거기가 아냐. 숲 안쪽에 동굴이 있고, 그 동굴에 예쁜 호수가 있거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아일린이 ‘나는 잘 모르지만 다른 아이들이 그렇다더라’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동굴 안의 호수라. 낭만적이긴 한가.
굉장히 어두울 것 같은데. 위험하진 않으려나.
“그래. 그럼 호수 옆의 친구들에 대한 걱정은 덜었네. 하지만 아직 한 명 남았잖아.”
“한 명?”
“내가 네 몸을 보는 건 상관없는 거야?”
“관심있어?”
“너 말야......”
아일린이 잔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미는 옷의 앞섶을 살짝 들추었다.
크게 들춘 것도 아니고, 아일린은 그다지 굴곡이 뚜렷하지 않아서 들춰 봐야 뭐가 보이지도 않았다.
.....일 줄 알았더니, 드러난 쇄골이 굉장히 치명적이긴 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귀여운 얼굴로 이런 장난 치지 마. 힘든 건 나니까.
“그렇게 빤히 바라볼 정도야?”
“뭐어, 너니까.”
말없이 서로 마주보기를 몇 초.
나는 볼 수 있다지만, 아일린은 뭘 보고 있는 걸까.
시선을 느낀다던가?
“조금 부끄럽네.”
그리고 다시 몇 초.
아일린이 부끄럽다는 듯 재빨리 옷을 여미고서 옷고름을 단단히 다시 채웠다.
그리고 시선을 피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피하긴 피했어도, 뭔가 어색하다.
거기에다가 아일린치고는 몹시도 선명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 가득히 빨갛게 떠오른 홍조가 자꾸 눈에 밟혔다.
자기가 먼저 장난을 시작해놓고 먼저 부끄러워하기는........
“난 갈아입을 옷을 챙길게. 코넬리아는 세면도구를 챙겨줘.”
아일린은 옷고름을 다 채우자마자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미소 한 번을 지어보이고는 곧바로 방 바깥으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한숨을 한 번 뱉고, 아일린이 부탁한 대로 샤워실에서 세면도구를 챙겼다.
갑작스레 아일린의 새까만 시야 속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거울을 볼 때 비추어지는 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리라.
물론 겉보기에는 거의 눈이 멀쩡한 것처럼 행동한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세한 것은 역시 전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가장 대표적인 걸로는, 색깔이라던가.
“아직도 옛날 모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묘하게 대시하는 것도 그렇고.
이젠 여자아이인데도앗.
......돌아갈 수 있을 거라니까.
아일린은 단지 내가 했던 말을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의 지금 모습에서 나의 옛 모습을 환시하고 있는 것뿐이다.
고맙다고 생각하는 게 좋으려나.
이렇게 묶어두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어음.
잠깐만.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이렇게 변하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쯤 벌써 그림처럼 아름다운 호숫가에 작고 튼튼한 오두막을 짓고 아일린과 둘이서 알콩달콩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저렇게 귀엽고 착한 신부랑?
물론 어딘가 뒤통수가 싸늘한게 위험한 감이 없잖아 있긴 있지만, 저 아일린이랑?!
“.......끄응.”
“준비 다 했어?”
"으아아아아아아으으으아으으으으으그그으윽......!”
“뭐야, 코넬리아? 어디 모서리에 발가락이라도 찧은 거야? 소리는 안 났는데.”
“아일리이이이이인.......”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다시 잘 생각해보면 테레제는 그냥 주인님이다.
아무리 예쁘고 아름답고 내 편의를 잘 돌봐준다 해도, 어쨌거나 결국 신분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져 있다.
어쨌건 간에 결국 오르지 못할 나무. 지붕 위의 닭이다.
멀리서 기쁜 마음으로 감상하면 즐겁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허용되지 않겠지.
물론 그 이상을 바라진 않는다.
어차피 최근 들어선 테레제를 아버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조금만, 조금만 더 우리가 일찍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나는 일레인과 헤어진 이래로 줄곧 유르덴 가문에 매여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고민하는 일 없이 아일린의 옆에 있는 걸 선택했을 텐데.
물론 테레제와 보낸 시간을 후회하진 않는다. 아가씨에게 길들여진 것을 저주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저 스스로의 약함 탓에 한심하게도 내뱉어버린 넋두리일 뿐이다.
”코넬리아.“
아일린이 그런 나를 조용히 불렀다.
언제나처럼 옅은 호선을 그리는 미소와 함께 부드러운 입술을 차분히 열어, 내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그렇, 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일찍’이라.......”
아일린의 미소가 조금 더 옅어졌다.
미소가 점점 색을 잃어가며 거의 무표정에 가까워졌을 무렵에, 고개를 한 번 털 듯이 젓더니, 다시 평소처럼 미소지으며 말했다.
하얀 옷이 담긴 바구니를 품에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서.
“다 챙기긴 챙긴 거지?”
“응.”
“좋아. 그럼 가자.”
“바구니 넘겨줘. 내가 들게.”
“괜찮아. 이 정도는.”
나는 다가가서 아일린에게서 옷 바구니를 빼앗았다.
깨끗한 옷 아래에 빨랫감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에 빨래판이 끼워져 있었다.
거의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들이었는데, 사이즈로 보아선 아무래도 아이들이 입는 옷이 아닐까 싶었다.
수녀들의 일을 조금 줄여줄 생각으로 받아온 게 아닐까.
왜 눈도 좋지 않은 아이에게 이런 걸 시키는 거야. 무리하게 하겠다고 나서도 거절했어야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은 잘 알겠고, 아일린이 거의 정상인처럼 보여서 쉽게 잊곤 한다지만.
“꽤 빠르네.”
“빼앗기지 않을 생각이었더라면 안 빼앗겼을 거잖아.”
“코넬리아. 이건 충고인데, 여자아이랑 말할 때는 굳이 입에 담을 필요가 없는 말이라면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아. 배려심을 한껏 담아서 모른 척하는 거야.”
“됐어. 너에겐 이 정도 배려심으로도 충분해. 애초에 지팡이 쪽을 빼앗으려 했으면 발을 걸어 넘어트렸을 거지?”
“뭐어. 좋아. 날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잖아?”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야, 뭐.
애초에 배려라는 건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 걸 말하잖아.
내가 배려하긴 누굴 배려해.
게다가 지팡이 이야기는 구렁이 담 넘듯이 휙 넘겨버리네.
“가자. 따라와.”
“네, 네”
“아일린 언니!”
방에서 나가려던 참에 누군가가 불렀다.
나도 따라서 방에서 나가자, 복도에 역시 빨래 바구니를 안은 꼬맹이들 몇몇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섯 명 정도.
가장 큰 아이는 우물쭈물대면서 말하지 못하곤 있어도, 아일린이나 나보다도 컸다.
그리고는 마치 도레미파솔라시도처럼 키 순서대로 나란히 서있었다.
아이들 가운데 가장 키가 작은 아이는 빨래 바구니 대신 마석이 지팡이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초롱을 두 손으로 소중하다는 듯 꼬옥 붙들고 있었다.
“우리도 데려가요!”
두 번째로 키가 큰 아이가 외쳤다.
이거 험난하겠네. 나는 여기서 사퇴하는 편이 좋지 않으려나.
......힘드려나.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죠! 데려가요!”
“호수에서 씻는 건 싫어! 애들이 막 훔쳐보러 온단 말야.”
저런 꼬맹이의 몸을 훔쳐봐서 뭣에 쓰려는 걸까.
혈기 왕성한 아이들의 마음이란, 참.
이대로 끌려가면 나도 같은 놈이 되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싶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모두 같이 가자.”
“와아아아!”
곤란하네.